양치를 하다 쓰던 치간칫솔을 버리고 새 것을 꺼내려고 욕실장을 열었다.
맙소사! 얼마 전 치간칫솔이 떨어졌다고 일부러 다이소에 찾아가서 새로 사 왔는데,
그 전에 사다놓은 치간칫솔이 욕실장에 놓여있다. 새 것 그대로.
점심시간 이후 허전한 느낌. '그러고보니 오늘 커피를 한 잔도 안 마셨네?'
냉장고를 열어 사다놓은 아메리카노 한 팩을 컵에 따라 다 마셔갈 무렵.
물건을 찾기 위해 들어온 안방 화장대 위에 놓인 빈 커피 한 팩이 눈에 띈다.
맞다! '아까 집에서 나가기 전에 이미 한 잔 마셨지...'
이젠 이런 내가 무섭다.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무엇을 찾으려고 열었는지조차 생각해내지 못하는 내가.
세탁기를 돌려놓고 다 돌아간 빨래를 까맣게 잊은 채로 며칠씩 지나치는 내가.
이런 나를 데리고 학교로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다.
결국, 어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내가 성인 ADHD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약까지 처방받고 돌아왔는데,
나와 똑 닮은 아들이 생글생글 내 앞에서 웃고 있다.
아들이 ADHD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내 유전자에 의한 증상임을 확인받고나니 죄책감이 몰려온다.
마음이 한없이 무겁다. 무거운 돌덩이가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
언젠가 아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엄마! 내가 있잖아~ 전에 엄마! 엄마!하고 엄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엄마한테 왔거든?
근데 엄마 얼굴을 딱 봤는데, 무슨 말을 하려고 엄마를 찾았는지 기억이 안나~"
어쩜...내 아들이 확실하다. 그래서 미안하다.
그래도 현대의학은 약물로 증상을 개선해준다고 하니
받아온 약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아들의 약복용을 지켜보며 약물치료의 효과는 확인했으니,
나 역시 앞으로는 나아질 일만 남았다.
문득 그간 살아온 날들이 기적인 것만 같다.
이런 정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공부를 하고 시험에 합격을 하고 일을 하며 살아왔을까.
그동안 일을 하면서 늘 실수를 남발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던 날들.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할 까 봐 내가 느꼈던 두려움과 불안들.
늘 남들보다 몇 배로 노력하는데, 몇 배는 뒤쳐진다는 생각에 자책하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나를 휘어감는다.
참, 애썼다.
안간힘으로 버티며 살아오느라.
그간 내가 타고난 능력 이상을 살아내려
평생을 긴장 속에서 숨쉬던 내가 안쓰럽다.
오늘까지만. 안쓰러워하자.
지나간 날들에 대한 위로는 오늘 하루면 충분하다.
알츠하이머가 아니라 ADHD일 뿐이다.
원인을 찾은 이상,
내 일상은 이제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 찬 공포영화가 아니다.
앞으로의 내 일상은 다양한 문제에 수없이 부딪히며
이를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에피소드형
'코믹 휴먼 드라마'가 될 것이다.
주연은 둘이다.
나. 그리고 나를 꼭 닮은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