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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품위있는 여가생활

왜 나이가 들면 역사를 좋아하게 될까

by 소주인

학부를 막 졸업한 시점, 뭐라도 스펙을 쌓아야겠다는 알량한 생각에 박물관 도슨트 자원봉사를 했었다. 뭘 좀 잘 알아보고 했어야 하는데, 보통 전공 졸업자는 박물관 인턴으로 들어간다고들 한다. 하지만 뭐 이미 지원해서 붙었으니 이거라도 감지덕지였다. 도슨트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은 대부분 은퇴한 후 역사에 관심을 가진 연세 지긋한 분들이었다. 전직 역사교사도 있긴 했지만 역사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분들도 많았다.

내가 자원봉사를 한 박물관 뿐 아니라 역사나 문화재와 관련된 장소에서 열과 성을 다하는 분들 중에서는 장년~노년층이 참 많이 보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도 매일같이 나와서 역사 관련 책(혹은 족보)을 읽는 노인들이 많이 보였고, 평생교육원이나 혹은 그 유사한 역사 강좌에서도 그랬다. 그들은 젊은 시절부터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걸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새롭게 관심이 생기는 걸까?



김광계도 역사책을 참 많이 읽었다. 역사서란 과거의 일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곤 했다. 사실의 기록 그 자체도 중요한 목적이었지만, 귀감이 되거나 혹은 반면교사로 삼을만한 일들만을 뽑아 편찬한 사서들도 있었다. 김광계는 비교적 젊은 시절인 36세부터 사서오경 중의 하나인 <서경(書經)>을 읽고, 베끼고, 외우기 시작했는데, 57세가 되어서도 같은 일을 했다. 아마도 다 베끼거나 다 외우지를 못했던 것 같다.


또 요순부터 주나라까지를 적은 서경 이후의 시대를 저술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도 읽었다. 자치통감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에서부터 오대 주세종(周世宗) 현덕(顯德) 6년(959)까지의 역사를 엮은 방대한 분량이다. 다룬 시기만 해도 1,362년간에 달하며, 총 294권이었다. 자치통감강목은 주자가 자치통감을 요약하고 주석을 달아 편찬한 책이었다. 또 강지의 요약본인 통감절요도 읽었다. 김광계는 긴긴 장마철동안 통감을 끼고 앉아 열심히 읽었다.


중국역사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김광계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역사서를 구해서 읽었다. 그 중 하나인 <동각잡기(東閣雜記)>라는 책은 이정형(李廷馨)이 지었는데,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이라고도 불렸다. 이 책은 조선 태조대부터 시작하여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정치상황을 기록하고 이름난 신하들의 행적과 야사들을 모아놓았다. 본디 아는 이야기나 가까운 곳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법인지, 김광계는 한동안 종일 앉아서 이 책을 붙들고 있었다.


또 재종숙 김령(金坽)의 셋째 자형인 이찬(李燦)에게해동야언(海東野言)을 빌려왔다. 이 책은 여사(女士)로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허균(許筠)의 형제인 허봉(許篈)이 조선 태조대부터 명종대에 이르는 시기의 야사를 모아 지은 책이다. 총 2권인데, 김광계가 빌려온 것은 총 6책으로 필사되어 있었다. 김광계는 책을 빌려온 직후 조금 훑어보았는데, 한참동안 즐겁게 읽을 만 하다고 일기에 써 놓았다. 하지만 바빴는지 책을 빌려온 이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읽기 시작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김광계가 역사책을 대하는 태도이다. 이미 과거시험을 볼 마음은 없었기에 공부를 하려고 본 것도 아니고, 대단한 진리를 궁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병을 조리하는 동안, 혹은 장마철 동안,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농사일을 감독하는 동안 짬짬이 읽는 것으로 보아 심심파적에 가까웠던 듯하다.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소설처럼 읽어나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아니니까 더 점잖아 보이기도 하는 이점이 있다.


어쩌면 박물관과 도서관, 강의실의 그분들도 부담없는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니), 그리고 남들 보기에 조금 교양있어 보이는 여가생활을 골랐을지도 모르겠다.




