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가는 곳에 효도 간다
조선후기가 워낙 맏아들(종손)로 이어지는 가부장제가 확고하게 성립되었던 시기라서 그런지 조선이 전반적으로 그러한 사회였다는 인식이 굳어져 있다. 하지만 제사를 맏아들이 맡아 지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로, 김광계가 살고 있던 17세기만 해도 여전히 시집간 딸도 부모의 제사를 지내고, 그 딸이 낳은 외손 역시도 외조부모의 제사를 지내거나 혹은 제물을 내고 있었다. 사위가 처가 제사를 지내는 것 역시 이상한 광경이 아니었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이 장자 중심의 가부장제가 현대에도 망령처럼 살아남아 있다는게 우습고도 화가 난다. 내가 아버지 장례를 치를 때에도 상주 자리에 외동딸인 나 대신 사촌오빠들을 앉히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러면서 여자는 시집가면 출가외인이 되니까 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내가 결혼해 있었으면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있는 자식인 나 대신 사위를 상주 자리에 앉혔겠지? 이미 아주 오래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때 일은 생각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화가 난다.
또, 제사 자체의 허무함 때문이라도 제삿상을 차리고 허공에 절하는 세레머니는 없어졌으면 한다. 한때 집안에서의 내 자리를 인정받으려고 사촌오빠들이 다 제사를 안 지낸다면 나 혼자 지내겠다고 철없는 소리를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소박하게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누구한테 자랑할 것도 아닌 푸짐한 제삿상을 차려내는 것도 어쩐지 본말전도처럼 느껴지고 말이다.
다시 17세기로 돌아가서 김광계 집안의 제사 모습을 보자. 1644년이 저물어 가던 12월 28일, 김광계는 아들 김렴(金�), 조카 김방(金磅)ㆍ김빙(金砯)ㆍ김영(金碤)을 데리고 거인(居仁)에 가서 성묘하였다. 그 후 다음 성묘 차례인 지례(知禮)로 갔다. 지례에는 동생 김광악이 이미 와 있었다.
다음날 김광계는 김광악(金光岳) 및 여러 조카들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지례에는 김광계의 고조부 김효로(金孝盧)가 묻혀 있었는데, 금재(琴梓)를 사위로 들여 이 때 광산 김씨 집안에서는 금씨 집안과 사돈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금씨 집안에서 고조부의 제사에 쓸 제물을 마련하였다. 또 조부모의 제사 때는 김광악이 제물을 내어 지냈다.
이 날은 늦어서 지례에서 머물러 자고, 다음날 김광계 일행은 명암(鳴巖)으로 가서 성묘를 하였다. 명암에는 김광실(金光實)이 막내딸이 전염병에 걸려 피접을 와서 지낸지가 오래였다. 명암에는 김광계 형제의 부모가 묻혀 있었는데, 이번에는 박회무에게 시집간 김광계의 큰누이가 제물을 내어 제사를 지냈다. 연말의 모든 성묘를 끝내고 다함께 음복을 하며 정과 복을 나눈 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사돈 집안에서, 그리고 막내아들도, 시집간 딸도 연말 성묘 때 쓸 제물을 공평하게 내는 모습이 참 화목해 보이지 않는가.
그 다음 해인 1645년 3월 9일, 김광계의 조부모 묘사가 있는 날이다. 이 날 제물은 박회무(李尙逸) 에게 시집간 큰 누이가 냈다. 제사를 마치고는 기운이 쑥 빠져서 방바닥에 쓰러져 누워 있느라고 아우, 조카들과 함께 음복을 하지는 못했다. 봄이기는 했으나 아직 날씨가 찼는지 기침이 계속 났고, 먼 길을 오가느라 허리가 더욱 아팠다.
5월 4일에는 비를 무릅쓰고 거인(居仁)에 성묘를 하러 갔다. 비 때문에 결국 산소에는 올라갈 수는 없었다. 동생 김광실(金光實), 조카 김방(金磅), 김영(金碤) 등이 성묘를 하는데 참석했다. 이 뒤로 단양(端陽)의 묘사, 상능(上陵), 명암의 제사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원래 이 모든 제사의 제물을 류암(柳嵓)에게 시집간 둘째 누이가 마련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둘째 누이의 병환이 깊어 제물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임시로 김광계가 상능의 제물을, 김광악(金光岳)이 명암의 제물을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25일에는 명암(鳴巖)의 기제사가 있었다. 명암의 제물을 누이 대신 마련하기로 한 김광악 대신에, 죽은 누이의 남편이었던 이시명(李時明)의 아들, 이상일(李尙逸)이 마련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는 공교롭게도 마마에 걸려서 제물을 마련하지 못했고, 급히 다른 형제들이 힘을 합쳐 제물을 준비해야 했다. 이상일의 차례는 다음으로 미뤄졌는데, 그 다음은 바로 6월 18일, 김광계 형제의 아버지 제사였다. 아버지 묘가 있는 명암으로 갔으나 이상일이 준비해 오기로 한 제물이 와 있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결국 제물은 깜깜 무소식이라 한나절 만에 급히 준비해서 제사를 지내야 했다.
