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손수 부인의 장례를 치르다

평생을 함께한 부인의 죽음, 조선시대 종부의 죽음

by 소주인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는 것이 고정관념으로 박혀 있어서 그런지, 부인의 사후 상황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물론 양반 남성이 부인 사후에 정조를 지키면서 수절해야겠다고 결심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양반 부인의 장례는 그 남편의 지위에 걸맞는 예우를 받으며 치러졌다. 특히 조선후기에 (생각보다) 권위를 얻게 된 종부의 장례는 집안의 큰 일이었다. 현대에도 종가에서 종부 장례를 치를 때에는 인근 화원의 꽃이 동이 난다고 한다.


김광계는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고, 부인 외에 다른 여성에게서도 자녀를 얻지 않(못?)았으며 공식적으로 첩도 두지 않았다. 조선시대 여성의 일반적인 사인 중 하나는 바로 출산이었다. 출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김광계의 부인은 요절하지 않고 김광계와 함께 잘 늙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자손을 얻을 필요도, 자손을 낳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김광계는 부인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재취를 하지는 않았다. 부인이 사망하고 2년 뒤 김광계도 세상을 떠났다.


지난 해 봄에도 심하게 앓았던 김광계의 부인은 1644년 8월, 다시 몸져누웠다. 여름도 다 간 때였는데 이질에 걸린 것이다. 뱃속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하고 좀처럼 식사도 하지를 못했다. 이 때 아들 김렴이 서울에 갈 볼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광계는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을 잘 돌보아달라고 하는 등 아내 몫까지 아들의 채비를 도와야 했다. 8월 10일, 아들이 드디어 길을 떠났고, 김광계는 신경 쓸 일이 끝나 한숨 돌리려고 하는 차에 다시금 부인의 병이 악화되었다.


김광계는 종에게 김렴을 쫓아가 돌아오라고 전하게 하였다.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다 싶었는지 부인의 병세를 꼼꼼히 기록하여 두었는데, 또 다른 종에게 이것을 들려 용궁에 사는 이찬(李燦)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찬은 젊어서부터 병약하여 스스로를 고치기 위해 독학으로 의술을 공부했는데, 이것이 꽤나 훌륭하여 어의도 고치지 못한 인조의 병을 고친 것으로 유명해졌다. 김광계의 부인이 아픈 이때에는 마침 사직하고 용궁(龍宮)에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김광계의 집안과 혼맥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김광계는 종종 이찬에게 의학적 자문을 구하고는 하였다.


종이 돌아올 때까지 김광계는 걱정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이틀을 보냈는데, 걱정이 심해서 그런지 본인 스스로도 몸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종을 보낸지 이틀이 되던 날인 8월 13일 오후가 되어서야 종이 용궁에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처방전이 들려 있었다. 거기에는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과 신험작약산(神驗芍藥散)을 쓰라고 적혀 있었다. 인삼패독산은 감기 증상에 쓰는 약이며, 신험작약산은 부인이 냉증으로 옆구리가 아플 때 쓰는 약이었다.


당장 다음날 아우, 조카들과 함께 처방대로 인삼패독산 두 첩을 조제하였다. 하지만 부인이 약을 먹고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억지로 한 첩을 마시게 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더 손 쓸 도리가 없어서 온 집안사람들이 흐느끼며 장사를 치를 준비를 하며 날을 보냈다. 김광계는 다시금 종 둘을 서울로 보내 아들 김렴에게 돌아오라 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아들을 보지 못하고 김광계의 부인은 8월 18일 밤 이경(9시~11시)에 숨이 끊어졌다.


김광계는 부인의 죽음을 예감하고 부인이 죽기 하루 전부터 장례를 준비해 놓았다. 마침내 부인의 숨이 끊어지자 몸을 닦고 염습할 옷을 벌려 놓았다. 서서히 친척들도 모여들었다. 다음날에는 장인을 불러 부인의 관을 짰다. 그 다음날에는 그저 날짜만 일기에 적어놓았을 뿐, 아무런 내용을 적지 않았다. 둘 사이에 친 자식은 없었지만 수십 년간 함께 지내던 부부인만큼 그 상실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틀만에 관이 완성되어 8월 21일에는 부인를 관에 안치했다. 그리고 나서 빈소를 차리고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부인은 더 이상 이승에 속하지 않고 망자의 세상에 분리된 것이었다. 김광계는 부인을 보낼 준비를 마치자 그저 통곡할 따름이었다. 종부가 세상을 뜬 만큼 조문을 온 사람들은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온 동네에서, 그리고 먼 지역에서까지 조문객은 끊임없이 밀려와 곡을 하였다. 9월 1일에 아우, 조카들과 함께 영전에 전을 올릴 때에도 아직 서울에서 아들 김렴은 돌아오질 않았다.


