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인연은 신분 따위도 막을 수 없다.
달수와 연화가 우물가에서 비밀을 나누던 날 이후로, 집안의 시간은 조금 다른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연화는 여전히 해뜨기 전이면 먼저 눈을 떴다.
“엄마, 나 왔어.”
새벽안개가 옅게 깔린 우물가에서, 연화는 빠지지 않고 인사를 올렸다. 우물 속에서 물결이 찰랑~하고 대답했다.
(오늘은 산에 가지 말거라, 아가.)
귀에 익숙한 설화의 목소리가 들리면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오늘은 아부지랑 장에만 다녀올게.”
우물은 그저 오래된 물웅덩이처럼 고요했지만, 연화에게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말이 많은 존재였다. 연화덕에 하나둘 살림살이가 늘고 곳간엔 곡식이 가득 쌓이기 시작했다. 마당 한쪽에는 약초들을 말리는 멍석이 펼쳐져 있었고 마루 한편에는 여전히 설화가 있었다.
“연화야, 장에 갈라면 인자 슬슬 나설 때 되었다.
늦기 전에 서두르자”
“응, 아부지.”
“엄마, 나 다녀올게.
오늘은 엄마 말대로 산에는 안 가고,
장에만 갔다 올게 걱정하지마.”
연화는 엄마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곤 장에 나섰다.
장에 내려가면, 달수와 연화는 이제 더 이상 궁색한 나무꾼과 그 딸이 아니었다.
“어이, 달수 왔는가!”
“오늘은 또 뭔 귀한 약초를 가져왔는가?”
상인들은 달수가 가져온 약초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옆에서 연화는 장터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닭장이 있는 쪽에서는 암탉이 깃털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인가 봐.)
연화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답했다.
"걱정 마. 좋은 곳으로 가서 네 새끼들과 잘 살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암탉은 신기하다는 듯 연화를 보며 꼬꼬댁하고 한 번 울어주었다. 그리고 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연화야.”
고개를 돌리니, 양반집 어르신의 아들 ‘윤’이 서 있었다.
“윤이 오라버니!”
“또 아버님 따라 장에 왔어?”
“응. 내가 아버지 도우려면 함께 나와야지.”
윤은 살짝 웃더니, 연화의 손을 보았다.
“오늘은 산에 안 갔구나.”
“어떻게 알았어?”
“네 손에 흙이 안 묻었잖아.”
윤의 말에 연화는 얼굴이 시뻘건 사과처럼 붉어졌다.
“오라버니도 참 부끄럽게,
무슨 여인 손을 그렇게 훔쳐봐요?”
둘이 장을 함께 돌기 시작하자,
몇몇 장꾼들은 수군거렸다.
“저기, 양반집 도령이랑 돌섬 계집애 아니여?”
“그러게. 요즘도 허구한 날 붙어 다니더구먼.”
“에그, 세상 말세여.
나무꾼 딸이랑 양반집 도령이랑”
그러나 그 소리는 달수의 귀에만 박혔다. 달수는 멀리서 둘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바로 그때, 윤의 아버지인 양반집 어르신이 달수에게 다가왔다.
“달수 오늘도 일찍 장에 왔구먼!”
“아이고, 어르신.”
달수는 허리를 깊게 굽혔다.
“또 장에까지 나오셨습니까.”
“나도 늙어 가는 마당에 집에만 있으면 뭐 허겠는가. 바람도 쐴 겸 해서 나와봤지.”
어르신은 연화와 윤이 장 끝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윤이에게는 연화와 비슷한 또래의 여동생, 설희가 있었다. 연화는 윤이보다 세 살 어린 아가씨였지만, 설희는 연화와 동갑이었다. 설희는 태어날 때부터 극히 약하게 태어나 기침만 해도 숨이 넘어갈 듯 가쁘고, 숨이 조금만 차도 손끝이 파랗게 변하곤 했다. 유명하다 하는 의원을 다 불러보아도 병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고, 어디를 가도 ‘올해를 넘기기 힘들다’는 얘기만 들을 뿐이었다.
그런 설희를 살린 건
의원도, 약방도 아닌 달수와 연화가 준 ‘돌섬 약초’였다. 양반집 어르신과 달수가 처음 돌섬에서 마주친 날 이후, 달수는 설희에게 좋다는 뿌리와 잎, 희귀한 버섯을 돌섬에서 만날 때마다 아무 대가 없이 쥐여주었다. 처음엔 그저 정으로, 설희의 소식을 들은 날부터는 그저 같은 아비로서 자식이 안쓰러워서 건넨 것이었다.
달수의 그 약초들은 놀랄 만큼 설희의 기력을 조금씩 되살려 놓았고 작은 그릇의 죽이라도 먹게 되는 날이 생겼다. 양반집 어르신과 안방마님은 그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는 설희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느 날 양반집 어르신은 달수와 연화를 집에 초대하였다. 그리곤 달수와 양반집 어르신은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달수 우리 설희가 한해 한해 잘 넘긴 건,
의원이 아니라 바로 자네 덕분이네.”
“자네에게 감사의 표시가 너무 늦었네.
미안하네..”
“나도 겉으로만 양반과 상민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만,
속으론 아니었다 보네. 실은 주변 눈들을 의식하고 있었나 보구먼.”
“그런 핑계로 자네에게 술상 한번 대접 한번 못 했으니,
이거 참 부끄럽고 미안하구먼.”
“아이고 어르신 무슨 소리랍니까.
어떻게 양반과 상민이 같이 겸상을 한답니까.”
“아이고 그건 제가 허락 못 합니다요.
하도 어르신이 간곡히 청하셔서 제가 오긴 혔다만,
다른 양반집 어르신들이 보면 저 맞아 죽습니다요.”
“저는 어르신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요.”
