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술을 마시면...!

by 소주인

술꾼의 숙명은 아침 반성이다. 전날 먹은 술이 뇌로 올라간 듯, 머리는 지끈지끈 울리고 속은 온통 울렁거리는 이 세상 고통이 아닌 고통을 겪으면서 다들 쥐어 짜내듯 말한다. 내가 술을 또 마시면 OOO다!(개인 재량에 따라 채워지는 빈칸)


하지만 이런 반성의 아침을 겪은 뒤에도 여전히 냉장실 한켠을 싱그럽게 차지하고 있는 맥주 한 캔을 바라볼 때면 이미 마음 속에는 푸쉬-팝!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술 마실 핑곗거리가 참 많았다. 오늘 새벽에 제사 지냈으니까 음복으로 한 잔, 잔치 열렸으니 또 한 잔, 빚어놓은 술이 다 익었으니 한잔, 손님 왔으니 한잔....사대부가가 지켜야 하는 덕목이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宾客)이니, 덕목으로 술을 잘 마시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무슨 술을 마셨을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술을 마셨는지는 모르겠고, 김광계와 그 주위 사람들은 화주(火酒)를 즐겨 마셨다. 화주가 무엇인가 하니, 바로 증류방식으로 만든 소주이다.


소주는 다들 알다시피 도수가 높다. 안동 소주나, 아니면 화요를 마셔본 사람들은 다들 그 맛을 알 것이다. 목에서는 물 같이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어느새 꽐라가 되어 있는 나 자신. 김광계도 소주의 이러한 속성을 알고 있었기에 쉰이 넘아간 다음에는 스스로 화주를 찾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맛좋은 화주를 가져오면 다음날 숙취 대잔치를 예상하면서도 마시는 일을 피하지는 않았다.


1636년 6월 12일, 김광계는 처가 쪽의 친척인 김환(金瑍)을 향교에서 만났다. 향교에서 볼일을 마친 후, 김환은 계상(溪上)에 볼일이 있다며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여 김광계는 도산서원으로 홀로 먼저 가 있었다. 잠시 후, 계상에서 돌아온 김환의 손에는 화주가 들려 있었다. 둘이서 화주를 몇 잔 맛보았는데 과연 독한 술이라 그런지 마시고 얼마 되지도 않아 구역질이 나고 속이 쓰렸다. 김광계는 일기에 "경계할 만하다." 라고 썼다.


하지만 다음 해 봄이 되자 이 때의 고통은 까맣게 잊혀졌다. 막내아우 김광악(金光岳)의 집에 가서 화주를 과음한 것이다. 당연히 다음날에는 숙취로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였다.


1638년 새해가 되어 김광계는 다시금 화주를 마신다. 1월 13일 아침에 권굉(權宏)의 집에 새해 덕담도 나눌 겸 갔더니 그 집에 이미 모여 있던 김시익(金時翼) 등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흥이 올라 결국 아침부터 화주를 마시게 되었다. 아무리 천천히 술을 마셨다고 해도 결국 과음이라 종일 멍하니 있었다. 김광계는 "고달팠다." 라고 일기에 썼다. 다음날 문을 닫아걸고 몸조리를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날 다시 경계하여 화주를 마시지 않게 되었을까? 1639년 2월 16일, 김광계는 막내아우 김광악의 집에 삼종질 김확(金確)과 함께 가서 화주를 거나하게 마셨다. 이날은 아우의 집이 편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술에 취해 체모를 잃을 정도였다. 이날 일기에는 다시 "후일에는 마땅히 경계해야겠다" 쓰면서 절주를 다짐하였다.


하지만 김광계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평생 화주를 마셨다.




<매원일기>


병자년(1636, 인조14)-김광계 56세


6월 12일 을유

아침에 지나는 길에 향교에서 덕온 및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그길로 덕온과 함께 동행하여 덕온은 계상溪上으로 가고 나는 도산서원으로 들어왔다. 오후에 덕온이 계상에서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갔는데, 덕온과 함께 억지로 화주를 몇 잔 마셨더니 토하고 속이 쓰려 몹시 고통스럽다. 경계할 만하다.

十二日. 乙酉. 朝歷見德昷及諸人于校中, 仍與德昷同行, 德昷往溪上, 余入陶院. 午後德昷自溪還, 談話移時, 乃去, 與德昷, 强飮火酒數盃, 嘔吐煩熱困憊. 可戒.


12월 28일 무술

예안 현감이 화주 및 생 꿩과 대구 등의 물품을 보내어 왔다.

함안咸安⋅온의溫義의 도유사都有司 조영문趙英汶의 격문이 도착하였다.

二十八日 戊戌 土主送火酒及生雉·大口等物. 咸安溫義都有司趙英汶羽檄來到.



정축년(1637, 인조15)-김광계 57세


3월 16일 을묘

넷째 아우 집에 가서 화주를 마셨는데, 조금 과음하였다.

十六日. 乙卯. 往四弟家飮火酒, 稍過.



무인년(1638, 인조16)-김광계 58세


1월 13일 정축

아침에 가서 인보仁甫를 만나 보았다. 김시익金時翼 등 여러 사람을 만나 화주火酒를 과음하여 종일 멍하고 고달팠다. 밤에 달빛을 틈타 또 인보를 만나 보았다. 권계權金+㡭가 보러 왔다.

十三日 丁丑 朝往見仁甫. 見金時翼諸人, 過飮火酒, 終日昏困. 夜乘月又見仁甫. 權金+㡭來見.


1월 14일 무인

기운이 몹시 고르지 못하여 문을 닫아걸고 조용히 조리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잠깐 이실而實을 만나 보았다.

十四日 戊寅 氣甚不平, 杜門靜調. 日暮暫見而實.



기묘년(1639, 인조17)-김광계 59세


2월 16일 갑진

한유의 글을 읽었다.

○ 수재秀才 윤민길尹敏吉이 보러 왔는데, 곧 고인이 된 벗 윤정평尹正平(정평은 윤조원의 자)의 아들이다.

이실과 함께 이직의 집으로 가서 화주를 과음하고 크게 취하여서 체모를 잃은 것이 없지 않았으니 후일에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十六日 甲辰 韓. ○ 尹秀才敏吉來見, 乃故友尹正平之子也. 與而實往以直家, 過飮火酒大醉, 不無所失, 後當可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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