문상객은 따로 기록하는 장부가 있었으나, 김광계는 자신의 일기에도 기억나는 대로 문상객들과 자신을 위로한 사람들을 적어놓았다. 8월 21일에는 워낙 치러야 할 의식도 많고, 찾아온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누가 왔는지 적어놓지는 않았다. 8월 22일에는 죽은 부인의 친정 조카인 이계휘(李繼輝)가 달려와서 곡을 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조카들 김려(金礪)와 김선(金�)이 왔으며, 함평 현감인 이이송(李爾松)이 조문하러 왔다. 24일에는 김광계의 재종질 김확(金確)의 사위인 성이염(成以恬)이 와서 조문하였다.


그 다음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들 김렴(金�)이 서울에서 돌아왔다. 농암 이현보의 현손들인 이영운(李榮運)과 이영엽(李榮曄), 이영전(李榮全)도 조문을 다녀갔다. 그 외에도 권중평(權重平)ㆍ금영성(琴永成)ㆍ윤욱(尹煜)ㆍ손심(孫襑)ㆍ황유장(黃有章) 등이 조문하였으며, 9월이 되어서도 조문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조문을 받는 와중에도 이제 슬슬 발인을 위해 장지를 알아보아야 했기 때문에 아들 김렴을 명암(鳴巖) 산소에 다녀오게 하였다.


김광계는 빈소에서 문상객을 한 달 가까이 맞았다. 슬퍼할 시간도 없이 치러야 할 의식 절차가 계속 이어졌고, 그 모든 절차를 위한 준비를 모두 다 신경 써야 했다. 그리고 이제 부인을 차가운 지하로 보내야 할 때가 다가왔다. 김광계는 아들 김렴(金�)에게 묏자리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묏자리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송에 얽히지 않기 위해서는 땅의 소유주를 확인해야 했고, 그 땅이 달리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야 했다. 그 뿐 아니라 그 자리가 풍수리지학적으로 좋은 자리인지를 알기 위해 지관을 동행해 직접 다녀 보아야 했다. 지관 한 명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풍수를 잘 아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기 때문에,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 묏자리를 선택하는 일이 더욱 지연되기도 했다.


김광계는 9월 13일에 이적(李適)형의 얼자 사위인 이영웅(李英雄)을 불러오게 하여 김렴과 명암에 함께 가서 묏자리를 보고 오게 하였다. 그러나 묏자리를 얻지는 못하였고, 9월 22일에 다시 김렴과 김광계의 조카 김방이 함께 돌아다니며 묏자리를 보러 다녔다. 하지만 이때에도 별 소득이 없었는지 9월 26일에 풍수를 잘 안다고 소문난 오여전(吳汝栴)이 다시 김렴과 함께 묏자리를 보러 갔다. 하지만 쓸 만한 자리를 비로소 얻은 것은 10월 6일이 되어서였다. 매형 박회무, 동생 김광실, 김광보와 함께 직접 거인에 가서 한 자리를 얻었고, 그날 밤 늦게 지례에 도착하여 동생 김광악과 합류하였다. 다음날 지례에서도 또 한 자리를 얻었다.


김광계는 매형 박회무가 얻은 묏자리에 직접 올라가 보았는데, 언덕 남쪽 기슭으로 가 보니 골짜기가 몹시 깊고 멀었기 때문에 썩 탐탁치는 않았다. 날씨도 추워지는 가운데 산 근처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온 몸에 한기가 들었다. 그래서 몸을 좀 조리하다가 10월 23일에 다시 이여웅(李如雄)과 점쟁이 권추경(權秋經)을 불러왔다. 다음날 김렴은 점쟁이 권추경과 함께 지례로 묏자리를 살피러 갔다. 또한 26일에는 거인으로 이여웅과 함께 묏자리를 보러 갔지만 여러 술사들이 모두 견해가 달라서 묏자리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김광계의 근심은 깊어만 갔다.