“어서 이리 앉게나 달수.
차린 건 없다만 우리 안사람이 직접
정성스레 준비한 거네 내 잔 한잔 받게나.”
“아이고 무슨 소리 입니까요.
진짜 큰일 납니다요.”
“어서 이리 올라오게나 달수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어서 와서 같이 한잔 하게나.”
“아이고 정말 어르신도 참..
아이고 나 이거 어떡해 해야여..”
안절부절못하는 달수를 보고 윤이가 다가온다.
“어서 올라오셔요.
저희 어머님이 오늘 내내 준비하셨습니다요.”
윤에게 반 이끌려 마루에 올라간 달수 무릎을 꿇고 양반어르신 앞에 앉았다.
“달수 어서 한잔 받게나.
이 노인네 인자 팔 떨어지겠네.”
못 이기는 척 달수가 막걸리 한잔을 받고 한 번에 꿀떡들이마셨다. 그리곤 양반집 어르신에게 말했다.
“어르신 혹시 기억하십니까?
처음 돌섬에서 마주쳤을 때 어르신이 제게 뭐라셨는지 아십니까.”
“그때의 저는 상민 축에도 못 끼는 보잘것없는
가난한 지게꾼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신분차이를 논하시지 않고
같은 아비의 시선으로 바라봐 주셨습니다.
저는 그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르신은 저를 유일하게 사람으로 봐주신 분입니다요.
제 아이를 따뜻하게 바라봐 주셨고,
도련님과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지요.”
“그러던 중 어르신댁의 아씨가 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릅니다요.”
“그 얘기를 듣자니 같은 딸가진 아비로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요..”
“다 제가 좋아서 한 거입니다요 암요 .
그러니 절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요.”
“아니네. 달수.
나는 그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것이네.”
어르신의 말에 달수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윤이 짝으로 연화를 내 생각하고 있다만,
자네는 어떻한가.”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혼인 말일세.”
“윤이도 서당에 다니며 글 배우는 나이가 되었고,
저거 보게 둘이 저렇게 잘 붙어 다니지 않는가 ”
어르신은 한참이나 연화와 윤을 바라봤다.
.
“달수. 내가 보기엔 둘이 참 잘 어울리는 한쌍 같네.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멀리서 윤이 연화의 머리칼에 걸린 나뭇잎을 조심스레 떼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윤의 손길은 참으로 다정했고 달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저릿했다. 하지만 달수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르신의 말씀은 과분하옵니다.
하나 양반가와 상민의 혼인이라니,
감히 제가 입에 올릴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달수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러자 어르신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한결 낮은 목소리로 진심을 꺼냈다.
“달수야 자네 나도 이 말을 솔직히 해야 쓰겠네.”
달수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설희가 태어날적부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하루하루가 고비였네 벗도 없고, 말동무도 없이,
그저 방 안에 갇혀 살았네.”
어르신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우리가 설희덕에 윤이를 어릴 적부터 신경을 못 썼다네..”
“이 아이가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본적이 나는 없다네.”
“그런데 연화를 만나고 나서부터 우리 윤이는 달라졌네.”
“얼굴에 생기가 돌고 아이가 글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다네,”
“나는 이게 다 자네와 연화 덕분이라고 생각하네..”
“우리 집에 연화가 들어오면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네..”
달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드네”
“자네도 부모가 아니던가,
자네도 자네 하나뿐이 없는 딸이
행복하면 그것이 된 거 아니겠는가.”
“나는 자네도 나와 같은 뜻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만..”
어르신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르신은 마지막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달수 자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혼인은 신분이 짓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짓는 것이네.”
“그리고 자넨 이미 상민 중에서도
누구나 다 아는 갑부 아니겠는가”
“나도 절대 손해 보지는 않는다네,
그니깐 너무 부담스러워하시지 마시게나.”
달수의 눈가가 붉어졌다.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혼인의 문이, 지금 그의 앞에서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어르신 저 같은 상민에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요.”
“자네는 어떻한가?
자네도 내가 생각하는 거와 분명 같지?”
어르신 옆에 언방마님이 살포시 앉았다. 그녀의 눈빛은 어르신의 온화한 얼굴과는 정반대로 차고 날카로웠지만 따뜻한 사람 같았다.
달수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여기는 우리 집 안사람이네.”
“인사가 늦었습니다. 연화 아비 달수입니다요.”
달수가 다시 한번 절을 하자, 안주인은 그제야 슬쩍 눈길을 내렸다.
“그래요.”
짧은 대답 한 마디.
그녀의 시선이 연화를 스쳤다.
어르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사람에게도 자네 얘기를 다 해 두었네.
연화와 윤이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말일세.”
안주인은 달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선, 우리 설희를 위해 귀한 약재를 여러 번 구해온 것 고맙네.”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그 약재들 덕에 아이가 한결 좋아지긴 했지요.
하지만..”
그날 마루 위에서 오간 말들은 단순한 혼담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 속에는 부모가 자식을 지키기 위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의 굴레가 있었다. 양반과 상민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냈고, 행복조차 감히 바라보는 방식이 달랐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만큼은 신분의 차이가 가를 수 없었다.
아픈 딸을 위해 어떤 정성도 마다하지 않던 양반집 어르신의 마음이나, 같은 아비의 마음으로 어르신에게 약초를 건넸던 달수의 마음이나 두 아비의 마음은 똑같은 무게로 자식을 향해 있었다. 그 시대는 신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였지만, 정작 가장 큰 선택의 순간에는 사람의 마음이 신분보다 앞서 있었다. 자식을 위해 마음을 다하는 부모의 깊은 정은 시간도, 세상의 질서도 넘지 못하는 법이다. 신분이 갈랐던 세상에서도, 그 마음만큼은 끝내 같은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