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마다 하나씩 망나니가 있다. 백범일지에는 집안 망나니가 사고칠까봐 집안 어른들끼리 상의하여 발 뒤꿈치를 오려내는 대목이 나온다. 정도의 경중이 있겠지만 아무튼 집안마다 하나씩은 꼭 있는 망나니들은 보증을 서거나, 사람을 치거나, 뭐 아무튼 그에 맞먹는 무슨 짓을 해서 집안을 위기에 빠뜨린다. 조선시대 집안 망나니가 가진, 집안을 망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흉기는 바로 세치 혀였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역적이 되기 십상. 역적이 되면 혼자 죽는 것도 아니고 삼족을 멸하는 벌에 처해진다. (여기서 삼족은 할아버지의 자손, 그러니까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등을 말하는 조족(祖族), 그리고 아버지의 자손인 형제와 그 자식인 조카를 말하는 부족(父族), 그리고 내 자식인 아들과 손자를 말하는 기족(己族)을 말한다.) 그렇기에 백범의 집안에서도 멀쩡한 자손의 발 뒤꿈치를 오려내어 멀리 나다니면서 쓸데없는 소리를 못 하고 다니게 한 것이리라.
김광계 집안의 망나니는 둘째 동생 김광보였다. 김광계의 일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동생 김광보의 주사는 이미 친족 사이 뿐 아니라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술에 취해 제사 때 재계를 하지 않는 것은 예사며, 항의할 일이 있으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거친 말로 편지를 쓰기도 하여 김광계로서는 동생을 단속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1635년, 김광보가 49세가 되던 해 2월 23일에는 역동서원에서 원장인 김광계와 그의 양자 김렴, 이하 여러 유생들이 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향사를 주관하는 헌관으로는 이홍중(李弘重), 김확, 김광보가 선발되어 있었다. 모두 향사 이틀 전에 서원에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광보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채로 도착하여서 망신스럽기가 그지없었다. 다음날에도 김광보는 술을 마셨고, 드디어 2월 26일이 되어 향사를 지냈는데, 이후 있었던 음복자리에서까지 김광보는 술을 마시고 미친 사람이나 바보처럼 굴었다. 연일 술을 마시고 전혀 제정신으로 있는 때가 없어서 여러 사람의 비웃음을 사고 만 것이다. 서원 원장인 김광계의 입장이 곤란해진 것은 당연.
김광계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3년 후인 1638년, 김광계 형제의 어머니 기제사가 임박한 5월 23일에도 김광보는 술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김광보는 20일에 안동으로 가서 여러 사람을 만나 술독에 빠져 있다가 문득 어머니 제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제사가 임박하여 김광계의 집에 부랴부랴 온 것이었다. 김광계의 집에서는 다른 형제들과 조카들이 재계를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김광계는 어머니 제사인데도 스스로를 살피지 않은 동생이 너무나 답답하게 여겨졌다. 이미 2달 전에 김광보는 재종숙 김령의 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술을 마셔서, 김령은 김광보의 술병이 고질병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제사 후 며칠 뒤, 인근 지역인 영해에서 수령과 지역 양반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이 때 김광보는 중앙 관료인 심지원(沈之源)에게 편지를 써서, “영해 수령의 벼슬살이는 탐욕스럽고 비루하다. 그와 절친한 몇 안되는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거절한 지 오래 되었다”고 헐뜯었다. 이와 같은 거친 문구에 벼슬살이를 오래 하여 노회한 김령은 깜짝 놀라 자신의 아이들을 김광계에게 보내 김광보가 쓴 편지를 보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전하였다. 김광계는 동생의 경솔함 때문에 며칠간 문을 닫아걸고 있어야 했다.
김광보는 다행히(?) 생원시에만 입격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못해 더 큰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기에 김광계의 집안은 안전할 수 있었다.
<매원일기>
을해년(1635, 인조13)-김광계 55세
2월 23일 갑진
밥을 먹은 뒤에 흠경과 경익이 보러왔다. 서원 향사 일 때문에 염�과 함께 역동서원에 왔다. 서원 유생 김구金瑴와 허심許燖 등 여남은 사람이 서원에 와서 재계하였다.
二十三日 甲辰 食後欽卿·景益來見, 以書院享祭事, 與�來易院. 諸生·金瑴·許燖等十餘人來院致齋.
2월 24일 을사
임보·이실·이도가 헌관으로 왔으나 이도는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었다. 여러 친구들과 함께 재계하였다.
二十四日 乙巳 任甫·而實·以道, 以獻官來, 而以道則沾醉, 不省人事矣. 與諸友致齋.
2월 25일 병오
재계하였다.
二十五日 丙午 致齋.
2월 26일 정미
향사를 지낸 뒤에 금 창원琴昌原 어른을 불러 와서 음복을 하였다. 음복 자리가 끝난 뒤에 금 창원 어른을 모시고 여러 친구들과 배를 타고 술잔을 나누며 뱃놀이를 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흩어졌다. 밤부터 새벽까지 비가 내렸다. 이도가 입재入齋 날부터 연일 크게 취하여 미친 사람 같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하여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걱정을 말할 수 없다. 취하여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二十六日 丁未 行祭後, 邀琴昌原丈來共餕. 罷後陪琴丈引諸友乘船, 酌酒游泳, 至夜乃散. 夜雨達曙. 以道自入齋日, 連日大醉, 如狂如癡, 爲人所非笑. 憂悶不可言. 醉不能還家.
2월 27일 무술
아침에 이도가 감관청監官廳에서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렸다. 우습다.
二十七日 戊申 朝以道自監官廳, 不告而去. 可笑.
갑술년(1638, 인조16)-김광계 58세
5월 23일 을유
아우⋅조카와 함께 치재하였다. 광보光輔가 20일에 안동으로 갔다가 술독에 빠져서 오늘에서야 크게 취하여 왔다. 어머니 제삿날이 닥쳤는데도 또한 살피지 않은 것이니, 너무 답답하고 한탄스럽다.
二十三日 乙酉 與弟姪致齊[齋×]. 光輔念日往安東, 沈湎于酒, 今日乃大醉而來. 大忌臨迫, 而亦不省念, 極可悶嘆.
6월 1일 임진
기운이 몹시 고르지 않아서 문을 닫아걸고 조리하였다.
一日 壬辰 氣甚不平, 杜門調養.
6월 2일 계사
어제와 같이 병을 조리하였다.
○ 백달伯達 형제가 보러 왔다. 밤에 비가 크게 쏟아져 새벽까지 이어졌다.
二日 癸巳 調病如昨. ○ 伯達兄弟來見. 夜大注達曙.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35년(인조 13) 2월
삼수(三水)ㆍ갑산(甲山)ㆍ단천(端川) 등의 진을 보수함
성종의 세실(世室)에 대한 응행 절목을 논함
남도의 퇴락한 진 보수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7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