실제로 제물을 내지는 못했으나 이미 죽은 누이의 남편, 그러니까 매부 집안에서도 제물을 보내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같은 배경에는 모두 돈이 관련되어 있었다. 남녀, 장유를 따지지 않은 균분상속이었으니만큼, 제사는 자신이 상속받은 바 대로의 의무 이행이다. 같은 이치로 조선후기에는 장자에게 상속을 몰아주면서 제사 봉행의 의무도 몰아주게 된 것.
<매원일기>
갑신년(1644, 인조22)-김광계 64세
12월 28일 임오
방磅ㆍ렴�ㆍ빙砯ㆍ영碤과 함께 거인에 가서 성묘를 하고, 밤을 타고 지례로 가서 잤다. 이직은 벌써 와 있었다.
二十八日 壬午 與磅�砯碤[往]居仁展掃. 乘夜往知禮宿. 以直已來矣.
12월 29일 계미
이직 및 여러 조카와 함께 묘사를 지냈다. 고조부의 제사는 금씨 아재가 제물을 마련하여 지냈고, 조부모의 제사는 이직이 제물을 마련하여 지냈다. 날이 저물어 머물러 잤다.
二十九日 與以直及諸姪行墓祀. 高祖祭琴叔辦行, 祖父母祭以直辦. 日暮留宿. ○ 癸未.
12월 30일 갑신
아우 및 조카와 함께 명암에 와서 성묘를 하였다. 이건이 막내딸 때문에 전염병을 피해 이곳에 온 것이 오래되었다. 박실 누님 댁에서 제물을 마련하였다. 음복을 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 해가 유초酉初 초각初刻에 졌다.
三十日 甲申 與弟姪來鳴巖掃墓. 以健爲季女避疫, 來此久矣. 朴姊家辦. 餕後還家. ○ 日入酉初初刻.
을유년(1645, 인조23)-65세
3월 9일 임진
또 고단함을 참으면서 조부모의 묘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는 원기가 쏙 빠져서 방안에 쓰러져 누워있느라 아우 및 조카와 더불어 같이 앉아 음복을 하지 못하였다. 기침이 잇달아 나고 허리의 통증이 더욱 심하여졌다. 박실 누님 집에서 제물을 마련하여 지낸 것이다.
九日 壬辰 又耐困行祖父母墓祀, 祭畢元氣萎薾, 僵臥房中, 不得與弟姪共坐飮餕. 咳[嗽]連聲, 腰痛轉甚. 朴姊家辦.
5월 4일 을유
밥을 먹은 뒤에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면서 거인으로 가서 성묘를 하였는데 산소에는 올라 갈 수가 없었다. 이건以健ㆍ방磅ㆍ영碤 등이 성묘하는데 참석하였다. 그길로 거인으로 가서 잤다. 이날 비가 종일 내렸으나 가랑비가 마치 안개와 같았다. 끝내 흙덩이도 적시지 못하였으니 걱정이 된다. 단양端陽의 묘사와 상능上陵 및 명암의 제사는 모두 류실 누님이 제물을 마련할 순서이지만 누님이 병환 때문에 마련할 수가 없어서 내가 상릉의 제물을 마련하고 이직이 명암의 제물을 마련하였다.
四日 乙酉 食後雨. 冒雨往居仁展掃, 而不得上墓. 以健磅碤參祭. 仍宿居仁. 是日雨終日, 而細雨如霧, 竟不破塊, 可悶. 端陽墓祀, 上陵及鳴巖祭, 皆當次於柳姊, 而以病患不能行. 上陵余辦, 鳴巖以直辦.
5월 25일 병오
제사를 지낸 뒤에 형제들과 함께 명암에 머물고 있다. 들으니 이도以道가 화재를 당하여 살고 있는 집이 태반이나 타고 무너졌다고 한다. 듣고 나니 놀랍고 참담하다. 이번 기제사는 이생李甥이 제물을 준비할 차례였으나 마마 때문에 준비해 보낼 수 없어서 형제들이 힘을 합쳐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二十五日 丙午 行祭後, 與兄弟留鳴巖. 聞以道遇火災, 所居家舍, 太半燒毁. 聞來驚慘. 此忌祭當次於李甥, 而以痘患, 不得備送, 兄弟合力設行.
6월 18일 기사
아버지의 기제사가 닥쳤으나 집안에 일이 있어서 명암 재사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명암으로 가니 이건과 이직은 벌써 왔고 방과 빙도 왔다. 기제사의 제물은 이생李甥이 마련할 차례인데 깜깜 무소식이라 한나절 만에 갑자기 마련하여 지냈다.
十八日 己巳 大忌臨迫, 而以家中有故, 將設行于鳴巖齋舍, 食後卽往鳴巖, 以健以直已來, 磅砯亦往. 忌祀當次於李甥, 而漠然無消息, 半日內卒辦設行.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44년(인조 22) 12월
임경업에 대한 부정적 보고
소현세자 귀국 준비
1645년(인조 23) 3월~6월
일본의 천주교도를 대신 잡아주다
김상헌이 청에서 문초를 당하고 귀국
북경으로 쌀을 운반하다
영남, 평안에 역병 발생
소현세자 사망, 장례
봉림대군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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