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아님
따로 나와 살아보면서 안정적인 주거가 얼마나 중요한 삶의 요소인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설령 남의 집을 빌려 살지라도 돈을 내는 동안만큼은 주거를 보장받고, 또한 내 공간을 남과 공유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권리인지, 부모님의 집에 살 때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물론 이건 부모님이 내 방문을 벌컥벌컥 열지 않아주신 덕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일기를 보다 보면 집과 관련된 기록들이 자주 눈에 띈다. 대대로 내려오는 집이라고 할지라도 증축이나 보수는 필요했다. 공사를 하는 동안에는 식구들이 모두 이집 저집 뿔뿔이 흩어져 지내기도 하고, 본가 외에 별당이 있으면 옮겨가 지내기도 했다. 또 18세기에는 돈으로 집을 사고 팔기도 하고, 돈을 내고 집을 빌리기도 한다. 현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양인들이야 자신의 집에 대해서는 소유권과 점유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는지 몰라도 노비들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인신이 예속되어 있으니, 그 자신에게 속한 부동산 역시도 주인이 마음대로 사용하곤 했다. 엄연히 집을 포함한 재산을 노비도 소유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김광계 등 양반들은 집에서 데리고 부리는 솔거노비와 밖에 집을 두고 있는 외거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외거노비는 따로 나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솔거노비에 비해 그 처지가 보다 나았을 것 같지만, 김광계를 비롯한 노비들의 주인들은 노비의 집을 필요할 때마다 마음대로 이용하였다.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나 전염병이 있을 때 노비의 집에 와서 자유롭게 몇날 며칠이고 머물렀을 뿐 아니라, 집에서 나와 외지로 갈 때도 날이 저물면 노비의 집에서 잠을 자곤 했다.
김광계가 노비의 집을 이용한 첫 기록은 25세이던 1606년 8월 7일이다. 김광계는 읍내로 과거를 보러 나갔는데, 읍내에서는 잘 집을 구할 수가 없어 처가의 노비 집에서 머물며 과거 날까지 준비를 해야 했다. 1607년 5월 19일에는 안동의 하회마을까지 조문을 하러 가야 했는데, 하루 만에 가지 못해서 결국 안동부 근처의 노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갔다. 다음해 10월 2일에는 집안에서 조용히 쉴 수가 없었는지 갑자기 종의 집에서 쉬면서 여러 지인들까지 불러들여 함께 잤다.
1615년 7월 3일에는 김광계의 셋째 동생이 학질에 걸렸는데, 이 때 종의 집으로 피접하러 갔다. 병 때문에 종의 집으로 가는 경우는 이후에도 발생한다. 김광계가 소유한 노비의 집은 사천과 현풍에도 있었는지, 같은 해 9월과 10월에 길을 나선 김광계는 중도에 노비의 집에서 묵어갔다. 그리고 거인(居仁)에 있는 김광계의 집안 묘소에는 그곳을 관리하는 노비의 집도 있었던 것 같다. 성묘를 가다가 토사곽란을 일으킨 김광계는 노비의 집에서 동생이 제사를 다 지내고 내려올 때까지 엎드려서 안정을 취하기도 하였다.
1616년은 예안 지역에 전염병이 심하게 돌았던 해였다. 김광계의 집안사람들은 조금만 아파도 전염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였다. 3월 26일에는 마침 김광계의 큰아이도 통증이 생겼다고 하여 아내 및 형제와 상의하여 오천(烏川)에 있는 여종의 집으로 피접을 보냈다. 아이를 보내고 사흘이 지난 29일, 김광계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새벽부터 모든 가족들을 모두 오천의 여종 집으로 피접시켰다. 여종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비가 왔는데, 진정시킬 수 없는 불안한 마음처럼 계속 비가 그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1635년에는 제천 지역에 전염병이 돌았다. 제천에 거주하던 친척 할머니가 종의 집으로 피접을 오셨기 때문에 김광계는 1월 30일에 들러서 인사를 드렸다. 제천 할머니는 무사히 전염병을 피했지만, 막상 김광계의 제수 권씨가 4월 11일에 세상을 떴다. 친족들이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모두 종의 집에 모였다.
김광계는 1643년 6월 21일에 오천 여종의 집에 갔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머물렀던 때로부터 벌써 27년이 흘러 있었다. 그 때 여종이 돌봐준 큰아이는 죽었고, 여종은 늙었다. 대신 양자로 얻은 김렴(金�)과, 조카 김선(金�)이 오천으로 왔다. 늙은 여종은 자신이 늙은 만큼 함께 늙은 김광계를 보살펴 주었다.
