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있는 곳엔 늘 컨닝이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2006년도 수능에서 대리시험을 치다가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학부모로부터 1억을 받았지만 시험 성적 확인 결과 78점에 불과한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으니, 그가 받은 1억원은 위조지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레전드 중의 레전드인지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찾아도 해당 사연이 이미지로 검색된다.
아무튼 대리시험의 유혹은 중요한 시험이면 중요한 시험일수록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조선시대 한문 소설에도 돈을 받고 대신 과거시험 답안을 작성해주는 거벽이 등장한다. 문장도 훌륭해야 하지만 글씨도 훌륭해야 하는 법, 그래서 글씨 잘 쓰는 사람과 조를 이뤄 대리시험을 쳐 주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소설은 곧 현실의 반영 아니겠는가.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직전, 1636년 7월 9일에 용궁(龍宮)에서 있을 과거시험을 위해 예안현의 유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광계의 막내동생 김광악(金光岳), 아들 김렴(金�), 조카 김려, 삼종제 김광수(金光遂), 그리고 재종숙 김령(金坽)의 아들들, 금씨 집안 사람들도 모두 7월 초에 과거시험장을 향해 떠났다.
시험 전 컨디션을 조절해야 했기 때문에 다들 과거 시험장에서 가까운 곳에 묵을 곳을 정하였는데, 한 집에 10명 넘게 기거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서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서로 예민한 마당에 거동도 불편하였다.
그런데 이 때 마침 안동과 예천, 그리고 예안 출신자들은 과거를 보는 데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불거졌다. 이유는 향교에서 절도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과장(科場)에서 이곳 출신들을 내쫓느니 마느니 하며 소란이 벌어졌고, 시제(試題)도 도합 10번 넘게 바뀌어서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시제가 정해져서 과거를 보는 유생들은 밤새도록 글을 지어 동이 틀 무렵에서야 제출했다.
과거가 끝나고 피곤한 유생들이 종이 끄는 말에 타고 비로소 예안현으로 돌아오자 이번 향시의 급제자 명단과 함께 이번 시험에서 저질러진 각종 비리와 부정행위가 소문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이번 향시에서 예안현 출신으로 급제한 사람은 김광계의 조카 김려, 아들 김렴, 삼종제 김광수였으며, 진사시에서는 금시문(琴是文)이 합격하였다. 사실 예안에서 합격한 사람보다는 영천, 예천, 감천 사람들이 가장 많았는데, 이 때 과장 밖에서 은밀하게 지은 글을 과장 안으로 들여 친한 사람이 합격하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글을 들인 사람들은 이상언(李尙彦), 이개한(李開漢), 정기종(鄭起宗), 이산한(李山漢) 등이었다고 소문이 파다하였다.
진사시의 수석인 금시양은 평소 그 학문이 깊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파다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합격을 비웃었다. 또한 생원시의 수석인 상주 출신 김중황(金重黃)은 애초에 글을 알지 못하여 이산한이 몰래 글을 지어 들여 주었다고 하였다.
이산한의 수법은 과장 안에 미리 들어와 대나무 숲에 숨었다가 글을 전하는 것이었다. 또한 급제자 총 50명 중에서 급제를 한 사람들은 보통 부(賦)에서 뽑힌 사람들이었고, 오직 시(詩)에서는 4명만 뽑혀 그 평가 기준 역시도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병자호란 직전의 향시는 부정행위로 얼룩져 있었다.
<매원일기>
병자년(1636, 인조14)-김광계 56세
7월 6일 무신
상서를 외웠다. 이직이 용궁 시험장에 갔다. 입추立秋 칠월절七月節이다.
六日. 戊申. 誦書. 以直往龍宮試所. 立秋七月節.
7월 13일 을묘
상서를 외웠다. 비가 내렸다.
○ 광진이 와서 용궁 시험장의 일을 말해주었다.
十三日. 乙卯. 誦書. 雨. ○ 光進來言場屋事.
