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영해 부사의 가족을 몰살했는가
수사를 당하고 있는 범죄자가 수사관의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을 수사물에서 종종 보곤 한다. 그알의 프로파일러가 범죄자들에게 협박을 많이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으니, 현실에서도 드물지 않은 일인가보다. 마피아 영화에서도 적대관계에 있는 인물을 견제하기 위해 그 가족을 몰살하는 장면도 자주 등장하는데 정말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리고 나는 가족의 몰살이 주인공의 각성을 불러오는 설정이 참 싫다. 아무튼, 대체로 어떤 인물이나 단체와의 반목이 있을 때, 그리고 그 자신이 상당히 유의미한 인물일 때 가족이 희생될 가능성이 높은것 같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중앙정부는 점점 더 강하게 지방을 통제하게 된다. 재지사족과 지방관의 관계가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방관은 재지사족을 조정의 힘으로 억누르려 하고, 재지사족은 수령의 통제를 받지 않으려 하기에 갈등은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왔다. 지방관은 홀로 적진에 던져진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처신이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왕 앞에서도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는 선비들은 적진에서도 꼿꼿한 정신을 유지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정책을 수행하려 했을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용감하게 행동하지 않는가. 마치 십자군처럼.
영해부사로 부임해 온 류대화(柳大華)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류대화는 영해의 사족들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다. 1638년 6월, 김광계의 처남 이시명(李時明)은 그의 고을 영해에 부사로 부임해 온 류대화와 반목하다가, 관속들과 향소의 임원이 모두 도망가게 한 일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부친의 구명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 다니던 아들 이상일(李尙逸) 역시도 아버지를 두둔하는 글을 안동부에 올렸다가 옥고를 한 번 치러야 했다. 이상일의 도움 요청을 받은 김광계와 그의 재종숙 김령(金坽)은 딱히 이 사건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시명과 류대화가 모두 각각 잘못한 바가 있었고, 또 조사관을 맡은 영덕 수령이 알아서 잘 조처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김광계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상당히 큰 곤란을 겪을 뻔하였다. 성격이 불같은 김광계의 동생 김광보(金光輔)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조정 관료인 심지원(沈之源)에게 편지를 썼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영해 수령 류대화의 벼슬살이는 탐욕스럽고 비루합니다. 평생에 절친한 사람은 김령과 박중식(朴仲植)만한 사람이 없는데, 그들 모두 그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거절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일가친척을 방문했던 김령의 아들들이 전해 듣고 김령에게 전하였다. 김령은 온 몸에 소름이 돋도록 섬뜩하여 당장에 그 편지를 가로채어 보내지 못 하도록 김광계에게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6월 말엽에는 결국 이시명과 서얼 조카, 정승서 부자 등이 모두 함께 잡혀갔다. 이시명의 집안 사람들이 류대화에 대해 이를 갈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얼마 되지 않아 류대화는 7월 8일에 영해 부사직을 사퇴하였다. 류대화는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향했다. 귀향길, 류대화는 가흥(可興)을 지나다가 도적을 만났다. 류대화는 죽음을 모면하였으나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살해되어 시신이 찢겨 울타리에 걸쳐졌고, 그 처와 종들을 포함하여 죽은 자가 여섯 명이었다. 그러면서도 재물은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다만 놋그릇이 깨지고 옷가지는 찢겨 불탔다. 어느 도적이 사람만 죽이고 재물을 두고 가겠는가. 이것으로 보아 이 사건의 범인은 류대화와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인근의 사람들은 영해 읍민들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증인도, 물증도 없었다. 사건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류대화의 가족이 살해되고 열흘이 지난 뒤, 갇혀 있던 이시명은 귀양을 가기 전 잠시나마 풀려나 김광계를 방문하여 그간의 고초를 이야기하고 사례하였다.
이후 8월에도 조정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논의가 있었지만 이시명은 억울하게 말려든 것으로 결론이 났기에 귀양에서도 풀려나게 되었다. 범인을 특정짓지 못하고 사건이 일단락 된 것이다.
<매원일기>
무인년(1638, 인조16)-김광계 58세
5월 8일 경오
이상일李尙逸이 보러 왔다. 그의 아버지 이 상사李上舍가 영해 부사에게 밉보여서인데, 영해 부사 류대화柳大華가 이미 관찰사에게 이 상사를 논죄할 것을 보고하였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편지를 받아 관찰사에게 해결해 주기를 구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관찰사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빈손으로 돌아갔다.
八日 庚午 李尙逸來見. 以厥大人李上舍, 見忤於土主. 柳大華已報使論罪. 故欲受簡於諸處, 救解於方伯, 而此處絶無知方伯者, 乃空還.