마침내 11월 12일에 발인을 하게 되었다. 김광계는 11월 10일에 발인을 위해 빈소를 옮겼는데, 아내를 묻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안타깝고 비통하여 좀처럼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발인 하루 전날, 친구들이 모두 전염병 때문에 발인에 참석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이 날 김광계와 동서지간인 곽경흥(郭慶興)의 집안에서 곽유한(郭惟翰)과 곽유령(郭惟寧)이 전염병과 현풍으로부터의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조문을 하러 왔기 때문에 적잖이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11월 11일에서 12일로 넘어가던 때, 빈소를 파하고 오전 일찍 상여를 출발하여 해가 저물어서야 묏자리로 선정한 거인에 이르러 다시 빈소를 차렸다. 다음날 곽씨 형제까지 모두 돌아간 뒤, 김광계는 조카 김초, 김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일을 일단락 짓고 나니 온 몸의 원기가 모두 쑥 빠진 듯 하였다. 결국 며칠간 김광계는 문을 닫아걸고 몸조리를 하기 위해 종일 누워 있었다. 64세의 김광계에게는 이 모든 일이 심신에 부담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11월 21일, 김광계는 동생 김광보, 조카 김방과 함께 거인(居仁)에 마련한 산소에 8월 18일 밤에 사망한 아내를 매장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며칠 전 시신을 모셔 와 재사에 빈소로 마련해 놓은 터였다. 김광계는 집과 거인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다음날에는 묘자리를 파기 위해 산신·토지신에게 알리는 개토제를 지내고, 무덤을 팔 때 구덩이를 똑바로 파기 위한 기구인 금정기(金井機)를 설치하였다. 여러 사람이 묏자리를 확인하고, 금정기를 바로 놓았다.


엿새 후, 11월 28일에 김광계는 장례를 치르러 다시 거인으로 갔다. 마침 날씨도 아주 온화하여 마치 부인이 도와주는 것 같았다. 처조카 이계휘(李繼輝)를 포함하여 온 집안사람들이 산역을 살펴보고, 전석(磚石)을 광중(壙中)에 깔았다. 다음날에도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장례 준비를 거들었다.


11월 30일. 오전 일찍 발인을 하고, 비로소 하관하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며 곡하였다[反哭]. 집으로 돌아와서는 삼우제 중 첫 번째인 초우제(初虞祭)를 지냈다. 세 달에 걸친 장례도 이제 일단락 된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재우제 및 졸곡제 등 여러 차례 제사를 거행해야 할 테지만 이제 몸이 약한 김광계가 집 밖을 동분서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2월 16일, 더 이상 곡하지 않겠다고 고하는 졸곡제를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부인의 생일이 돌아왔다. 김광계는 아내를 위해 술, 과일, 떡, 국수 등 아내가 좋아할만한 여러 음식들을 궤연에 올렸다. 더 이상 곡할 수는 없었으나 애통한 마음은 여전하여 견디기가 어려웠다.



장례 일기는 재미있는 일기는 아니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절차 기록이다. 하지만 장례 기록에서만큼은 비통한 감정이 대목마다 드러난다. 노구를 이끌고 부인의 장례를 치르는 김광계의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아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일기에서 일일이 쓰지는 않았으나 젊은날 혼례를 올리고 한평생을 함께 한 반려이다. 부인이 아파서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다는 일기며, 부인의 생일제사를 손수 감독하면서 다시금 애통해하고, 또 아내의 첫 기제사를 지내면서 끝없는 슬픈 마음을 토로하는 일기는 아내에 대한 김광계의 감정을 잘 보여준다.




<매원일기>


갑신년(1644, 인조22)-김광계 64세


8월 6일 신유

예안 현감 김광우金光宇가 서원에 오는 것 때문에 집사 김광술 등 예닐곱 사람이 왔다. 밥을 먹은 뒤에 예안 현감이 와서 사당에 참배한 뒤에 만나서 아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안 현감이 역동서원으로 가고, 원장도 갔다. 저물녘에 이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올 때 애일당에 들렀다. 회길會吉ㆍ인길仁吉ㆍ이성승李誠承 등과 서얼 네다섯 사람이 보러 왔다. 집에 당도하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 집사람이 어제부터 이질을 심하게 앓고, 뱃속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니 아주 걱정이다.

六日 辛酉 以土主金光宇來院, 執事金光述等六七人來. 食後土主乃來, 謁廟後相見, 做話甚穩. 土主往易院, 院長亦往. 向暮與而實還. 歷入愛日堂, 會吉仁吉李誠承輩庶孽四五人來見. 到家日已暮矣. ○ 家人自昨重患痢[証], 腹中刺痛, 全廢食飮, 憂悶憂悶.