7월 14일 병진
날씨가 매우 뜨겁다. 이직이 용궁 시험장에서 왔다.
十四日. 丙辰. 日氣甚熱. 以直自試所來.
7월 18일 경신
몸의 병이 어제와 같다.
해가 저물어서 방 소식을 들었는데, 우리 동네의 려礪⋅염 및 맹견孟堅이 합격하고, 금시양琴是養은 진사 시험에서 장원을 하였다고 한다.
十八日. 庚申. 身病如昨. 日暮聞榜, 此洞礪�及孟堅得參, 琴是養爲進試魁.
<계암일록>
김령(김광계의 재종숙) 60세
7월 2일
흐림. 시험 장소의 묵을 집을 차지하는 것이 이미 늦은 것 같아서 비로소 아이들에게 하루 반쯤 먼저 가도록 계획을 세우게 해서, 둘째 아이와 셋째 아이가 길을 떠났다. 광철光鐵 무리도 오늘 길을 떠났다. 예안 현감의 편지를 보니, 용보龍甫에 관한 일로 감사에게 도모하고자 하였다. 형편상 말로 사례하지 못할 것이 있어서, 편지를 쓰고 또 큰아이를 보내 사리를 개진하게 하였다.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7월 3일
흐림. 날씨가 매우 서늘한 것이 마치 가을과 같았으니, 이 역시 이상 기후이다. 시험 장소가 멀지 않아서 비록 글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하더라도 대신 지을 사람을 구하여 요행을 바라고 마치 시장에 가는 것처럼 시험 장소로 몰려갔다. 이는 참으로 큰 폐단이다.
7월 4일
맑음. 큰아이가 시험 장소로 갈 채비를 꾸려 밥을 먹은 뒤에 막내아우와 함께 길을 떠났다. 캄캄해져서 어린 남노南奴가 용궁에서 돌아와 둘째 아이의 편지를 보았다. 어제 오시에 용궁에 도착하였고 묵을 곳은 현 근처의 집으로 정했는데, 기거하는 자가 10여 명에 이르러 매우 불편하다고 하였다.
예천에서는 지금까지도 이홍경李弘經을 처벌하지 않았고, 안동에서는 김임金恁의 노력으로 겨우 정칙鄭侙을 처벌하였으나, 너무도 느슨하고 늦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읍을 정거停擧해야 한다는 설이 자못 성행하였다. 그리고 녹명관錄名官에 황산 찰방 조정융曺挺融이 임명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선현을 헐뜯고 배척한 자가 어떻게 많은 선비들을 대할 수 있으며, 선비들도 어찌 그에게 녹명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경시관京試官은 홍류洪霤이고, 성산 수령 이시만李時萬, 합천 수령 김효달金孝達이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는데, 홍류와 김효달은 모두 사람들이 마음에 차지 않아했다.
유백증兪伯曾, 이성구李聖求, 홍립洪雴, 이경의李景義, 홍서洪恕 등이 이 군위李軍威(이찬李燦)를 천거하였는데, 그 천거한 제목에 혹은 몸가짐이 방정하다고 하고, 혹은 덕행이 있다고 하고, 혹은 학술이 있다고 하였다. 대개 지난달 전교에서 3품 이상으로 하여금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였는데, 그 추천한 제목의 내용은 모두 전교 안에 기재된 것이다. 김수현金壽賢이 이환李煥을 천거하면서, 그 제목에 “강포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과감하다.”라고 하였으니, 가소롭다.
7월 7일
맑다가 흐렸다. 방잠 가묘와 함창 가묘에 전을 올리는 것을 비복으로 하여금 행하게 했는데, 아이들이 모두 밖에 나가서 형세상 그렇게 한 것이다. 가묘에는 집사람이 전을 올렸는데, 시절 음식으로 소맥小麥을 올렸다.
