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공무원 준비생에서 브랜드대표까지
해주는 창업을 준비하며 혼자 제품을 개발하고, 브랜드를 만들고, 나라에서 지원하는 지원서를 내며 밤새 그렇게 고생해 왔다. 하지만 사실, 그 이전의 해주는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었다. 홀로 도서관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그때의 해주는 정말 누구보다 노력했었다. 짬짬이 공부를 하면서 아이들을 위해 밥을 해놓고, 간식까지 준비하고, 남편이 힘들지 않게 하려고 시간을 쪼개며 쪼개며 늘 신경을 써왔다.
그런데 그 시절, 큰 사건 하나가 있었다.
공무원 학원을 다니던 시절, 해주는 넷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일찍 보냈다. 해주는 집에서 막내와 함께 공부하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해 막내딸을 어린이집에 잠깐 보내며, 혼자 도서관에서 강의를 들으며 혼자서는 도저히 역부족이라 느끼기 시작해 결국 공무원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곤 학원을 다니면서 남편이 힘들지 않게 아이들 저녁 반찬, 간식까지 전부 준비해 두고 나가곤 했다. 처음엔 남편이 응원해 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에게 점점 버거운 일이 되었다.
항상 해주와 함께 했던 아이들의 저녁 챙기기, 아이들 돌보기 등. 그 모든 것들이 남편에게는 혼자서는 벅찼을 것이다. 해주는 매일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서 한 시간 거리의 학원으로 갔다. 그리고 집에 7시 전에 도착하려고 전력질주했다. 학원이 끝나면 가방을 싸서 뛰어나와 버스를 탔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으면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던 어느 여름날, 큰 사건이 터졌다.
큰아이는 치과치료를 받고 있었다. 신경치료를 해야 해서 주사를 맞아야 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마취를 경험했던 아이는 그때부터 치과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해주와 있을 때는 늘 달래고 안아주며 진땀을 빼며 진료를 받았었다. 2시간씩 기다리면서도, 결국은 해냈던 아이였다. 그런데 그날은 해주가 학원에 있는 날이었다. 마침 치과에 예약이 되어 있었는데, 남편이 큰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가려고 했다. 남편과 분명 치료를 잘 받겠다고 약속했던 큰 아이가 병원에 가기 싫어서 도망친 것이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리곤 아이 혼자 집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다. 그리고 울면서 남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남편은 밖에서 여러 번 문을 열라고 했지만, 아이는 끝까지 버텼다. 결국 남편은 그 튼튼한 현관문을 부수려까지 했다고 한다.
아이의 위기, 나의 위기
남편은 더위에 매우 취약한 사람이다. 그날도 무척 더운 날이었다. 게다가 동생들도 함께 데리고 있었나 보다.
해주는 그때 학원 수업 중이었다. 수업 중엔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 놓기 때문에 남편의 수십 통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업도중 강사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곁에와 나를 급하게 나오라 불렀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겼대요. 지금 바로 전화하셔야 한대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가 다쳤나?)
(집안에 뭔 사고가 났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급히 복도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남편의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전화를 걸자,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학원 당장 그만둬. 지금 당장 그만두고 안 오면,
내가 주원이 어떻게 할지도 몰라.”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너무 겁이 났다. 설마 아빤데 아이를 해치기야 하겠어? 그런데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수업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틈이 없었다. 해주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한 시간 거리였다. 그 길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해주를 보자 한소리 했다.
“나 이제 너 지원 못 해줘.”
“너 학원 다니지 마 그냥.”
“나는 더 이상 이젠 못 하겠으니깐.”
“네가 알아서 해.”
“혼자 집에서 공부를 하든 말든.”
남편의 말을 들은 해주는 기분이 나쁘기보다 큰아이부터 살펴야 했다. 그리곤 이방 저 방 큰아이를 찾는데 큰아이가 자기 방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아이에게 아빠가 때렸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했다. 그리곤 아이에게 왜 그런지 물었더니, 아이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도 해주의 피는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일단 아이를 진정시키고 아이에게 말했다.
“치과에 가기 싫다고, 그렇게 도망가면 어떻게 해?”
“물론 무서워서 도망갈 수도 있어.”
“그렇지만 문을 걸어 잠그면 어떻게 해.”
“동생들도 있고 아빠도 밖에서 기다리는데.”
“네가 잘못한 거 맞지만, 그렇다 해서
아빠가 널 때린 건 당연하단건 아니야.”
“물론 잘못했으면 혼나고 맞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런데..”