8월 7일 임술

아내의 병이 더욱 심하여졌다. 금씨 아재가 보러 왔다. 수재秀才 권익훈權益勳이 저물 무렵에 와서 잤다.

○ 어제 저물녘부터 비가 내렸다.

七日 壬戌 妻病益甚. 琴叔來見. 權秀才益勳乘暮來宿. ○ 自昨暮雨.


8월 10일 을축

렴이 서울 길을 나섰다.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 <시전>을 외웠다.

十日 乙丑 �發京行. 作京中親舊書. ○ 誦詩.


8월 11일 병인

<상서>를 외웠다. 아내의 병이 더욱 심하여서 종을 보내 아이 렴을 뒤쫓아 가서 돌아오게 하고, 또 증상을 기록한 것을 갖추어 이 금산李金山(이찬李燦)에게 약을 처방받게 하였다. 이직이 재산에서 왔다.

十一日 丙寅 誦書. 妻病愈甚, 送奴追躡�兒使還來. 又具証錄, 問于李金山. 以直自才山來.


8월 12일 정묘

아내 걱정으로 일과를 접었다. 또 기운이 몹시 불편하였다.

十二日 丁卯 以憂患輟課. 且氣甚不平.


8월 13일 무진

포시晡時에 종이 용성龍城에서 왔다.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과 신험작약산神驗芍藥散을 쓰라고 하였다.

十三日 戊辰 晡時奴自龍城來. 命人蔘敗毒散·神驗芍藥散.


8월 14일 기사

아침에 아우 및 조카와 함께 인삼패독산 두 첩을 조제하였으나 아픈 사람이 약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억지로 한 첩을 마시게 하였다.

十四日 己巳 朝與弟姪, 劑敗毒散二服, 而病人不肯飮藥, 强勸飮一服.


8월 15일 경오

약을 복용한 뒤에 병세가 더욱 심하여졌다.

十五日 庚午 服藥後病勢尤重.


8월 16일 신미

병세가 아주 위급한데도 살릴 방도가 전혀 없으니 온 집안이 근심으로 흐느끼며 날을 보내고 있다. 종 둘을 보내 급히 서울로 달려가서 아이 렴에게 알려 돌아오게 하였다.

十六日 辛未 症勢甚危劇, 萬無可救之道, 一家悶泣度日. 送二奴急走陪送往京, 告�兒使還.


8월 17일 임신

온 집안이 허둥지둥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다만 장사 치르는 일을 준비할 뿐이다.

十七日 壬申 一家遑[遑]罔知所措, 但治送終之事而已.


8월 18일 계유

밤 이경에 숨이 끊어졌다. 몸을 닦고 염습할 옷을 벌려 놓았다. 조카 초가 왔다.

十八日 癸酉 夜二更氣絶. 沐浴陳襲衣. 礎姪來.


8월 19일 갑술

장인을 불러 관을 짰다.

十九日 甲戌 召匠治棺.


8월 20일 을해

[二十日 乙亥]


8월 21일 병자

입관入棺을 하고, 성빈成殯을 하고, 성복成服을 하였다. 만사가 다 끝났으니, 통곡하고 통곡할 뿐이다. 조문하는 사람을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어 다른 책에 기록하여 두었다. 추분秋分 팔월중八月中이다.

二十一日 丙子 入棺, 成殯, [成服]. 萬事已矣, 痛哭痛哭. 吊客不可勝紀, 書在別冊. 秋分八月中.


8월 22일 정축

이계휘李繼輝가 달려와 곡을 하였다.

二十二日 丁丑 李繼輝奔哭.


8월 23일 무인

려礪와 선�이 왔다. 함평 현감 이이송李爾松이 조문하러 왔다.

二十三日 戊寅 礪�來. 李咸平尔松來吊.


8월 24일 기묘

성이염成以恬이 조문하러 왔다.

二十四日 己卯 成以恬來吊.


8월 25일 경진

밤에 렴이 왔다.

○ 회길과 이영엽李榮曄이 조문하러 왔다.

二十五日 庚辰 夜�來. ○ 晦吉李榮曄來吊.


8월 26일 신사

이영전李榮全이 조문하러 왔다.

二十六日 辛巳 李榮全來吊.


