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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주인은 누구?

조선시대 승려의 셋방살이

by 소주인


산마다 있는 사찰이나 암자들은 등기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조계종이나 천태종 등은 법인인가? 갑자기 궁금해서 조계종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재)대한불교조계종 유지재단이라고 사업자등록도 되어 있다. 그럼 사찰들은 재단 소유로 처리되어 있을까? 등기부등본까지 떼 보긴 귀찮아서 일단 검색으로 때워보니 웬만한 사찰과 그 부지는 모두 종교재단 소유인것 같다.



그런데 김광계의 일기를 보다 보면 운암사(雲巖寺)를 보수하고 유지하는 일을 김광계의 집안에서 도맡아 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그런데 이 운암사가 어디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남아 있는 운암사는 두 군데로 경남 의령군, 경북 문경시에 소재하는데, 두 곳 모두 김광계가 거주하던 예안에서는 너무 멀다. 아마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에 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광계와 그 형제들은 평소 운암사(雲巖寺)에 자주 거처하며 공부를 하거나, 몸이 좋지 않은 경우 정양을 하였다. 운암사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자주 오갈 수 있을 만큼 지척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광계는 운암사 관리에 꽤 신경을 썼는데, 이곳을 최대한 비워두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이곳이 김광계의 소유였는지도 알 수 없고, 또한 김광계가 어떠한 자격으로 관리를 하고 있었는지 그의 일기를 통해서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운암사에 거처하고자 하는 승려는 김광계의 허락을 구하였던 것으로 보아 김광계가 꽤나 확실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또 운암사의 승려들은 김광계의 집안에서 시키는 잡다한 일들을 마치 노비처럼 해 주곤 했다.



1638년 9월 2일, 운암사 인근을 다니며 단풍을 구경하던 김광계에게 운암사에 거처하던 승려가 와서, 절의 우물이 말라서 더 이상 거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김광계는 서운한 마음도 들고, 절을 비워두게 되는 것이 못내 찜찜했다. 결국 이틀 후, 운암사의 모든 승려가 절을 떠나버렸다.


빈 건물은 금방 여기저기가 망가지기 마련이다. 두 달 후인 11월 13일, 김광계는 조카 김방(金磅)을 데리고 가서 그간 운암사의 깨지고 헐린 부분을 보수하였다. 다행히 영윤(靈允)이라고 하는 승려가 와서 거처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보수가 끝나고 종일 운암사에 앉아 영윤을 기다렸으나 오기로 한 사람은 오지를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달빛에 길을 비추어가며 집으로 돌아왔다. 영윤은 이틀 뒤에서야 김광계의 집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어갔다.


1년이 지난 1639년 11월 3일에는 태엄(泰嚴)이라는 승려가 운암사에 거주하기를 청하였다. 김광계는 태엄을 집에서 하루 묵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들 김렴(金嚴)에게 태엄을 운암사로 안내하고 안팎을 청소하도록 하였다. 그 뒤에도 1641년에 운암사에 거주하는 승려의 중개가 있었는지 석륜(釋倫)이라는 승려가 운암사에 거주하고자 찾아왔으며, 다음 해에는 태암(泰巖)이란 승려가 찾아와 살려고 하여 다시금 동생 김광실(金光實)과 아들, 조카들을 대동하고 운암사를 청소하였다. 청소는 번거로운 일이지만 어쨌든 운암사가 비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무튼, 김광계의 집안이 어쩌다가 운암사를 관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소유자는 누구였는지, 또 김광계는 불사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어째서 운암사를 유지하려 하였는지 여러 가지가 궁금하다. 하지만 김광계의 일기 쓰는 스타일로는 전혀 세부적인 정보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하다. 일기 좀 성실하게 써라...




<매원일기>


무인년(1638, 인조16)-김광계 58세


9월 2일 신유

이직以直과 금씨 아재와 함께 운암雲巖을 가서 유람하였는데, 붉은 산과 푸른 강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만 거주하고 있는 중이 너무 심한 가뭄으로 우물이 말라버려서 오래 머물 계획을 세울 수 없다하니 너무 안타깝다.

二日 辛酉 與以直·琴叔往遊雲巖, 山紅水碧, 眞佳節也. 第居僧以旱氣太甚, 泉井枯渴, 不爲久留之計, 極可悶也.


