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서 시작된 하늘의 저울

제11화: 서서히 기울어가는 운명

by 최해주

마을 사람들은 오래도록 이렇게 말했다.

“달수가 살아 돌아온 건, 기적이라니까요.”


열흘 동안 깜깜무소식이던 사람이다. 돌섬 절벽 아래서 죽어도 열 번은 죽었을 상황이었으니, 그가 두 다리로 마을로 걸어 들어온 것만으로도 이미 한 번은 죽었다 살아난 목숨이었다. 달수는 돌아온 뒤로 한동안 집안 사랑채에 누워 몸을 추스르며 회복 중이었다.


새벽 우물과 첫 물

연화는 언제나 그랬듯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마다 우물가로 나갔다. 해가 뜨기 전, 안개가 마을과 산을 살짝 덮고 있을 무렵이었다. 연화는 우물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천지신명님 할머님들, 그리고 어머니
우리 아버지 지켜주셔서 참말로 감사합니다.”

조용한 새벽, 연화의 목소리만 맑게 울렸다.


“오늘도 가족 모두가 무사허게 아무 탈 없이
지금처럼만 아픈 데 없이 오래오래 살게 해주이소.”

그때 우물 속 물결이 찰랑-하고 둥글게 퍼져 나갔다.


어딘가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살짝 스쳐가는 것 같았으나 연화는 그저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연화는 그날도 첫 우물물을 조심스레 떠서 집으로 향했다.


우물물이 만든 변화: 1년 뒤

정성스러운 날들이 하나둘 쌓이고, 그동안의 계절도 네 번이나 바뀌었다. 그리고 동네에선 윤씨가문에 듣기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양반어르신네 안방마님 말여

요새 얼굴이 어찌 그리 좋아지셨대?”


“그러게 말이여.

전보다 열 살은 젊어진 것 같은디?”


“날이 갈수록 그 분만 얼굴이 새색시 같아지는 거여? 참말로 비결이 뭘까 궁금해 죽겄네 그려.”

동네 사람들은 안방마님에게만 세월은 거꾸로 간다며 신기하다고 말했다.


“아가, 요새 부인들이 요즘 나만 보면

얼굴이 새색시가 됐다고 하드라.

내가 보기엔, 이게 다 네 덕인 것 같다.

참으로 고맙구나.”

연화는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아니여요.”


“아니다. 세상 물이 다 같은 물인 줄 아냐.
정성을 실으면, 물도 약이 되는 법이지.”


욕심쟁이 양반의 소원

“어르신! 어르신 퍼뜩 나와 보시라요!!”


관에서 내린 관원이 말에서 내려 급히 걸음을 옮기더니, 양반 어르신 앞에 무릎을 꿇고 붉은 비단에 싸인 사또 임명장을 두 손으로 올려 드렸다.

허허허! 이게 다 하늘의 뜻 아니겠느냐!”
양반어르신은 크게 웃으며, 차오르는 감정에 눈가의 눈물을 거칠게 훔쳤다.

연화는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기쁨과 서늘한 떨림이 동시에 가슴속에서 일렁였다.


(우물은 분명 선한 이에게 복을 준다 했는데
과연 이 복은 모두에게 같은 모양일까?)


연화의 기쁜 소식: 아이의 탄생

사또가 된 그해 겨울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화는 몸이 이상한 걸 느꼈다.

“아가, 요새 어지럽다 하고, 속이 메슥거린다 했지?”
시어머니가 슬며시 물었다.


“예.. 자꾸 쳇기가 있는 거 같아요”


“혹시 아가 달거리는 언제 했느냐?”

연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그러고 보니 지난달에는

그냥 넘긴 것 같은데요.?”

그날 연화를 데리고 의원에게 진맥을 맡으러 갔다.


“감축드리옵니다. 아씨. 태기가 들었습니다.”


“아이고 아가. 이거 참 잘됐구나. 잘 됐어!”


“우리 집에 줄줄이 좋은 경사만 있구나.

네가 우리 집 복덩이로구나 복덩이야. ”


(믿기지 않은 듯 배를 쓰다듬으며 활짝 웃는 연화)


윤은 연화의 소식을 듣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방 안을 빙빙 돌았다.

“나도 드디어 아버지가 되는 것이야?

그게 참말이야? 연화야 너무 고맙다.!”


원이의 탄생

연화는 온 집안의 기도와 보살핌 속에서 아주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고, 달수는 첫 손주 원이의 탄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참지 못했다.


1년 후 변화

원이는 쑥쑥 자라 어느덧 돌을 맞이했다. 돌잔치는 그야말로 온 마을이 들썩거리도록 성대하게 열렸고 모든 이들이 원이를 축복해 주었다 .


“아이고, 저 작은 손 좀 봐라.”


“눈매가 윤서방이랑 똑같구먼..”


“사내가 어쩜 저리 우리 연화처럼 오목조목 예쁘게 생겼나 몰러. 설화 당신도 그렇게 생각허지??”

설화는 달수의 손을 꼭 붙잡고 원이를 원 없이 바라 보았다.


이별 준비중

원이의 돌이 지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윤이는 마침내 준비하던 과거시험을 보러 길을 떠났다. 그 사이 원이의 외할머니 설화의 몸은 서서히 기운을 잃어갔다. 마치 오래도록 버텨온 마음의 끈을 하나씩 놓는 듯, 그녀는 날이 갈수록 더욱 쇠약해졌다.


“어머니, 조금만 더 버텨줘요 예?

윤서방 얼굴은 그래도 보고 가야제..”