오시에 의현義賢이 용궁에서 돌아와 아이들의 편지를 보았다. 녹명관은 웅천熊川 수령 박사성朴思誠이었다. 안동과 예천 두 고을은 합쳐서 정거停擧해야 한다는 설이 매우 분분하였고, 예안도 그 속에 포함되었는데, 향교에서 발생한 절도사건 때문이었다. 비록 그러하지만, 일이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지난달 23일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이 군위李軍威가 또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었는데 종부시의 고인雇人이 왔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회무朴檜茂와 김시민金時敏이 모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고, 권환權寏은 장릉 직장章陵直長이 되었는데, 권환은 처음으로 벼슬에 오른 것이다. 김희맹金希孟과 권태정權泰精은 모두 감역을 추천하는 데 포함되었고, 나무송羅茂松은 특지特旨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는데 일찍이 상소하였기 때문이었다. 여러 주州의 제독提督을 교양관敎養官으로 바꾸었는데, 호칭을 바꾼들 일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가소롭다. 이는 모두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한 일이었다.
오후에 이실이 들렀다. 오후 늦게 잠시 비가 내리다가 그쳤다. 가뭄이 오래됨에 따라 타들어가고 말라서 비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밤중에 크게 비가 쏟아졌다.
○ 홍익한洪翼漢이 바로 홍류洪霤이다. 이귀李貴와 시인時人들에게 계집종처럼 무릎을 꿇고 사내종의 낯빛을 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지만, 여전히 청요직淸要職에 의망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지난해에 성혼成渾과 이이李珥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의론이 있었을 때 홍익한이 담당하여 온힘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비로소 장령에 제수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우리 도의 시관試官이 되기를 구한 것이다. 이시만李時萬은 본래 서인西人인데, 일찍이 강백구姜伯久(강학년姜鶴年)와 류계화柳季華(류진柳袗)의 일에 대해서 자못 이견을 세웠으므로, 이 때문에 탄핵을 받았다. 그렇다면 소견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과연 어떠할지 모르겠다.
7월 10일
흐리다가 갰다. 밤이 깊어서 아이들의 편지를 보았다. 어제 과장科場에서 우도右道의 사람을 내쫓아서 소란을 야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부賦는 서너 차례 시제試題를 바꾸었고 시는 일곱 차례나 시제를 바꾸어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시제를 정하였으므로, 밤새도록 글을 지어 동틀 무렵에야 제출하였다고 하였다. 향시鄕試의 누적된 폐단이 도처마다 이와 같아서, 지금은 이미 예사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7월 14일
흐림. 용궁에서 과거를 보는 날에 사사로이 과장 밖에 와서 은밀하게 지은 글을 과장 안으로 들여 친한 사람이 합격하게 하였는데, 영천과 예천 및 감천甘泉 사람이 가장 많았다. 심지어 이상언李尙彦, 이개한李開漢, 정기종鄭起宗, 이산한李山漢 등까지도 모두 과장 안으로 지은 글을 들이는 데 이르렀다. 말세의 이러한 버릇은 경악할 만하다고 하겠다.
7월 18일
맑음. 예안 현감이 우도右道의 녹명관에 차임되어 삼가三嘉로 향하는 길에 오시 경에 우리 집에 들러서 술 몇 잔을 마셨다.
○ 용궁의 방목榜目은 한 번 웃을 만하다. 인재를 놓친 것이 심하기가 지난해와 막상막하이다. 진사시의 수석이 금시양琴是養이니 가소롭다. 생원시의 수석은 김중황金重黃인데, 그는 상주 사람으로 글을 알지 못하여 예천의 생원 이산한李山漢이 대신 지어주었다. 이산한이 과장 안에 들어와 대나무 숲속에 숨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에서는 단지 4명만 뽑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부賦에서 뽑았다. 50명 가운데 유독 부에서만 뽑았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36년(인조 14) 7월
속오군 선발
감시(監試) 이소(二所)에서 난동이 일어나 파방
전국각지 군사체계를 점검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7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