6월 6일 정유
아침에 강재江齋로 왔다. 산에 비가 내리다 막 개어 강물은 맑고도 깨끗하고, 한가로이 흰 바위에 앉아 양치질하고 발을 씻고, 읊조리며 유유자적하니 꽤 맑은 운치가 있었다.
○ 회숙晦叔이 영덕으로 옮겨져 갇힌 것 때문에 이직이 오늘 새벽에 길을 나서 야성野城으로 향하였다.
六日 丁酉 朝來江齋. 山雨新晴, 江水明潔, 閑坐白石, [嗽]齒濯足, 吟嘯自如, 頗有淸致. ○ 以晦叔移囚於盈德. 以直今曉發向野城.
6월 28일 기미
학질을 앓은 뒤로부터 원기가 상하여 먹고 마실 수가 없고,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고 낮에는 쓰러져 눕고 싶으니 근심됨을 말할 수 없다.
○ 들으니 회숙晦叔이 야성野城에서 잡혀갔다하니, 놀라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二十八日 己未 自患痁後, 元氣憊敗, 不能飮食, 夜不能寐, 晝則頹然欲臥, 悶不可言. ○ 聞晦叔自野城拿去, 驚愕不知所爲.
6월 29일 경신
이직이 영양에서 와 회숙晦叔이 잡혀간 일을 또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백달伯達과 맹견孟堅 형제가 보러 왔다.
말복이다.
二十九日 庚申 以直自英陽來, 亦詳言晦叔拿去事. 伯達·孟堅兄弟來見. 末伏.
7월 17일 무인
아침에 인보仁甫를 가서 만나 보았는데, 박정朴烶 회숙晦叔⋅김주한金柱漢⋅권회경權晦卿도 왔다.
날이 저물어서 소나기가 내렸다.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十七日 戊寅 朝往見仁甫. 朴烶·晦叔·金柱漢·權晦卿亦來矣. 日暮驟雨. 至夜來.
7월 18일 기묘
인보仁甫와 회숙晦叔 등 여러 사람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광철光鐵과 요립耀立도 왔다가 곧바로 갔다.
밥을 먹은 뒤에 앓고 있는 아우를 가서 만났다.
날이 저물어서 이실而實을 가서 만났다
<계암일록>
김령(김광계의 재종숙) 62세
4월 28일
흐림. 밥을 먹은 뒤에 가비군加飛君이 오고, 이건도 와서 물에 만 밥을 먹었다.
영해의 변고는 아주 놀라운 일이다. 부사 류대화柳大華 군이 읍민과 크게 등져 마침내 품관品官 무리가 도망치게 되었는데, 이시명李時明이 그들 중에 우두머리로 있었다. 세 향소의 임원도 도망했으니, 참으로 예전에 없던 변고였다. 읍민은 “부사가 잘못이다.”라고 하고, 부사는 “읍민이 잘못이다.”라고 했는데,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류군은 강직하고 편협한 큰 병통이 있고, 읍의 풍속은 평소에 사납고 드세었으니, 위와 아래가 모두 도리를 잃은 것이다. 상주 목사 조계원趙啓遠이 혹독하게 다스려 백성들이 견딜 수 없다고 한다. 저물녘에 비가 내리다가 그쳤다. 밤중에 소나기가 아주 잘 내렸으나 그친 것이 안타깝다.
4월 29일
맑음. 영해 수령의 편지를 보았다. 온통 변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는데, 토호들이 한결같이 주창하고 여러 무리가 모두 동참하여 온 지경이 전부 텅 비었다는 이야기였다. 세 향소의 임원도 달아나서 비록 떠나고 싶어도 탈 말을 구할 길이 없다고 했다. 그 중 주창자는 이시명과 정승서鄭承緖 등이라고 하고, 또, “반드시 살해하려고 하여 살아서 돌아가는 것도 어려울 것 같다.”라고 했는데, 편지의 말이 대략 이와 같았다.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괴이하다.
영해 부사 류실백柳實伯은 지난가을에 부임하여 지금 비로소 소식을 보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아주 이름이 있었으나 점점 옛날의 지조를 잃어 사우들의 마음에 아주 차지 않게 되었다. 이제 영해 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저분하고 더럽다는 소리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금 그를 헐뜯는 말이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자기를 단속함이 한결같이 곧았다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명확하다.
또한 영해는 아주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드센 습성이 이미 고질화 되었다. 수령이 비록 형편없다 하더라도 토착민들이 온 고을에 통문을 내어 도망하도록 주창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강제로 벌을 주고, 심지어 그 집을 불 지르고 제방을 터트려 반드시 그들이 돌아와서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고, 또 포砲를 가지고 도로에서 지키면서 그들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까지 했으니, 어찌 이와 같은 변고가 있단 말인가.
