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이어진 팔자, 피어난 운명
꽃잎이 여물 들 듯 설화와 달수의 사랑도 그렇게 여물어 갔다. 돌섬 나무에도 하나둘 탐스러운 열매가 자라기 시작했고 그해 무렵 설화에게도 조용한 변화가 찾아왔다.
“쳇기가 있나, 왜 이렇게 속이 안 좋지.”
“할매한테 가서 물어봐야 허나.”
물을 마셔도 메스꺼운 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설화는 혹 할머니들이 걱정할까 봐, 차마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며칠을 굶다시피 지내자 주먹만한 설화의 얼굴은 더욱 헬쓱해져만 갔다.
“안되 아가.. 가지마라 아가.”
“설화야..안 된다. 가지 말거라.
안 된다.. 내 새끼.. 내 강아지야.”
“얼른 돌아와라 설화야, 설화야!!”
아무리 목 놓아 불러도 물길은 설화를 태운 연꽃을 더 멀리,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 났지만 묘한 감정과 불안한 이 기운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천지신명님, 이건 너무 하잖소..”
“내 새끼들 다 데려가면 나는 어찌 산다오.”
“어찌 이렇게 매정하고 냉정하단 말이오.”
“새 생명 주면 산 자는 데려간단 말이오.”
“그게 이치면 애초에 생명을 주지 말았어야지요.”
“이런 억지, 이런 욕심이 어디 있다오..”
달래 할매는 꿈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한걸음에 설화네 집으로 달려갔다. 설화를 보니 얼굴은 너무나 야위어 있었다. 그리고 설화의 뒷 태를 보자마자 달래 할매는 단번에 직감했다. 서둘러 설화를 데리고 곧장 한약방으로 향했고, 의원은 설화의 맥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기가 들었소.”
의원의 말을 듣자마자 달래 할매는 기쁨보다 걱정이 먼저 자리했다.
달래 할매는 꽃분이 할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어젯밤 꿈 이야기를 꺼냈다.
“성님. 어쩌요.. 나 선몽을 꿨는디요.”
“아이고, 자네가 나보다 빨랐구먼.
우리 설화 태몽 꾼겨?”
“뭔디, 사내여 딸이여?”
“성님. 꿈에 바다에 큰 연꽃이 떠내려 왔는데
내 앞까지 와서 꽃잎이 열리더라고요.”
“아이고야, 그럼 딸일 것이구먼.”
“근디.. 설화가 아기만 내 품에 안기고
그 연꽃 타고 다시 떠나버렸당께요.”
“아니 그게 뭔 소리여? 애만 맡기고 가버렸다고?”
“성님. 어떡하믄 좋당께요.. 나 겁나서 죽겄어요.”
“아이, 아닐껴. 동상 너무 걱정 말어.
태몽은 태몽일 뿐이여.”
꽃분이 할매도 속으로는 불안했으나 달래 할매를 위해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이 설화의 임신소식을 들은 달수는 처음 경험하는 기쁨인지 얼굴이 활짝 피어난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 후로 달수는 돌섬에 나무하러 갈 때마다 새콤달콤한 산열매를 따다가 하얀 보자기에 고이 감싸 설화에게 가져다주었다. 설화는 그것만큼은 곧잘 먹었고, 달수는 갖갖지 들꽃들로 화관을 만들어 설화의 머리에 씌워주곤 했다. 설화를 향한 달수의 사랑은 온 동네에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날이 갈수록 설화의 배는 불러왔고 두 할매와 달수의 정성으로 설화의 얼굴에도 점점 생기가 돌아왔다. 달래 할매는 더 부지런히 기도에 나섰다. 어느 날부터는 꽃분이 할매도 함께 했다.
“동상, 같이 가게나.”
“아이고 성님, 나오지 말랬잖아요.
날씨도 추운데 넘어지면 어째요.”
“집에 가만 있으믄 더 심심허다니께.”
두 할매는 손을 붙잡고 천천히 기도길을 걸었다. 바람은 잔잔했고 돌섬 숲속에서는 이상하게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 평온한 날, 설화는 달수를 기다리며 마루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진통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양수가 터지고 설화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놀라 뛰어와 설화를 부축했다. 두 할매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출산 준비를 시작했다.
하얀 천, 삶은 명주수건, 뜨끈한 물, 설화의 입에 물릴 재갈까지. 두 할매 호흡으로 출산준비는 빠르게 준비되었다. 설화는 힘을 줄 때마다 기력이 빠져 쓰러지기를 반복했고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재갈을 힘껏 물었다. 낮이던 하늘은 금세 어둠이 내려앉고 바깥에는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달수는 밖에서 어찌할 줄 몰라 제자리만 맴돌았다.
마지막 진통이 시작되는 순간.
천둥이 울리고 하늘에 구멍 난 듯 큰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다.
“응애! 응애!”
꽃분이 할매는 아이를 받아 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달래 할매는 설화 옆으로 달려가 설화가 살아 있는지 부터 확인했다.
“아가..설화야.괜찮냐..”
설화는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아주 작은 힘으로 끄덕였다. 두 할매는 설화와 아기를 번갈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꽃분이 할매는 그제서야 아기를 설화 품에 안겨주었다.
“설화야.. 아기가 너를 꼭 빼닮았구먼,
너 닮은 예쁜 딸이다. 너무 고생혔다.”
설화는 힘겨운 웃음을 지었다. 방 안에는 잠시지만 따뜻한 평화가 흘렀다.
그 순간! 설화의 고개가 힘없이 앞으로 떨어졌다.
“옴마야!! 아가 왜 이러냐!!”
달래 할매는 비명을 지르며 설화를 흔들었다. 꽃분이 할매는 놀란 마음으로 약방으로 달려갔다. 달수는 아기를 안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떨기만 했다. 의원이 도착해 설화의 맥을 짚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젖었다.
“아니, 시방 뭔 소리래요?
좀 전까지 괜찮았는디..”
설화의 눈에서는 말없는 눈물이 흘렀다. 달수는 설화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의 입술은 떨리고, 평생 단 한 번도 열리지 않던 목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열렸다.
“서.. 서. 설..”
설화는 마지막 순간 달수를 보며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눈빛으로 말을 했다. 그 눈빛이 사라지기 전, 설화의 손이 달수의 손에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설. 설화야..”
“안 돼! 눈 떠!!”
“설화야 눈 떠!!”
달수의 절규가 번개 치는 밤하늘을 찢었다. 달래 할매는 그대로 실신했고 꽃분이 할매는 울부짖었다.
달수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설화를 닮은 눈매, 작은 숨, 작은 손가락. 설화가 세상에 남기고 간 마지막 생명이었다.
달수의 입이 다시 열렸다.
“설..화야..”
“연화.”
“우리 딸 이름. 연화..”
“너 닮은..연화야..”
달수의 슬픔이 비 내리는 하늘을 찢고 번개 아래로 길게 울려 퍼졌다. 그 울음은 마치 오래전부터 막혀 있던 세상의 문을 한순간에 열어젖힌 듯했다. 모두의 곁에 설화는 떠났지만, 그녀의 마지막 숨결은 작은 몸에 깃들어 연꽃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갓 태어난 아이의 살결에는 하늘의 표식이 조용히 돋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다시 환생한 것처럼.
세상의 이치이듯 누군가는 떠나고, 어디선가 새 생명은 빈 자리들을 다시 매꾼다. 떠나간자의 슬픔을 위로하듯 작은 생명 하나가 또 다른 이의 하루를 버티게 한다.
설화는 그렇게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작은 숨결은 20년전 그대로 다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숨결에서 또 다른 행복이 조용히 싹 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