<매원일기>


정축년(1637, 인조15)-김광계 57세


7월 19일 을유

종일 글을 읽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는 이정형李廷馨 공이 기록한 글인데, 보려한 지는 오래나 지금에야 비로소 읽은 것이다. 기록된 내용은 우리 조선의 태조太祖로부터 선조宣祖까지로 내용이 아주 자세하여 볼만하였다.

○ 밤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까지 내렸다.

十九日 乙酉 終日看書. 東閣雜記, 李公廷馨之所錄也. 欲見久矣, 今始得之. 記事自我太祖迄于宣祖, 甚詳可觀也. ○ 夜雨達曙.


7월 20일 병술

또 글을 읽었다.

二十日 丙戌 又看書.



무인년(1638, 인조16)-김광계 58세


4월 14일 정미

「가인家人」을 읽었다.

○ 종일 바람이 크게 불었다.

중명仲明에게서 해동야언海東野言을 빌려와 열어 보았는데, 기뻐할 만하였다.

十四日 丁未 家人. ○ 終日大風. 海東野言, 借於仲明, 披覽可喜.


5월 19일 신사

아침에 백달伯達과 맹견孟堅 형제가 권공權公을 보러 왔다. 밥을 먹은 뒤에 권공이 떠나고 여러 벗도 다 흩어졌다.

○ 해동야언海東野言을 보았다.

十九日 辛巳 朝伯達·孟堅兄弟來見權公. 食後權公去, 諸友皆散. ○ 看野言.


5월 20일 임오

잡다한 책을 보았다. 지난 번 용궁龍宮에 갔을 때, 중명仲明에게 해동야언海東野言 여섯 책을 빌려와 요즈음 여가를 내어 보고 있는데 본조(조선)의 일을 기록한 것이 아주 상세하였다. 어떤 사람이 지었는지를 모르나 혹자는 허봉許篈이 지은 것이라고도 말한다.

二十日 壬午 看雜書. 頃往龍宮時, 借海東野言六冊於仲明, 邇來偸閑披閱, 記本朝事甚詳. 未知何人所撰, 或云許篈所記也.



기축년(1639, 인조17)-김광계 59세


7월 16일 신미

일을 감독하는 틈틈이 <통감절요>를 보았다.

날이 저물어서 크게 비가 내려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十六日 辛未 [董]役之隙看史. 日暮大雨, 終夜不止.


7월 17일 임신

강물이 또 한창 불어났는데, 며칠 전보다 몇 길이나 불어났다.

○ 중 덕안德安이 왔다.

○ 날이 저물어서 크게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렸는데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 <통감절요>를 보았다.

十七日 壬申 江水又盛漲, 加於前日數丈. ○ 山人德安來. ○ 日暮大雷雨, 終夜不止. ○ 看史.


7월 18일 계유

강물이 또 크게 불어났다. 병자년(1636) 이후로 이와 같이 불어나기는 처음으로 반석盤石이 다 잠기고 그 위의 절벽은 다만 몇 길밖에 남지 않았다.

또 비가 하루 밤낮을 내렸다.

○ <통감절요>를 보았다.

十八日 癸酉 江又大至, 丙子之後始有此水, 盤石盡沒而石上不止數丈矣. 又雨終日終夜. ○ 看史.


7월 21일 병자

통감절요를 보았다.

二十一日丙子 看史.


7월 22일 정축

통감절요를 보았다.

二十二日 丁丑 看史.


7월 23일 무인

당사唐史 1권을 보았다.

二十三日 戊寅 看唐史一卷.


7월 27일 임오

나는 초정에 목욕하러 가지 못하고 염이 며느리를 데리고 갔다.

○ 병을 조리하는 여가에 당사를 보았다.

二十七日 壬午 余則不能往浴椒井, �率婦而往. ○ 調病之餘, 看唐史.


7월 28일 계미

통감절요를 보았다.

덕창德昌이 잠깐 들렀다.

二十八日 癸未 看史. 德昌暫過.