9월 4일 계해

우필대禹必大가 보러 왔다. 운암사의 중이 물이 없는 것을 핑계로 다 떠나버려 절이 비었으니 한탄스럽다.

사간 재종숙이 앓고 있어 가서 문병하였다. 요즈음 병세가 상당히 위중하여서 음식을 들지 못하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으니 몹시 우려스럽다.

류경지柳敬之를 잠깐 만나보고, 돌아올 때 길에서 이실而實을 만났다.

四日 癸亥 禹必大來見. 雲巖寺僧以無水爲辭, 皆出去, 空寺可嘆. 往候司諫叔侍病. 邇來病勢頗重, 不進食飮, 夜不得眠, 極可憂慮. 蹔見柳敬之. 來時路逢而實.


11월 13일 신미

방磅과 함께 운암사雲巖寺에 가서 깨지고 헐린 곳을 보수하였는데, 중 영윤靈允이 와서 거처하려고 해서이다. 종일 영윤을 기다렸으나 오지를 않으니 몹시 괴이하다. 밤에 달빛을 타고 돌아왔다.

十三日 辛未 與磅往雲巖寺, 修治破毁之處, 以道僧靈允欲來居故也. 終日待之而不來, 甚可恠也. 夜乘月還.


11월 15일 계유

서숙이 보러 왔다. 중 영윤靈允이 와서 잤다.

十五日 癸酉 庶叔來見. 山人靈允來宿.



기축년(1639, 인조17)-김광계 59세


11월 3일 병진

맹견이 보러 왔다. 어제 염이 온계로 갔는데, 장차 각화사覺華寺로 가서 �선원록璿源錄�을 베끼려고 하였으나 길가는 중에 이미 글씨 쓰는 일을 끝냈음을 듣고 되돌아왔다.

중 태엄泰嚴이 와서 잤다. 운암사雲巖寺에 머물고 싶어 하였다.

三日 丙辰 孟堅來見. �昨往溫溪, 將向覺華寺, 擬寫璿源錄, 中路聞書役已畢還來. 僧泰嚴來宿, 欲寓雲巖云.


11월 4일 정사

바람이 불기도 하고 눈보라가 치기도 하였다. 염을 시켜 중 태엄과 함께 운암사를 소제하게 하였다.

四日 丁巳 風雪交飛. 使�與嚴僧, 掃除雲巖.



신사년(1641, 인조19)-김광계 61세


1월 18일 갑오

서숙庶叔이 보러 왔다. 운암사雲巖寺과 태암사泰巖寺의 중이 보러 왔다. 또 중 석륜釋倫이라는 자가 왔는데, 운암사에 들어가 머물려고 하였다.

十八日 甲午 庶叔來見. 雲巖·泰巖僧來見. 又僧釋倫者來, 欲入定雲巖也.



임오년(1642, 인조20)-김광계 62세


7월 8일 병자

중 태암泰巖이라는 자가 다시 운암사雲巖寺로 와 살고 싶다기에 이건以健 및 아이들과 함께 운암사로 가서 띠를 베어내고 풀을 뽑고 청소를 하였다. 중들도 갔다. 도산서원 유사 권선춘權旋春이 이영환李榮煥과 함께 보러 왔다.

八日 丙子 僧泰巖者欲復來居雲巖, 與以健及兒輩往雲巖, 修掃誅[茅]去草, 僧輩亦往. 陶山有司權旋春與李榮煥來見.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38년(인조 16) 9월~11월

잦은 기상이변(우박, 천둥번개, 유성 등)

청의 조병(助兵)요청으로 임경업 등이 봉황성에 진군

가례도감 설치(중전 책봉)-전후 곤궁함으로 인해 의례의 많은 부분 간략화

병자호란시 김상헌의 행동에 대한 논박

최명길 심양 파견


1639년(인조 17) 11월

잦은 기상이변(유성)

청나라 칙사 대접, 칙사의 속은(贖銀) 및 세공미, 원병 5천명 요구. 삼전도비의 전면에 몽고문, 후면에 한문을 새길것 요구


1641년(인조 19) 1월

청나라로부터 도망온 조선인 포로들을 다시 잡아 보냄

인평대군이 심양에서 돌아옴

김상헌, 조한영, 채이항 등 심양으로 압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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