도저히 해주는 떠는 아이를 보고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해주남편 역시 아이에 대한 마음이 특별한 건 알지만, 해주의 모성은 지금껏 말해 왔듯이 유독 각별하다. 그리고 큰 아이는 자기의 분신이라 생각할 만큼 이 아이는 해주에게 더욱 특별했다. 유독 큰아이를 맘에 쓰고 있던 해주는 남편을 이해하면서도
“네가 감히? 내 새끼를?”
해주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큰 아이만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젠 해주도 본인 자신을 걷잡을 수 없도록 흥분해 있었다. 만약 그 당시 정말 남편이 해주를 건드리기만 했어도 아마 해주는 위험한 선택을 했을 수도 있을 만큼 분노하고 또 분노하고 있었다.
거침없는 질주.
(내가 아무리 여자고 너보다 힘이 없어도,
새끼를 해한 사람에겐 그 어떠한 것도 뵈질 않는 거야.)
(내가 너에게 덤벼드는 순간, 너도 나도 둘 중 하나는 이 집에선 살아 나가긴 힘들 거야.)
(내 남편이라서? 아이들 아빠라서? 그 명칭 하나로 그 누가 됐든 내 새끼한테 해를 가하는 순간, 너는 그냥 너고 나는 내가 되는 거야.)
해주는 속으로 분노의 외침을 돼 새겼다.
그리고 첫 아이를 달래고 집에 들어간 순간 생각했다.
(어디 한번 나 건드려봐.)
(진짜 내가 어떻게 하나 보자.)
(이 판 사판이야 내가 너랑 안 살았으면 안 살았지.)
(네가 그동안 어떠한 잘못을 했어도 나는 용서했지만.)
(내가 어떠한 수모를 겪었어도 다 참아 왔지만.)
(이건 아니야. 너는 내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어.)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엄하게 가르친다. 남편도 그렇긴 하지만 오히려 해주가 남편보다 평상시 아이들을 더 엄하게 가르치고, 말이 통하는 아이들에겐 많은 대화를 이어가지만, 그 마저도 아이들이 안 들으면 엉덩이도 때리고, 정말 무섭게 혼낸다. 사랑할 땐 한없이 보듬어 주고 예뻐해 주지만 아이들이 잘못했을 땐 밖이고, 안이고 그 장소를 가르지 않고 훈육한다. 동네에서도 물론 유명하다. 해주에겐 다른 눈들의 창피함도 필요 없다. 특히 아들이 셋이다 보니, 군인인 남편도 더욱 단호해져만 갔다. 남편은 원래 그렇지 않았다. 훈육을 담당하는 건 언제나 해주였고 남편은 아이들의 자상한 아빠 역할만 했다. 그런 남편도 점점 커가는 이들셋들을 좋은 말로만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훈육은 훈육이 아니었다. 벌벌 떨고 있는 첫째를 보니 해주는 모든 감정이 폭발했다. 그날 이후 해주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진짜 열심히 했는데, 너무 허무했다.
공부를 잘 하진 못했지만, 영어 기초를 잡는 데만 몇 달이 걸려 막내 수유를 하며 새벽 내내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영어를 배워왔다. 그렇게 몇 달을 버텨 영어 기초도 떼고 이제 학원에 갈 수 있겠다 싶어서 학원에 가게 되었는데. 매일 하루를 4시간씩만 자며 그렇게 공부에만 매진했고, 아이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좋은 좀 더 나은 교육과 우리의 안정된 노후를 선물하고팠는데, 결국 해주는 그렇게 무너졌다.
그리곤 생각했다.
“이게 맞는 걸까?”
가족을 위해 시작했던 내 공부가 결국 내 아이를 고통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게 해주는 너무나 괴로웠다. 힘들게 공부했던 그 순간도 학원을 그만두었던 그 순간이 아니라, 그날 첫 아이에게 그런 큰 아픔과 트라우마를 안겨준 내게 그리고 그때의 남편을 한없이 원망했다.
그리고 그 원망은 점점 크게 분노로 변해갔고, 매일같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다른 엄마들처럼 나가서 엄마들과 시시덕 거리며 카페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모임이라 한 답 치고 술을 마시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리 노후와 아이들 학원비를 벌어보겠다고, 녹슨 이 몸과 머리고 끙끙대며 매일같이 도서관에 다녔던 날들이었는데.)
(내 새끼한테 그렇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나를 이렇게 철저히 무너지게 만들어?)
(조금만 더 참아주지.)
(조금만 더 버텨주지.)
(진짜 너무 하는구나.)
그렇게 매일을 분노에 차 생각해 왔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그때 그만두길 잘했다 싶기도 한다.