노비의 집을 마음대로 이용한 김광계의 일기에서는 졸지에 안방을 뺏긴 노비의 심사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멋대로 들어와서 집을 여관이나 전염병 피접 장소로 사용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길 가다가 잠시 하룻밤 묵어가는건 그렇다 쳐도, 전염병이 도는데 자신의 집을 전염병 걸린 사람을 보살피는 장소로 쓰다니. 또 전염병 걸린 사람이 집에 왔다고 자신이 피해 나갈 수 있는 것 조차도 아니다. 직장 상사가 열이 나고 기침을 하는 자신의 아이를 돌봐달라며 갑작스럽게 아이를 보내온다고 생각한다면...
<매원일기>
을사년(1605, 선조38)-김광계 25세
8월 7일
아침 일찍 밥을 먹은 뒤에 병연이 먼저 갔다. 조금 있다가 들으니, 내성 재종숙 및 대이 형이 촌집에 왔다고 하여 바로 가서 뵈었다. 이윽고 의정도 왔다. 내성 재종숙과 대이 형을 불러 처가에 와서 밥상을 차렸다. 남자기南子紀가 보러왔다. 밥을 먹은 뒤에 내성 재종숙과 대이 형과 함께 의흥義興에 갔다. 들으니, 읍내 사람들의 집은 드문데, 과거보러 온 사람들로 이미 꽉 찼다고 하여 바로 지경현地境峴 처가의 계집종 집에 거접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김구가 사람을 보내어 읍내에 집을 얻었으니 거접하러 와야만 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대이 형을 보내어 먼저 가서 살펴보게 하고 나는 내성 재종숙과 함께 잤다.
七日 早食後炳然先去. 已而聞奈城叔侍及大而兄來村家, 卽往拜之. 已而義精亦來. 仍邀奈城·大而來氷家, 設飯. 南子紀來見. 食後與奈城叔侍·大而兄, 同往義興. 聞邑內人家鮮少, 擧子已充滿矣, 乃接于地境峴氷家婢家. 日暮金坵送人來言, 邑內得家, 當來接云矣. 夕食後, 送大而兄, 先往觀之, 余與奈城叔侍同宿.
정미년(1607, 선조40)-김광계 27세
5월 19일
새벽에 길을 나서서 하회河回 류 상공柳相公 댁으로 조문하러 갔다. 김 사열金士悅 어른 및 이숙명李叔明이 빈소에 있었다. 또 류심柳襑 형 및 류원직柳元直을 만나보고 길에서 이광준李光俊 부자와 서신徐兟을 만났다. 안동부安東府로 가다가 중도에 날이 저물어 종 집에서 잤다.
十九日 曉發, 往吊柳相于河回. 金士悅丈及李叔明在喪側矣. 又見柳襑兄及柳[元]直, 途見李光俊父子·徐兟. 將往花府, 中途日暮, 宿于奴家.
무신년(1608, 선조41)-김광계 28세
10월 2일
종의 집에 가서 쉬었다. 여긍 형제가 보러왔다. 밤에 여긍·곽양형·이곤해가 와서 함께 잤다.
二日 往休于奴家. 汝兢兄弟來見. 夜汝兢·郭揚馨·李鯤海來同宿.
을묘년(1615, 광해7)-김광계 35세
7월 3일
(학질에 걸린)이도以道가 종 집으로 피접하였으나 역시 고통을 면하지는 못하였다.
三日. 以道出避于奴家, 亦不免苦痛.
9월 29일
아침에 류계화柳季華가 서울에서 백명伯明 집에 왔으므로 이도以道와 함께 가서 만나 보았다. 서울 소식을 잠깐 들었다. 만나본 사람들은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다시 중명仲明 집으로 와서 밥을 먹었다. 김덕유金德裕도 와서 덕유 형제 및 계화 등 여러 사람이 동행하였다. 사천沙川에 이르러 헤어졌는데, 나는 종 백송白松 집에 들어가 잤다.
저물어서 내리기 시작한 비가 밤새도록 그치지를 않았다.
二十九日. 朝柳季華, 自京來伯明家, 與以道往見之. 暫聞京中消息. 所見之人, 不可勝紀. 復來仲明家喫飯. 金德裕亦來到, 與德裕兄弟及季華諸人同行. 到沙川乃分散, 余則入宿白松奴家. 暮雨達夜不止.
10월 18일
새벽에 계화季華와 같이 길을 나서서 10여 리쯤 간 다음 계화는 한강 선생寒岡先生(鄭逑, 1543~1620)을 뵙겠다고 사수泗水로 가고, 나는 이도以道와 함께 곧장 현풍玄風으로 갔다. 신시申時(오후 3~5시)쯤에 현풍에 당도하여 종 집에 묵었다.
十八日. 曉與季華同發, 行十餘里, 季華擬拜寒岡先生, 往泗水, 余則以道直往玄風. 晡時到玄風, 寓奴家.