설화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연화와 손주의 얼굴을 담았다. 연화와 손주를 본는 설화의 손에서 마지막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제발.. 천지신명님 제발...

이번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제발..”

연화는 빌고 빌며 또 빌었으며 이번 기도는 하늘도 연화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 했다.


우물과의 마지막 대화: 그리고 침묵

그날 밤, 연화는 울음이 채 마르기도 전에 우물가로 뛰어갔다.


“어머니!!! 나 연화여라!!”

연화는 숨이 턱에 차도록 소리쳤다.


“엄니. 엄니.. 대답 좀 혀요!!

우물 속 물결이 천천히 빛을 내며 일렁였다.

그때, 아주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새끼 우리 연화...잘 있거라.)

그토록 듣고 싶었던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엄니!! 엄니!! 가지 마!!
나 아직 엄니한테 하고픈 말 많단 말이여..


“엄니!!! 제발 아직은 아니라고 말 혀줘..제발..”


“나를 영영 떠난 게 아니라고,

아부지와 우리 곁을 영영 떠난게 아니라고..”


우물에서 엄니와 나는 전처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제발 말해줘요 엄니...”

연화의 절규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어느덧 1년 후

설화가 떠난 지 어느덧 한 해가 지났다 시간은 그렇게 야속하게 흘러 점점 평소처럼 흘러가는 듯했다. 연화는 주변 소란 소리에 원이를 안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도령님이 오신다! 윤 도령님 장원급제하셨다!”


길을 비켜라! 도령님 행차시다!”


어서 대문을 활짝 열어라!”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진다!


윤 도령님이 돌아오신다! 장원급제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환호와 웃음으로 길을 가득 메웠다.


연화가 원이를 안고 윤을 바라보며 그동안의 설움을 반짝이는 눈망울과 함께 삼켰다.

윤이는 그런 연화를 보고 말 없이 그녀를 꼭 끌어 안았다.


장모님 소식은 나도 오면서 들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연화야..”


“이 슬픔을 너와 내가 함께 나눴어야 했는데 ..

연화 너 혼자만 짊어지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

셋은 그렇게 한 몸이 된채 오랫동안 서로를 꼭 품었다.


달수의 공과 행수: 그리고 양반 신분

아이가 세 살이 될 무렵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모두들 제자리로 다시 찾아가는듯 했다.


“행수어르신, 오늘은 어디로 드십니까요?”
하인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달수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돌섬의 길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매일같이 이른 아침이 되면 짚신 끈을 단단히 묶고 산 바람을 가르며 거침없이 걸어 올랐다.


“이만한 산삼이,

한 해에 몇 번이나 나오는 줄 아느냐!”
관청에서 직접 내려온 관리가 감탄을 터뜨렸다.


달수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 몸이 살아 돌아온 목숨이니,산이 준 복을 나라에 돌려드리는 것이 옳다 생각 헙니다.”


그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삼 한 뿌리로도 큰 부를 얻을 수 있었지만 모두를 나라에 정직하게 바쳤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며칠 뒤, 한성에서 내려온 붉은 도장이 찍힌 왕명이 달수의 집 앞에 도착했다.


“돌섬 달수, 앞으로는
채삼(採蔘) 행수로 임명한다!”
관리의 목소리가 마을 위로 울려 퍼졌다.


“또한, 충성과 공로가 깊은 자이니
호적을 새로 올려 양반 반열에 들게 하노라!”

순간,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달수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양반이라니요..

감히 어찌 저같이 천한 것에 양반의 신분이, 가당치도 않사옵니다.


관리관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이 있는 자에게 신분을 나누는 것이
나라의 법도요.”


동네 사람들은 너도나도 환호 했고 사람들은 이제 그를 이렇게 불렀다.

“달수 행수어르신!”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것도 모자라 나라가 인정한 사람, 그리고 마침내 양반의 신분까지 하사 받은 사람. 달수는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귀한 약초들을 아무 대가없이 그들에게 건네 주었고 그들은 그런 달수를 존경하고 있었다.


한편, 사또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는 밤이 되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허억! 저리 안 가느냐! 내 앞에서 썩 꺼지거라!”

사또는 한밤중에 벌떡벌떡 일어나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인들이 뛰어들어와도 그 눈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저놈 봐라, 저놈!

피투성이가 돼서 절벽 밑에서 날 노려본다!!”

하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또 시작 됐구먼..”


연화는 알고 있었다.


“하늘은 참말로 공평한 법이여라.”


“선한 자는 끝내 길을 얻고,
악한 자는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법이지요.”


“사또 어르신, 당신이 우리 아버지께 어떻게 했는지, 이제 나는 다 알고 있소.”


“착하고 순한 우리 아버지를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이용만 했지요.”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돈줄이자 물주로만 보았고, 우리 아버지가 목숨 걸고 캐온 귀한 산삼을 아픈 당신 딸에게 조차 내 주지도 않았지요 그 욕심 때문에!”

연화는 이를 꽉 깨물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속아 넘어가도,
나와 하늘은 다 알고 있소.”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더욱 욕심만 부리면 탈이 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여라.”


“그러니 이제, 하늘이 당신을 심판할 것이오.”



참되게 살아온 이는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더 넓은 길과 더 깊은 복을 얻게 된다. 누군가는 무너지는 그 순간에서도 누군가는 다시 피어난다. 낡은 것은 부서지고 새로운 것은 자라난다. 하늘은 결국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 하는 일이며, 이 세상을 움직이는 진짜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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