7월 29일 갑신

통감절요를 보았다.

오익훈吳益勳이 와서 공부하고 있다.

二十九日 甲申 看史. 吳生益[勳]來受學.


7월 30일 을유

통감절요를 보았다. 오병숙吳秉叔이 아우의 집에 왔으나 서로 만나 보지는 못하였다. 맹견孟堅이 보러 왔다.

三十日 乙酉 看史. 吳秉叔來弟家, 而不得相見. 孟堅來見.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37년(인조 15) 7월

병자호란 당시 공/과 처리.

청나라 사신 접대 경비 문제 대두


1638년(인조 16) 5월

군국(軍國) 기밀 문제, 납속 문제 대두

왕실의 곤궁함으로 인한 제사 문제

환향녀 문제 의논


1639년(인조 17) 7월

청나라 사신 접대, 조선 왕의 입조와 상마(上馬)요구

(사신 귀환 후)청과 관계를 끊는 것에 대한 논의

전국적 홍수피해



참고 :조선 전기의 역사학

조선시대의 역사서술은 건국이념인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 서술방식은 도덕적 평가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왕도정치 역시 반영되어 있었다. 조선 전기부터 이루어진 역사서술은 고대사와 전조인 고려사를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고대사를 정리한 책으로는 1403년(태종3) 권근(權近) 등이 편찬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가 대표적이다.


<동국사략>은 단군조선을 시발점으로 하여,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이부(二府), 삼한, 삼국 순으로 서술되었다. 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서술을 따랐으며, 각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당서(唐書)>를 따랐다. 서술 방식으로는 주된 줄거리 옆에 주석을 다는 강목법(綱目法)을 사용하였다. 한편, 춘추대의론적 사고에 따라 고대국가의 체제를 비판하였으며, 신화나 전설에 대해서도 황당한 이야기라 하여 삭제하는 방침을 택하였다.


<삼국사절요>는 1476년(성종7)에 노사신, 서거정 등이 편찬하였다. 동국사략과 달리 고대국가의 연호나 즉위년 칭원법 등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역사 기록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는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또한 신화나 전설에 대해서도 그대로 수록하였다.


고려사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로 정리되었다. 이미 태조대에 고려국사가 편찬되었으나 전하지는 않는다. 고려사는 1449년(세종31)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1451년(문종1)에 끝냈다. 본기, 열전, 지, 연표 등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기전체로 쓰였다. 고려시대의 실록 등 많은 자료를 기반으로 하였는데, 구할 수 있는 자료를 최대한 실으려 노력하였다. 인물 평도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시도하였다. 고려사절요는 김종서 등이 1452년(문종2)에 편찬하였다. 서술 방식은 편년체였으며 <고려사>와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역사서이다. 또한 주로 군주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내용이 강조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은 1485년(성종16)에 서거정 등이 고대사와 고려사를 합하여 통사 체계를 구현한 역사서이다. 중국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준하는 사서를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편년체로 서술되었으며, 단군조선부터 삼한까지는 외기(外紀)로, 삼국 건국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까지를 삼국기, 그 이후부터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신라기, 935년부터 고려 말까지를 고려기로 구분하였다. 연대 표기는 각국의 즉위년 칭원법을 사용하였고, 범례는 자치통감을 따랐다. 또한 382편의 사론이 실려 있는데, 204편을 새로 썼다. 주된 내용은 중국에 대한 사대명분과, 강상의 윤리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16세기에는 박상이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동국사략(東國史略)>으로 정리하였다. 권근이 쓴 것과 제목이 같아 종종 혼동된다. 유교적인 기준으로 인물들을 평가하였고, 고려 건국에 반대하고 충절을 지킨 인물들을 칭송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 초에 이미 편찬되었지만, 1530년(중종25)에는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으로 간행되었다. 이는 중앙집권화에 따른 지방에 대한 파악이 심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주는 지리지이다.

이처럼 양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역사서술은 주로 건국의 정당성을 찾고 성리학적 이념 및 왕도정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조동걸, 한영우, 박찬승 편, 2007,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창비, pp. 9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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