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부인은 빌려주는게 아니라는 찜찜한 옛말이 있다. 이 말의 정치적 올바름은 차치하고서, 어쨌든 책은 빌려주면 다시 돌려받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소장인을 책에 찍어댔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서 마음에 들면 서점에서 구매하면 된다. 절판된 책이라면 필요한 부분을 복사하거나 혹은 헌책방을 뒤지는 방법이 있다. 대량생산의 시대에 똑같은 책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전근대에는 사정이 달랐다. 민간에서 인쇄를 했다느니, 뭐 미군인지 프랑스군인지 약탈하러 와서 조선은 집집마다 책이 없는 집이 없다고 했다느니 하면서(털리는 주제에) 국뽕을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책은 지금같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책의 내용을 가장 직관적으로 복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필사이다. 물론 쉬운 방법은 아니다. 석사과정 때 벌받느라고 박영효의 건백서를 손을 써 본일이 있는데 한낱 상소문이라 할지라도 결코 베끼는 시간이 짧지 않았다. 하다못해 책이라면? 그것도 책의 꼴을 갖추게 하려면 꽤 정서를 해야 할텐데?
1643년 2월, 아직 추운 날이었다. 김광계는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 이영운(李榮運)의 서얼 형제인 이영엽(李榮曄)에게 빌려온 <명흥잡기(明興雜記)>를 필사한 것에 틀린 부분이 없는지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명흥잡기는 명나라의 문인 진경칙(陳敬則)이 찬한 책이다. 평소 김광계는 이영엽을 종종 불러 문서를 필사하게 시키고는 했다. 당시에는 책이 귀했기 때문에 서로 책을 빌려보고 베끼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에도 이영엽에게 가진 책을 필사해 달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원본과 비교하는 작업을 김광계가 손수 한 것이었다. 교정은 2월 11일부터 꼬박 나흘이 걸려 2월 15일에서야 끝났다.
책을 복사하고 싶다면 이처럼 남의 손을 빌려서 복사하면 된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을 것이다. 18세기가 되면 조선에서도 전문적으로 책의 유통을 담당하는 부류가 성행하였다. 서적을 들고 다니며 판매하는 책쾌(冊儈, 혹은 서쾌書儈), 상설 점포를 차려놓고 책을 파매하는 쾌가(儈家), 그리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貰冊家)가 그것이다. 세책은 쾌가에서도 이루어졌다.
책은 목판과 금속활자로 인쇄되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필사 역시 책을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쾌가에서는 책의 판매와 대여 뿐 아니라 필사도 담당하였다. 수천 종의 책을 깨끗이 베껴 쓰고, 이것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적의 유통경로와 시장의 동향에 밝아야 했기 때문에 일종의 편집자나 MD와도 같은 역량이 쾌가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매원일기>
계미년(1643, 인조21)-김광계 63세
2월 11일 을해
상서를 외웠다. 명흥잡기明興雜記 베낀 것을 교정하였다.
十一日 乙亥 誦書. 校書.
2월 12일 병자
상서를 외웠다. 명흥잡기를 교정하였다.
十二日 丙子 誦書. 校書.
2월 13일 정축
명흥잡기를 교정하였다.
十三日 丁丑 校書.
2월 14일 무인
상서를 외웠다. 명흥잡기를 교정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강재로 옮겨가 머무른다.
十四日 戊寅 誦書. 校書. 日暮移寓江齋.
2월 15일 기묘
교정을 마쳤다. 교정한 것은 곧 명흥잡기로 이영엽李榮曄에게 빌린 책이다. 이날 온종일 비가 내렸다.
十五日 己卯 校書畢. 所校者乃明興雜記, 借書於李榮曄者也. 是日雨終日.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43년(인조 21) 2월
용골대가 압송된 조선 신료들을 심문
재정난으로 관료의 봉급을 콩으로 지급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7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