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곳이라고 하니 청렴하고 가난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서원과 향교는 실상 재물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시절마다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려면 제수용품과 여러 가지 기물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내가 도둑이라면 당연히 서원이나 향교를 털 것이다. 빈한한 농가는 털어봤자 눈물만 나올 것이고, 지주네 집은 잃을게 많으니 서슬퍼렇게 지키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서원과 향교는 노비나 원임들이 지키고 있다 한들, 실상 자기 것이 아닌 재물을 열심히 지키고 섰을 턱이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사정 때문에 서원이며 향교는 심심찮게 털리곤 했던 것 같다. 1636년에는 예안 향교도 털렸었다. 향교 대성전에서 쓰던 향로(香爐) 5개, 향합(香盒) 4개, 촛대 1개를 도둑맞은 것이다. 조선시대 향교의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유학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 놓는 성스럽고 경건한 장소였다. 제사를 드릴 때 쓰는 제기도 귀한 유기(鍮器, 놋그릇)를 썼는데, 도둑은 아마 유기의 금전적 가치를 노리고 훔쳤을 것이다. 김광계에게 이 소식을 전한 김환은 당시 예안 향교의 상재(上齋)로 향교를 책임지는 위치였다. 두 사람은 다음날 향교에 들러 사건 현장을 확인하고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뾰족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크게 속상했는지 김광계는 술까지 마셨다.
김광계의 재종숙 김령도 이 사건을 심각하게 여겨, 예안 향교에서 대성전 유기를 도둑맞았다는 소문이 인근 고을에까지 퍼져 논란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일기에 썼다. 심지어 엄중히 관리해야 할 향교 대성전의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예안 지역의 선비들을 정거(停擧), 즉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벌에 처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전쟁이 일어나면서 정거 이야기는 흐지부지되었고 향교 절도사건도 그렇게 잊혀졌다.
그로부터 7년 뒤, 김광계가 원장을 맡고 있는 중에 역동서원도 털린 적이 있었다. 조카딸이 찾아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갑자기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유사 박형(朴炯)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역동서원에 도둑이 들어 창고를 쓸어갔다는 것이다. 평소 창고 물품관리가 잘 되고 있었는지, 박형은 무엇이 없어졌는지 정확히 파악도 해 왔다. 도둑이 훔쳐간 것은 목면포(木綿布) 1동(同)과 쌀ㆍ콩ㆍ잡물 등이었다. 역동서원에는 역동선생만 모신 줄로 알았더니, 도선생도 모시게 된 꼴이었다.
도둑을 잡을 수 없다 여겼는지, 김광계는 관아에 고하지도 않고 이 일을 그냥 덮어버렸다. 아마 그 뒤로 며칠간 감기에 걸려서 만사가 귀찮아졌는지도 모른다. 또 목격자도 없는데 무슨 수로 잡겠는가.
병자년(1636, 인조 14)-김광계 56세
6월 11일 갑신
덕온德昷이 와서 향교의 유기鍮器를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十一日. 甲申. 德昷來, 鄕校鍮器見失云.
6월 12일 을유
아침에 지나는 길에 향교에서 덕온 및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그길로 덕온과 함께 동행하여 덕온은 계상溪上으로 가고 나는 도산서원으로 들어왔다. 오후에 덕온이 계상에서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갔는데, 덕온과 함께 억지로 화주를 몇 잔 마셨더니 토하고 속이 쓰려 몹시 고통스럽다. 경계할 만하다.
十二日. 乙酉. 朝歷見德昷及諸人于校中, 仍與德昷同行, 德昷往溪上, 余入陶院. 午後德昷自溪還, 談話移時, 乃去, 與德昷, 强飮火酒數盃, 嘔吐煩熱困憊. 可戒.
<계암일록>
김령(김광계의 재종숙) 60세
6월 11일
○ 지난밤에 향교 대성전大聖殿에 있는 향로香爐 5개, 향합香盒 4개, 촛대 1개를 도둑이 훔쳐갔는데, 듣고 보니 크게 놀라웠다. 이 변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더욱 염려가 된다. 오후에 상사 김덕온金德溫이 들렀는데, 향교의 변고에 대해 언급하였다.
6월 23일
맑음. 밥을 먹은 뒤에 이실而實이 왔는데, 향교에 있었던 절도 변고의 일이 자못 다른 고을의 논란거리가 되었다고 하니, 염려스럽다. 대개 덕온德溫 무리가 당초 정상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 편의적으로 일을 행하고자 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어찌 이처럼 해서야 되겠는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 심하다.
6월 29일
오시에 김초 삼형제가 들렀다. 용궁의 시험 장소로 향하였다.
○ 좌수 신효남申孝男과 손종백孫宗伯이 예안 현감에게 향교의 변고를 말하면서, 이웃 고을 선비들의 논의라 핑계하며 장황하게 겁을 주어 동요시켰다. 그러자 예안 현감이 크게 두려워하여 급히 향교의 고지기를 가두었다. 대개 신효남이 자신의 사위를 예안의 도목都目에 올리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겨 이렇게 한 것이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분해하였다.
7월 7일
오시에 의현義賢이 용궁에서 돌아와 아이들의 편지를 보았다. 녹명관은 웅천熊川 수령 박사성朴思誠이었다. 안동과 예천 두 고을은 합쳐서 정거停擧해야 한다는 설이 매우 분분하였고, 예안도 그 속에 포함되었는데, 향교에서 발생한 절도사건 때문이었다. 비록 그러하지만, 일이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계미년(1643, 인조21)-김광계 63세
1월 26일 신유
조카딸 권權이 도촌道村에서 왔다가 갔다.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유사 박형朴炯이 와서 역동서원에 도둑이 들어 창고에 들어가 목면포木綿布 1동同과 쌀ㆍ콩ㆍ잡물 등을 훔쳐 갔다고 말하였다.
二十六日 辛酉 權姪女自道村來往之. 易東有司朴炯來, 言易東有盜, [入]庫中偸取木綿布一同及米豆雜物而去云.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36년(인조 21)
금나라(청)에 격문을 보내다
재정 곤궁으로 인하여 관료 수를 줄이고 녹봉을 줄이자는 논의 발생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7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