12월 29일
기운이 더욱 편치를 않아 뼈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밥을 먹은 뒤에 병을 무릅쓰고 이도以道와 함께 거인居仁 산소로 갔다. 도중에 기침이 멎지를 않았으며, 혹 먹은 것을 토해내기도 하였다. 거인에 당도하였더니 더욱 심해져 산소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종 집에 엎드려 누워 있다가 제사를 지낸 뒤에 이도와 함께 돌아왔다.
二十九日. 氣尤不平, 骨節疼痛. 食後力疾, 與以道往居仁. 途中咳漱不止, 或吐出所食之物. 到居仁轉劇, 不得上墓, 仆臥奴家, 過祭後與以道還.
병진년(1616, 광해8)-김광계 36세
3월 26일
(전염병 상황을)들으니, 큰아이가 할머니 곁에서 통증이 생겼다고 하여서 가슴이 두근거려 천남川南으로 갔다. 이도以道도 와 모였다. 큰아이를 오천烏川 여종 집으로 의논하여 보냈다.
저녁에 운암雲巖으로 돌아왔다.
二十六日. 聞長童在親傍作痛, 心慌往川南. 以道亦來會. 議送長童于烏川婢家. 夕還雲巖.
3월 29일
가속들을 이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할 수가 없어서 새벽에 여종 집으로 데리고 왔다. 도중에 비를 만났는데, 비가 종일 그치지를 않았다.
二十九日. 家屬不可仍留于此, 曉率來于婢家. 中路遇雨, 雨終日不止.
병인년(1626, 인조4)-김광계 46세
1월 9일
<혹문>을 익혔다. 권익겸權益謙이 잠깐 들렀다.
○ 이도以道가 밤에 주천酒泉에서 종집에 왔으므로 가서 만나 보고 서로 곡을 하였다.
○ 입춘立春이다.
九日. 溫習. 權益謙暫過. ○ 以道夜自酒泉來奴家, 往見相哭. ○ 立春.
1월 27일
금람琴攬 씨가 장차 윤정평尹正平 집에 장가가려고 하여 오늘 행장을 꾸리고 예장禮狀을 써서 종집에 나가 잤으므로 밥을 먹은 뒤에 가서 보았다. 동네 친지들이 많이 와 모였다가 밤이 되어서야 흩어졌다.
二十七日. 琴攬氏將委禽于尹正平家, 今日治行具, 寫禮狀, 出宿于奴家, 食後往觀之. 洞親多來會, 至夜乃散.
을해년(1635, 인조13)-김광계 55세
1월 30일 신사
김현金玹 일족 형과 김환金瑍 일족 아우가 보러왔다.
○ 제천 할머니가 병을 피하여 종의 집에 거처하기에 가서 뵈었다. 그 참에 자개를 만났는데, 억지로 술을 권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취하였다.
三十日 辛巳 金玹族兄·金瑍族弟來見. ○堤川族祖母避病, 寓于奴家, 往拜之. 仍見子開, 强勸以酒, 不覺至醉.
4월 11일 경인
제수씨 권씨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다. 마을이 매우 불안하니 걱정이다. 동네 친족들이 모두 종의 집에 모였다.
十一日 庚寅 弟婦權氏奄至不淑. 慟哭慟哭. 閭閻甚不安, 可悶. 洞親皆會奴家.
무인년(1638, 인조16)-김광계 58세
10월 15일 갑진
아침에 종의 집에서 홍 판관洪判官을 만나보고, 그길로 판관을 집으로 불러 밥을 차렸다.
밥을 먹은 뒤에 이건以健과 함께 금계金溪 능동陵洞으로 가서 누님을 만나보았다. 오늘이 바로 누님의 생일날이다. 과천果川 김효수金孝修가 이곳에 벌써 와 있기에 생질 류원경柳元慶과 함께 효수를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서 각자 가져온 술로 장수를 비는 술잔을 올리고, 등불을 돋우고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十五日 甲辰 朝見洪判官于奴家. 仍邀判官設飯. 食後與以健, 往金溪陵洞, 見姊氏. 是日乃姊氏生朝也. 金果川孝修已來于此, 與柳甥携孝修入內, 各持酒上壽, 張燈陪話. 夜深乃罷.
기묘년(1639, 인조17)-김광계 59세
1월 14일 임신
<상서>를 보았다. 넷째 아우가 영양英陽에서 왔다. 이건이 병으로 종의 집에 피접 와서 지내고 있기에 가서 만나보았다.
十四日 壬申 看書. 四弟自英陽來. 以健避病來寓奴家, 往見之.
계미년(1643, 인조21)-김광계 63세
6월 21일 계미
조카 방이 부포에 가고, 나는 오천烏川 늙은 계집종의 집으로 옮겨와 머물고 있다. 염�과 선�이 와서 보살펴 주었다.
二十一日 癸未 磅姪往浮浦, 余移寓烏川老婢家. �·�[來]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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