8월 27일 임오

조 주부趙主簿가 조문하러 왔다.

二十七日 壬午 趙主簿來吊.


8월 28일 계미

권중평權重平ㆍ금영성琴永成ㆍ윤욱尹煜ㆍ손심孫襑ㆍ황유장黃有章이 조문하러 왔다.

二十八日 癸未 權重平琴永成尹煜孫襑黃有章來吊.


8월 29일 갑신

이장형李長亨이 보러 왔다.

二十九日 甲申 李長亨來見.


8월 30일 기유

[三十日己酉]


9월 1일 병술

맑음. 아우와 조카와 함께 영전에 전을 올렸다. 환약이 또 한 상자 가득 찼다.

一日 丙戌 晴. 與弟姪奠于靈座. 丸藥又盛一笥.


9월 2일 정해

술지가 보러 왔다.

二日 丁亥 述之來見.


9월 3일 무자

금람琴欖과 김요량金耀良이 잠깐 왔다. 덕온德昷이 조문하러 와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三日 戊子 琴欖金[耀]良暫來. 德昷來吊, 從容做話.


9월 4일 기축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금씨 아재와 김요장金耀章이 보러 왔다.

四日 己丑 朝[霧]. 琴叔及金[耀]章來見.


9월 5일 경인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금혜운琴慧雲이 보러 왔다. 김작金碏과 금이로琴以魯가 보러 왔다. 우필대도 왔는데 서울에서 비로소 돌아온 것이다.

五日 庚寅 朝霧. 琴慧雲來見. 金碏琴以魯來見. 禹必大亦來, 始自京中還也.


9월 6일 신묘

인재隣哉 및 권기權基와 권이환權以鍰이 보러 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로寒露 구월절九月節이다.

六日 辛卯 隣哉及權基權以鍰來見, 從容做話. 寒露九月節.



9월 13일 무술

어제 김만고金萬古의 상여가 이곳의 큰 길을 지난다는 것을 들었으나 병으로 가서 곡을 할 수 없어 이도에게 가서 술 한 잔을 올리도록 시켰으니, 비통함이 얼마나 지극하겠는가.

○ 성여습成汝習 형제ㆍ금종성琴縱成ㆍ이성철李誠哲ㆍ김추길金秋吉ㆍ금양중琴養中ㆍ금시양琴是養이 조문하러 왔다. 묏자리를 정하는 일로 우필대를 시켜 이영웅李英雄을 불러 오게 하였으니, 이적李適 형의 얼자 사위이다. 염을 시켜 이영웅과 함께 명암에서 묏자리를 살펴보게 하였으나 해가 저물어 오지 못하였다.

十三日 昨者聞金萬古輀車, 過此大路, 而病不得往哭, 使以道往奠一爵, 悲慟何極. ○ 成汝習兄弟琴縱成李誠哲金秋吉琴養中琴是養來吊. 以擇山事, 使禹必大, 邀李英雄來, 李適兄之孽婿也. 使�與李, 看山于鳴巖, 而日暮不能來. 戊戌.


9월 14일 을해

백달이 서울로 시험을 보러 갔다가 이제야 조문하러 왔다.

十四日 伯達赴試于京城, 今乃來吊. 乙亥.


9월 22일 정미

렴이 이지승과 함께 묏자리를 살펴보는 일로 선영 근처로 갔다. 덕온과 김덕창金德昌이 잠깐 들렀다.

二十二日 丁未 �與李祗承, 以看山事, 往先塋近處. 德昷金德昌暫過. 自昨夜雨至曉乃晴. -自昨夜以下當在次日-


9월 23일 무신

밤에 방과 렴이 돌아왔다. 어젯밤부터 비가 내려 새벽이 되어서야 갰다.

二十三日 戊申 夜磅�還. [自昨夜雨至曉乃晴.]


9월 26일 신해

오여전吳汝栴이 보러 왔다. 오여전은 풍수를 꽤 잘 아는 자이다. 염이 오여전과 함께 묏자리를 살펴보러 갔다. 오여말吳汝枺도 왔다.

二十六日 辛亥 吳汝[栴]來見. 吳頗知風水者也. �與吳俱往看山. 吳汝枺亦來.


