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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밀의 화원 Dec 28. 2022

엄마, 우리는 우연이야?운명이야?
과학이야?

-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

오늘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에게 육아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학원가는 길을 나선다.

오늘은 집 밖을 나서는 길에 며칠 동안 묵혀놓았던 쓰레기를 잔뜩 가지고 나와 분리수거를 하는데,

딸이 내 손으로 부족한 박스더미를 쓰레기장까지 함께 들어주었다.

종량제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박스류와 종이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려는데,

"엄마! 이건 내가 할 거니까 엄마 하지마!"라고 딸이 외친다.

나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그랬더니, 딸이 박스 안의 종이는 '폐지류'에 넣고,

박스는 다 펼쳐서 야무지게 접어 '박스류'에 버린다.

나는 "똑순이 우리딸~! 고마워!"를 연발하며 딸과 두 손을 잡고 학원가는 길을 재촉했다.

학원에 다 와 갈 무렵, 딸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엄마, 엄마랑 나는 우연히 만난거야? 아니면 운명인거야? 아니면 과학으로 만난거야?"라고 묻는다.


갑자기 수능 최고 난이도 시험문제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는 막막함이 밀려왔지만,

심호흡을 하고 "음......"하고 뜸을 들이며 답을 고민해본다.


"우리는 과학으로 우연히 만나서 운명이 되어가는 중이야. 만남은 과학적 우연이었지만, 살면서 서로에게 운명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야"

"그럼 우리가 우연히 만났지만, 같이 살면서 운명처럼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거야?"

"응, 그렇지. 엄마랑 아빠도 똑같아. 우연히 만났지만, 살면서 서로한테 '만나야만 하는, 딱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짝'이 되어가는 게 운명이야. 근데 운명은 노력해야 만들 수 있어."

"그럼 나도 엄마한테 꼭 만나야 하는 '딱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딸'이네?"

"당연하지."

"엄마도 나한테 '딱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엄마'야. 세상에 '엄마'들은 많지만, 엄마는 단 한 명 밖에 없어."

"아까 엄마가 이야기 한 거 잘 이해했어?"

"엄마도 내가 이야기 한 거 잘 이해했어?"

"응, 잘 이해했어."

"응, 나도."


여덟 살. 너의 가슴과 머리는 이미 십 년 쯤 더 자라서 세상에 나온 것만 같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어제는 남편의 회식을 핑계로 아이 둘과 '우리끼리 회식'을 계획했다. 

아이들이 동의한 메뉴는 '치킨'이었는데, 각자 먹고 싶은 치킨은 달랐다. 

나는 아이들에게 둘이서 협상해서 통일된 치킨 하나를 알려달라고 했다. 

아들은 '뿌*클', 둘째는 '처*집' 치킨을 두고 아들은 우격다짐을 하는데, 딸아이는 참 논리적이다.


"야, 뿌*클 먹자. 그거 맛있잖아."

"싫어, 얼마 전에 그거 먹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을 차례지."  

"그냥 뿌*클 먹자. 나는 그게 먹고 싶다고."

"그건 오빠가 먹고 싶다는 거지, 난 아니라고. 그건 우기는 거잖아."

아들은 자기 방에 가서 포장을 뜯지도 않은 샤프 하나를 꺼내왔다. 문구류를 좋아하는 동생을 꼬실 요량이다.

"뿌*클을 먹으면 이 샤프를 줄게. 어때?"

"난 그거 안 줘도 돼. 이번에는 처*집 치킨을 먹을 거야."

"난 그거 매워서 못 먹어. 넌 매워도 안 매워도 먹을 수 있지만, 난 매운 걸 못 먹는다고. 그러니까 뿌*클 먹자."

"그럼 오빠는 처*집 치킨에서 소떡소떡을 먹어."

"싫어. 난 소떡소떡 안 좋아해."

한참을 실랑이를 하고, 서로의 물건으로 사은품을 걸어도 결판이 나지 않더니...

한참만에 둘째가 결론을 내렸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오빠가 좋아하는 뿌*클을 먹어. 대신에 1월에는 무조건 내가 먹겠다는 처*집 치킨을 먹어야 해. 알았지?

"그래, 좋아."

이렇게 둘째의 통 큰 양보로 협상은 끝이 났다. 나는 서둘러 뿌*클을 시켜주었다. 


그런데, 둘째가 서재로 들어가더니 한참만에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나온다.

각서다.

오빠와의 약속을 각서로 남기겠다고 컴퓨터와 한참을 씨름하더니 문서로 작성해서 뽑아온거다.^^;;;

'~군'과 ~양'을 구분한 것도, '흔쾌히'라는 말을 넣은 것도...이걸 워드로 쳐서 프린트 해 온 것도 신기해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한편으로는 '무섭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아이들은 각자 싸인을 하고 각서를 냉장고에 붙여두었다. 1월달에 처*집 양념치킨을 먹기 전까지.

저 각서는 우리집 냉장고에 붙어 있을 예정이다. 

 

늘 똑소리나게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딸아이를 보면, 

때로는 그 입을 막고 싶고...(키우는 입장에서 어려울 때가 참 많다.) 때로는 진심으로 부럽다. 

나는 늘 할 말을 삼키면서 사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는데, 

저 아이는  내가 상상 속에서나 꿈꾸던 기질을 타고난 것 같다.

어쩜 저렇게 막힘없이 술술...자기 할 말을 다 쏟아낼 수가 있을까...?   


여덟 살에 우연과 운명을 묻는 너에게.

나는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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