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병제는 국방의 의무라고 멋지게 포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국가에 의해 강제로 인신이 예속되는 형태의 군 복무이다. 표면적으로는 누구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게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실상 자기 자식은 결코 군대에 보내고 싶지 않아 한다. 또 자기도 빠질 건덕지만 있다면 빠지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 누가 한창 나이에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장소에서 단체생활을 하며 가족 및 친구들과 격리되어 있고 싶어하겠는가.(군인이 장래희망이 아니었다는 전제 하에)
그나마 현대에는 쥐꼬리만하나마 월급이라도 준다지만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돈도 뜯기고 노동에도 동원되어야 했으니 군역은 정말 고역이었을 것이다. 또 모두가 공평하게 군대에 가는 것도 아니었다. 양반은 군역을 안 지니까. 신분제에 의한 차별을 내면화했다고 할지라도 사는 지역에 따라서 차별받는 것은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국경지대에 산다고 군역을 더 지라니. 요즘으로 치면 철원 사니까 군 복무를 시시때때로 여러 차례 하라는 말과도 같다.
김광계의 비부 끗남도 군역을 이렇게 질 바에야 차라리 종살이를 하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도망친 사람이었다.(*조선 전기에는 노비는 군역을 지지 않았으나, 양란 이후 점차 노비도 군역을 졌다고 한다.)
밥을 먹고 강가의 모래사장에 가서 놀고 있던 김광계에게 한 관인(官人)이 다가와 문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문서에는 김광계가 데리고 있는 여종의 지아비 끗남(唜男)이라는 자는 원래 양계(兩界) 지역의 사람인데, 도망쳐서 현재 김광계의 여종과 혼인해 살고 있으니 양계 지역으로 돌려보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백성이 원 거주지에서 벗어나 거주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관에서 나서서 원 거주지에서 이탈한 백성이나 종을 추적하기도 하였다. 사실 양계라는 명칭은 태종 13년(1413)에 폐지되었고, 평안도와 영길도라는 명칭을 새로이 부여받았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편의상 군사경계지역을 양계라고 불렀던 것 같다. 이 지역은 국경지역이었던 만큼 더욱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국경지대의 백성들은 빈번하게 군역과 요역에 동원되었으며, 또한 사신이 오갈 때 드는 비용을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그 부담이 심하였다. 아마 끗남도 이러한 상황들을 더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광계는 이 문제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 상의하기 위해 좌수 황시발(黃時發)을 만나러 비암(鼻巖)으로 갔다. 원 거주지에서 벗어났다고 추쇄를 하러 오다니, 끗남도 일단은 군역을 지는 양인인데 그 처우는 국가의 노비와도 같았다. 김광계 입장에서도 끗남이 자기 노비의 남편일 뿐, 자기의 노비가 아니니 돌려보내고 말고 하는 일이 난감했을 것이다.
<매원일기>
을유년(1645, 인조23)-김광계 65세
4월 10일 임술
밥을 먹은 뒤에 말을 타고 강 모래사장으로 나가 구경하며 놀았다. 관인官人이 문서를 가져와 보여주었는데, 계집종의 지아비 끗남唜男이란 자는 본래 양계兩界 사람인데, 그를 쇄환刷還할 일로 아사亞使(판관)가 예안 현감에게 문서를 보낸 것이다. 그길로 비암鼻巖으로 가서 좌수 황시발黃時發과 함께 상의하였는데, 우준보禹遵甫도 와서 모였다. 시발이 술을 가져 왔기에 술을 몇 순배 마시고 헤어졌다.
十日 壬戌 食後騎馬行江洲遊翫. 官人以文書來示, 以婢夫唜男者, 本兩界人, 以刷還事, 亞使移文于本官者也, 仍往鼻巖, 與座首黃時發相議, 禹遵甫亦來會, 時發持酒來, 對酌數巡而散.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45년(인조 23) 4월
소현세자 사망. 장례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70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