10월 6일 경신

묏자리를 살펴보는 일로 박 형을 모시고 이건ㆍ이도와 함께 거인으로 가서 한 곳을 얻었다. 밤을 타고 지례 재사로 가서 잤다. 이직과 상주 금씨가 이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六日 庚申 以看山事, 陪朴兄及與以健以道往居仁, 得一處. 乘夜往宿知禮齋舍. 以直及琴喪主來待于此矣.


10월 7일 신유

박 형이 지례 재사 건너편에서 또 묏자리 한 곳을 얻었다. 내동內洞 박 형과 두 아우 및 상주 금씨는 성천사聖泉寺로 가서 잤다. 금씨는 묏자리를 찾는 일로 박 형을 뒤따라간 것이다. 입동立冬 시월절十月節이다.

七日 辛酉 朴兄又得一處于齋舍越邊. 內洞朴兄及兩弟及琴喪主, 往聖泉寺宿. 琴以看山事, 追隨朴兄也. 立冬十月節.


10월 8일 임술

박 형은 영천榮川(영주榮州)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우들과 함께 돌아왔다. 오는 길에 박 형이 잡은 남쪽 기슭의 묏자리로 들어가 보니 골짜기가 몹시 깊고 멀었다. 올 때 산마루를 거쳐 몇 리를 왔는데, 찬바람이 크게 일어나 한기가 살갗과 뼛속에 스며들어 많이 상하였다. 집에 돌아오니 기운이 아주 쏙 빠졌다. 권진우權震佑를 잠깐 만나보았다.

八日 壬戌 朴兄還榮川, 余與弟輩還. 歷路入見朴兄所卜南邊山, 洞甚深遠. 來時由山頂行數里, 冷風大起, 寒[徹肌]骨, 所傷不貲, 歸家氣甚枵然. 暫見權震佑.


10월 9일 계해

원기가 몹시 약해져서 온종일 누워서 조리하였다.

九日 癸亥 元氣委薾, 終日臥調.


10월 10일 갑자

아침에 렴이 용성으로 갔다. 이계명李季明을 청하여 오려는 것이다. 백달 형제ㆍ이실 및 나의 셋째 아우와 함께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十日 甲子 朝�往龍城, 擬邀請李季明. 伯達兄弟而實及與吾三弟, 叙話終日.


10월 19일 계유

금필달과 이문빈李文彬이 조문하러 왔다.

○ 아침에 �상서�를 외웠다.

○ 방을 안동으로 보냈다. 경차관 박안효朴安孝 및 안동 부사를 만나 예장군禮葬軍을 빌려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十九日 癸酉 琴必達李文彬來吊. ○ 朝誦書. ○ 送磅于安東, 擬見朴敬差安[孝]及花山府伯, 借葬軍云.


10월 23일 정축

이실 및 김요량ㆍ김익중金益重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저물어서 묏자리를 살펴보는 일로 이여웅李如雄을 불러왔다. 점쟁이 권추경權秋經도 와서 잤다.

二十三日 丁丑 而實及金耀良金益重來話. 日暮以看山事, 邀李如雄來, 卜者權秋經亦來宿.


10월 24일 무인

신요가 잠깐 왔다. 렴이 이생 및 점쟁이 권추경과 빙砯ㆍ영碤과 함께 지례로 묏자리를 살펴보러 갔다.

二十四日 戊寅 申橈暫來. [�]與李生及權卜及砯碤, 往知禮看山.


10월 26일 경진

이생이 돌아갔다. 렴이 또 이여웅과 함께 거인으로 갔다. 정기학鄭基學과 금삼달琴三達이 조문하러 왔다.

二十六日 庚辰 李甥還. �又與李如雄往居仁. 鄭基學琴三達來吊.


10월 27일 신사

새벽에 비가 내려 저물어서 갰다. 맹견이 와서 아주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렴이 거인에서 밤에 돌아왔다. 9월부터 여러 술사를 불러서 묏자리를 살펴보았으나 견해가 각각 달라 따를 만한 마땅한 곳이 없으니, 더욱 근심이 되고 한탄스럽다.

二十七日 辛巳 曉雨晩晴. 孟堅來話甚穩. �自居仁夜還. 自九月邀諸術士看山, 所見各異, 莫適所從, 尤可悶嘆.


11월 10일 갑오

모레가 발인하는 날이라 빈소를 옮겼다. 안타깝고 비통하여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다. 덕여 형과 춘경이 보러왔다.

十日 甲午 明明將發[引]移殯, 哀痛悲悼, 不遑寧處. 德輿兄及春卿來見.