해주는 그렇게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더 소홀해지고 전처럼 끈끈했던 아이들과의 시간들도 공부에 투자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지금은 아이들 옆에 내가 있어야 하고 시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아직 막내들은 한창 엄마의 손이 필요하니깐. 그렇게 해주는 다시 아이들과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동안 미뤘던 시간들을 되찾기 위해 아이들과 하나씩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큰아이와 단둘이 카페에도 가고, 도서관에도 가고,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며 정서 회복에 집중했다. 그 후로는 ‘공부’라는 단어만 들어도 치가 떨렸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리고 해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큰아이와 둘째 아이가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니, 이제는 경제적인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그동안 한 번도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해주는 이제야 비로소 “돈”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래서 해주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쇼피(Shopee)와 아마존이었다. 해주는 또 매일같이 공부했다. 그리곤 운이 좋게도 쇼피 루키 1기에 선발되었다.그곳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상품을 올리고 배웠다.
처음엔 수익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 첫 수익도 생겼다. 해주는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을 본다. 완벽을 추구한다. 그래서 상품 하나를 올리는데 3~4시간씩 걸렸다. 그렇게 정성껏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첫 창업, 1인 브랜드 대표
“이렇게 남의 상품을 정성껏 올릴 시간에,
내 상품을 만들어 팔아보면 어떨까?”
그렇게 제품 개발을 시작했다. 매일 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캐릭터를 직접 그리고, 브랜드 이름을 짓고,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에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인천에서 동대문까지 1시간 반을 달려갔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공장을 알아보고 사람들을 만나며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그리고 각종 정부 지원사업에 지원서를 냈고, 놀랍게도 네 번이나 선정되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제품을 완성했고, 운 좋게 강남 LG U+ ‘일상비일상의 틈’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제품은 아직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해주가 만든 첫 제품은 출산 이불 세트였다. 워낙 고가였고, 해주는 마진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엄마로서, 진심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건 해주 능력 밖이었다. 혼자서 만능으로 상품페이지, 광고, 관리 등 모든 걸 해야 했기 때문에 서서히 지쳐만 갔다. 무엇보다 홀로 매일 그렇게 버텨왔기에 그게 가장 힘들었었다. 그래도 해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첫 론칭의 목표는 판매가 아니라 브랜드 인지도로 잡고, 팔리지 않아도 괜찮고 지금 강남점에 입저한 내 상품을 사람들이 봐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 시기에 다섯째 아이가 찾아왔다. 그리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판매는 현실이었다. 광고비는 너무 비쌌고, 해주는 빚을 내서 시작한 사업이라 함부로 광고도 할 수 없었다. 광고를 해서 팔린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해주는 마음을 다잡았다. 없어서 시작한 사업이라, 남편에게도 미안했다. 그리곤 이번엔 지난날을 나에게 용서를 구하듯 남편은 해주가 이사업을 한다 했을 때 단 한 번도 말리지 않았고 선뜻 지원해 주었다. 어쩌면 남편은 지난날 자신 때문에 포기하게 되었던 해주의 공부를 사죄하듯 오히려 그런 나를 더 응원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글을 쓰며 그동안의 복잡했던 일들도 쉼 없이 달려왔던 날들도 글로 인해 치료받고 있는 중이다. 다시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책을 내는 것이었다. 지금은 정식 작가가 아니지만, 브런치에서 글을 쓰며 그 꿈을 향해 가고 있다. 구독자는 10명 남짓이지만, 그 10명이 내 글을 읽어주고, 우연히라도 내 이야기에 머물러준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책을 읽을 시간은 부족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내 삶의 숨구멍이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아이 다섯의 엄마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나로서. 이제야 비로소 안다. 공무원 준비생이었던 나, 포기했던 꿈을 글 속에서 다시 꺼내 보기도 하고 이불 한 장에서부터 시작된 브랜드도 다시 회상하면서 먼 훗날 마음을 우리는 작가가 되는 나도 꿈꿔본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남편의 말이 생각난다.
너는 전생에 일 못한 귀신이 붙은 게 분명해
“어떻게 너는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냐?”
“꼭 네 몸을 혹독 시켜야만 하루가 편하냐?”
남편이 내게 그동안 해왔던 말들이다 이 말속엔 내가 조금은 편히 쉬었으면 하는 그 마음 나도 알고 있지만, 그토록 놀기 좋아했던 내가, 음주가무를 좋아했던 내가, 타락천사였던 내가, 오로지 아이만 낳고 키울 수 있었던 건 항상 쉬지 않고 무언갈 해 왔기 때문에 산후우울증도 무탈히 그냥 지나가버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어쩌면 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내가 잠시도 헛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내 몸을 그렇게 혹사시킨 게 아닐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