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지인이 도저히 기독교의 성서는 잔인해서 읽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아주 지적으로 설명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숱한 전쟁과 갈등, 반목, 하나님의 엄벌을 볼 때 절대적인 선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속성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늘 위대한 음악가의 클래식을 들으며 매사에 침착하고 감정적인 요동 없이, 지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를 하던 참 매력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온화하고 교양있는 그녀가 원하던 사랑과 평화는 성경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성경에는 숱한 전쟁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에 전쟁은 잔혹함 그 자체다. 전쟁은 땅을 황폐화시키고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다. 땅과 생명을 해치고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인간은 그렇게 전쟁을 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세상 일이 이해되지 않을 때, 가끔 나의 내면을 바라보며 외부세계가 이해될 때가 있다. 특히, 운전을 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할 때가 있다. 차 내부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져서 잠시 창문을 열었다 닫는 순간, 내 마음에 들었던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전쟁 같은 내 마음.
그렇다. 내 마음은 가끔 평온하고, 더 가끔 기쁘고, 종종 번민과 혼란 속에 있고, 더 자주 고독과 싸운다. 말씀 앞에서 순종하며 사는 날은 손에 꼽기 어렵지만 죄와 싸우며 피투성이가 되어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는 날이 더 많다. 일이 많으면 숙고나 잡념에 빠질 여유가 없어서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되어 사느라 가장 완악한 자가 되어 있고, 좀 한가해지면 심연에서 온갖 기억들이 올라와 마음을 어지럽히면 그것들에 질서를 잡아주느라 정신적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여하튼 쉴 새 없이 내 삶은 전쟁처럼 돌아가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완전한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지혜의 사건이다. 복음을 들어 믿는 자는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이미 승리자가 된 것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으로도 충분한데 그 믿음이 오락가락이니, 믿음을 지키려 온마음을 다하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은 전쟁터가 될 때가 있다. 그깟 믿음이 무엇일까 싶지만 마음만큼 귀한 것은 없다.
성경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당신의 계획을 태초부터 세우셨다고 한다. 이 정도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세상 사는 것에 강하고 담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밖에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었던 인간의 죄성을 생각하면 내 하루가 전쟁 같은 이유는 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과 여전히 나를 노리는 사단과 마귀의 노림수의 대격돌 때문일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삶을 전쟁터로 보는 것이 낙원으로 보는 것보다 지혜로운 선택이라 생각한다. 알든 알지 못하든, 나는 천국을 소망하는 영적 존재이므로 내가 사는 세상을 영적 세계로 정의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천사들이 봄날의 향기로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꽃과 나무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도 그것이 싫어 용을 쓰는 악한 어둠이 공존하는 것이 이 세상이라 본다는 의미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예레미야 10:24)
예레미야의 기도처럼, 내 두려움의 본질은 주님과의 분리에 있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때는 아이에게 따뜻한 허그를 해줄 때만은 아니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호되게 징계를 할 때도 사랑이다. 내 자녀가 아니라면 그 아이의 행동은 너그러이 지나갈 수 있지만 내 자녀의 잘못은 산고를 치르고 정성을 다하였기에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부모로서 기쁠 때보다 속상할 때 자녀에 대한 사랑과 귀함을 더 여실히 느낀다. 그리고 부모로서 진짜 기쁠 때는 부모의 이 깊은 속내를 자녀가 이해해 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어느 때든 나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타당한 것이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이 두려움, 주님과의 분리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인류 역사상 없었지만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해진다.
우리의 삶은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회복되는 것이 본래의 성질이다. 가장 극한의 고통의 사례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있다. 물과 피를 다 쏟을 때 예수님은 거둘 수 있다면 거두어 주시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의 끝은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의 시간을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보내셨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상흔을 보이시며 다시 나타나셨다.
나는 인생의 완벽한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죽고, 완전히 다시 살아나는 것에 있다. 두려움의 근원은 그래서 완전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흥미진진한 절망의 때마다, 선지자들이 오들오들 떨며 용기를 잃고 있을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저 강을 건너면 반드시 완전한 회복과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메시지라 생각한다. 전쟁터에서 살아내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내 실존의 구심점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고 단단히 붙들고 서 있어야 한다.
주님 앞에 살기에 늘 전쟁 같은 하루도 승리를 선포하며 기쁨으로 보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워 나도 내 하루에 최선을 다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기에 죄와 싸우며 때로는 피투성이가 되어도,
성령의 능력으로 살기에 어둠을 공격하며 나도 한 대 맞아 시뻘건 멍이 들어도
이 영적 전쟁에서 이미 승리하신 예수를 바라보며 새 힘을 냅니다.
주님이시여!
오늘도 나의 하루에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부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