11월 11일 을미

아침에 들으니 김광술金光述이 마마 때문에 끝내 죽었다고 한다. 참담하고 애통함을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내일 발인할 때 친구들이 역질 때문에 모두 참석할 수가 없다고 한다.

현풍玄風 곽유한郭惟翰과 곽유령郭惟寧이 천리 길을 조문하러 왔다.

十一日 乙未 朝聞金光述以痘疾, 竟至不淑, 慘慟, 不忍言不忍言. 明日將發引, 而親舊以疫患, [皆]不得相顧云. 玄風郭惟翰惟寧, 千里赴吊.


11월 12일 병신

자시子時에 파빈破殯하고, 진시辰時에 상여를 출발하여 해가 저물어서야 거인에 이르러 성빈成殯하였다. 금시함琴是咸ㆍ이지원李之垣ㆍ금영성琴永成ㆍ권선길權旋吉 등이 도중에 상여를 맞이하였다.

十二日 丙申 子時破殯, 辰時行喪, 日暮乃至居仁成殯. 琴是咸李之[垣]琴永成權旋吉迎於中路.


11월 13일 정유

아침에 곽군 형제가 모두 떠나갔다. 금시함과 이홍민李弘敏이 보러왔다. 나는 날마다 분주히 오가며 곡하느라 원기가 쏙 빠졌다. 초礎와 영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十三日 丁酉 朝郭君兄弟皆去. 琴是咸李弘敏來見. 余連日奔走哭泣, 元氣萎薾. 與礎碤還家.


11월 14일 무술

문을 닫아걸고 병을 조리하였다.

十四日 戊戌 杜門調病.


11월 15일 기해

어제와 같이 병을 조리하였다. 이직이 재산으로 갔다.

十五日 己亥 調病如昨. 以直往才山.


11월 21일 을사

이도 및 방과 함께 거인 산소에 갔다. 길에서 권이○權以○와 이지헌李之憲을 만났고, 거인에 당도하여 류감ㆍ김구金玖ㆍ윤정尹炡 등을 만나보았다.

二十一日 乙巳 與以道及磅往居仁山所. 途見權生以○及李之憲, 到居仁, 見柳戡金玖尹炡.


11월 22일 병오

개토제開土祭를 지내고 또 금정金井을 놓았다. 상주喪主 금경익이 금정을 살펴보고 바로잡았다. 금시함 부자와 이홍민이 제사에 참여하였다. 이계적李季迪도 보러왔다.

二十二日 丙午 行開土祭, 又置金井. 琴棘人景益看正金井. 琴是咸父子李弘敏參祭. 李季迪亦來見.


11월 28일 임자

장례를 치르는 일로 거인으로 갔다. 날씨가 몹시 온화하였다. 거인에 당도하여 이홍민 부자와 금필달 등 여러 사람을 만나보았다. 이계휘ㆍ박료 및 아이와 조카 등이 모두 모여 산역을 살펴보았다. 전석磚石을 광중壙中에 깔았다.

二十八日 壬子 以葬事往居仁, 日氣甚溫. 到居仁, 見李弘敏父子琴必達諸人. 李繼輝朴炓及子姪等皆來會, 看役. 下[磚]石于壙中.


11월 29일 계축

덕온德昷ㆍ가회佳會ㆍ손신언孫愼言 등이 와서 모였다.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도도 오천烏川에서 왔다.

二十九日 癸丑 德昷佳會孫愼言來會. 其餘不能盡記. 以道亦自烏川來.


11월 30일 갑인

진시辰時가 되어서야 발인하여 하관을 하고 장사를 지냈다. 날이 저물어서야 반곡反哭을 하고 초우제初虞祭를 지냈다.

三十日 甲寅 辰時乃發引窆葬. 日暮乃返哭, 行初虞祭.


12월 16일 경오

十六日 庚午 室人生朝也. 奠酒果餠麪于几筵, 悲悼難堪.

죽은 아내의 생일이어서 술ㆍ과일ㆍ떡ㆍ국수를 궤연에 올렸다. 비통하고 애달픔을 견디기가 어렵다.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44년(인조 22) 8월~12월

원손이 심양에서 귀환

명나라 멸망 이후의 일 보고

실록 및 일기 유실 보고

심양에 있는 소현세자의 행보 보고

김육의 상소대로 수레와 돈 사용 시도

경상도에 역병 퍼짐

소현세자 귀국 준비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707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죽은 매부가 되살아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