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여성들은 아이를 낳고 또 낳고 하면서 가임기를 힘겹게 보내야 했다. 자식이 많은 것을 다복하다고들 하는데, 과연 아이를 낳는 여성들에게도 복된 일이었을지는 모르겠다. 여기에서 더 박복하면 출산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기도 했다. 젖먹이 자식을 여럿 길러야 하기 때문에 젖이 부족하거나, 혹은 젖이 나오지 않거나, 혹은 사망했기에 젖을 줄 수가 없거나 하는 여러 상황들 때문에 유모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유모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왕의 유모인 봉보부인도, 양반가의 유모도 모두 천민이었다. 왕도 노비의 젖을 먹고 자란 셈이다. 천민 여성들 중 그나마 가장 우대받은 것이 유모였을 것이다. 아무리 비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젖을 먹여준 사람을 함부로 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록 살아서 봉보부인이 된 사례는 별로 없다고는 하지만, 일단 살아 있으면 종1품인 봉보부인이라 책봉받고 그 가족이 모두 면천되었다. 미치광이로 유명한 연산군은 자신의 유모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어 빈축을 사기도 했다.
1638년, 김광계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가 8살이 되었을 때, 김광계의 할머니가 한 여종에게 명하여 양육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유모를 가지기에는 다소 나이가 많은 때였지만 김광계는 유모에게 상당히 정을 붙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유모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언제나 온화하고 자애롭게 모두를 대하였으며, 일을 함에 있어서도 부지런하고, 누구나 꺼리는 일에 먼저 나섰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윗사람을 섬겼으며, 김광계와 그 형제들을 아껴 주었다. 유모는 비록 여종이었지만 소학(小學)에서 말한 참된 어진 행동과 같이 늘 행동하였다. 그래서 김광계는 그와 일생을 같이 한 60여 년 동안 유모를 존중하고 사랑하였다.
그 유모도 1638년에는 87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김광계는 아흔이 다 된 유모가 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걱정하였다. 병을 앓으면서도 유모는 1년 넘게 더 생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639년 여름에는 유모가 이질에 걸렸다. 노인인데다가 계속해서 병을 앓고 있던 와중이라 더욱 병세가 위중하였다. 유모는 날로 초췌해지고 숨이 끊어질 듯 해 김광계는 더욱 애간장이 탔다.
9월 7일 저녁, 집 밖에 있던 김광계는 유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집으로 달려왔다. 이미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유모는 김광계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결국 이 날 숨이 끊어졌다. 88세였다. 김광계는 유모의 덕성을 다시금 헤아리며, 갑자기 유모를 잃은 것을 슬퍼하며 어린아이처럼 통곡하였다. 길러준 은혜가 있을 뿐 아니라 유모가 한 인간으로서도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슬픔이 더욱 컸던 것이다.
김광계는 다음 날 직접 유모의 초상을 치르는 일을 감독하고, 9월 9일에 양지바른 언덕에 유모를 묻었다. 김광계를 위로하기 위해 아우들과 조카들이 찾아왔지만, 다음날까지 김광계는 문을 닫아걸고 유모를 애도하였다.
<매원일기>
무인년(1638, 인조16)-김광계 58세
5월 4일 병인
집에 있으면서 치재하였다.
유모가 갑인년(1554)에 태어났으니 나이가 아흔 살에 가까운데, 병세가 몹시 위중하여 아주 걱정스럽다.
四日 丙寅 在家致齋. 乳母甲寅生也, 年近九十, 病勢甚重, 極可憐悶.
기묘년(1639, 인조17)-김광계 59세
9월 5일 기미
유모가 이질을 얻은 지 벌써 몇 달이어서 날로 더 초췌해지고 숨이 끊어질 듯하니, 근심됨을 말할 수가 없다. 오후에 말을 타고 교외로 나아가니 긴 강은 맑고 깨끗하며 단풍잎은 정말로 붉었다. 그길로 강을 건너 정지서당定止書堂에 가서 이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저물어 나의 강사로 와서 잤다.
五日 己未 乳母得痢疾已數月, 日漸澌瘁, 氣息奄奄, 憂悶不可言. 午後騎馬出郊外, 長江澄澈, 楓葉政紅. 仍渡水往定止書堂, 見而實打話. 日暮來吾江舍宿.
9월 7일 신유
이건以健ㆍ이도以道와 조카 선�ㆍ오익훈吳益勳ㆍ우필대禹必大가 보러 왔다. 금삼달琴三達도 잠깐 왔다.
날이 저물었을 때 유모의 병세가 더욱 위중하다는 것을 듣고 매우 급하게 달려왔으나 이미 말을 하지 못하였고 초경에 숨이 끊어졌다.
이 여종은 내가 태어나 여덟 달이 되었을 때, 조모께서 젖을 먹여 키우도록 명하셔서 집안에서 60여 년을 살았다.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함이 없었고 온화하고 자애로웠으며 부지런하고 굳세었다. 마음을 다하여 윗사람을 섬기고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가엽게 여겼으며, 굳은 일을 몸소 행하되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니, 거의 소학小學에서 말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잃었으니 다만 나를 길러준 은혜에 그칠 뿐만이 아닌 것이다. 통곡하고 통곡하였다.
七日 辛酉 以健·以道·�姪·吳益勳·禹必大來見. 琴三達亦暫來. 日暮聞乳母病勢益重, 急急馳來, 已不能言. 初更氣絶. 右婢吾生八箇月, 祖母命使乳養, 在家中六十年. 無怨惡於人, 溫良慈惠, 辛勤堅固. 盡忠事上, 至誠惻怛, 親執鄙事, 晝夜不輟, 庶幾小學所云, 而遽爾失之, 非但爲鞠養之恩而已, 慟哭慟哭.
9월 8일 임술
초상 치르는 일을 살펴보았다.
八日 壬戌 治喪事.
9월 9일 계해
새벽에 관을 끌어내어 오야지촌五野只村의 남향한 언덕에 장사를 치렀다. 한 낮에 집으로 돌아왔다. 두 아우와 조카, 아이들이 보러 왔다.
九日 癸亥 曉頭引柩埋葬于五野只村南向之原. 日午還家. 兩弟及姪兒輩來見.
9월 10일 갑자
슬피 통곡한 나머지 기운이 몹시 불편하여 문을 닫아걸고 조용히 조리하였다. 염이 인주仁州(인동仁同)에서 돌아왔다.
十日 甲子 哭泣之餘, 氣甚不平, 杜門靜養. �自仁州還.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39년(인조 17) 9월
궁궐 안에서 왕을 저주한 사건 발생
창덕궁으로 이어
청 사신 접대
참고 : 양반가의 아이를 키우는 유모
유모(乳母)는 노비 중 한 부류이다. 양반의 집안에 돌봄이 필요한 아이가 있을 경우, 아이를 양육하는 전담자를 노비 중에서 연령, 건강, 성격 등을 고려하여 선발하였다. 1자녀 1유모 혹은 2자녀 1유모가 배정되었는데, 젖을 주고 돌보는 일을 전담하게 하기 위해 가사노동 전반을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 젖을 물리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고 수유기에 있는 여성이 유모로 우선 대상자가 되었는데, 자신의 아이에 우선하여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양반가의 아이에게 젖을 주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모로 선정될 경우 유모 자신과 그 가족에게는 상당한 손해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아이가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할 경우 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의 집안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자신이 돌본 아이가 장성하였을 때도 일정 정도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장성한 아이가 혼인 및 분가, 직업상의 이유 등으로 거주지를 옮길 경우에도 따라가 평생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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