5월 8일
해가 돋았으나 흐렸다. 밥을 먹은 뒤에 음산한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오니 비가 올 조짐임을 알겠다. 생질 한僩이 돌아가고 큰아이가 현에 들어가 현감에게 사례했다. 어두워져서 이상일李尙逸이 왔다. 그의 아버지가 환난을 당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는데, 매우 어리석었다. 아무렇게나 앉아서 부채질을 하면서 장유長幼의 예의를 전혀 몰랐다.
5월 10일
흐리다가 간혹 비를 부렸다. 우사雨師(비를 내리는 신)가 비를 아까워하는 것이 이 지경이 되도록 심하니 근심되고 근심된다.
예안 현감이 조보를 보냈다. 4월 27일부터 5월 2일까지였다. 무릇 오랑캐와 관련되는 일은 일체 조보에 실리지 않았고, 단지 세자 빈객 남이웅이 장차 심양에서 나온다고 하고, 그 외에는 특별하게 긴요한 사항이 없었다.
예안 현감이 내일 영양에 가서 나만갑羅萬甲을 만날 예정이다. 나만갑이 상주喪主로서 영양에서 귀양살이 하는데, 호서湖西의 전선戰船을 사적으로 사용한 일로 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상일이 변명하는 글을 감사에게 올렸다가 안동에서 갇혔는데, 그의 아버지를 출두하도록 독촉하기 위해서였다. 안동 부사가 우선 보방保放했다고 한다.
6월 1일
흐림. 아이들을 시켜 보리를 올리고 음식을 진설하게 했다. 이는 시사時祀에는 해물을 갖추지 못한 채로 지낼 수 없어서, 구해 온 어물은 사당의 참례에 쓰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예안 현감이 소식을 보냈다. 권군이 이미 돌아왔다고 답장했다. 밥을 먹은 뒤에 큰아이가 현에 들어가서 현감에게 사례했다. 오시에 갰다. 모내기는 전부 못했다. 지금이 벌써 6월인데 무엇 때문에 하늘이 이와 같이 하는지 모르겠다. 백성의 생활이 가련하다.
오후 늦게 큰아이가 돌아오고 광철과 광술이 왔다. 들으니, 이도가 심지원沈之源에게 편지를 작성하기를, “영해 수령 류대화柳大華의 벼슬살이는 탐욕스럽고 비루하다. 평생에 절친한 사람은 김 아무개 나의 자字 와 박중식朴仲植 만한 사람이 없는데, 그들이 모두 그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거절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라고 했다 한다. 듣고 나니 놀랍고 섬뜩하다. 술주정뱅이의 말이라 비록 일일이 따질 것은 못되지만 다른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을 어찌 낱낱이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을 시켜 교관 형제에게 말하여 편지를 보내지 말고 고쳐 쓰도록 했다.
6월 14일
안개가 짙게 끼었다가 맑았다. 늦게 모내기하여 뿌리를 내리려면 비가 내려야 될 것이다. 권겸이 지은 글이 이온李溫이 대작한 것이 사실이라면 경박한 짓이다. 이온이 지난번에 “시험에 응시하지 않아서 행동이 말을 돌아볼 수 없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감사 이경증이 영해의 사건에 대해 계문啓聞하기를, “이시명과 정승서鄭承緖가 난을 일으킨 읍민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이 무리는 참으로 죄를 지었으므로 마땅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류군(류대화)도 크게 도리를 잃었으니, 모두 죄를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김업金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이 흥해 군수가 되었으나 서경署經을 하지 않고 넘겼다.
국혼의 재간택에서 조석윤趙錫胤의 딸 등 처녀 네 사람을 뽑았는데, 내년 봄에 국혼의 간택을 거행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6월 29일
맑음. 날씨가 서늘한 것이 마치 한로寒露 때와 같았다. 이것도 변괴이다.
안동 부사는 부임한 처음부터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 명성과 실정이 서로 부합하지 않는 점이 열에 아홉은 되었기 때문이다. 영해의 사건 때문에 감사가 계문啓聞하여 이시명 및 정승서 부자 아들의 이름은 의호義虎이다. 와 이시명의 얼질孽姪(서얼 조카) 등이 한꺼번에 잡혀갔다. 참으로 이러한 변고가 일어날 줄 알았다. 황익청黃益淸이 주서가 되었다. 그는 성여습成汝習(성이성)의 인척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수군거렸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는 흔한 일이다.
7월 8일
맑음. 오시쯤 금람琴攬이 와서 대화하고 아이들을 시켜 저들의 처소에서 물에 만 밥을 차리게 했다.
전임 영해 수령 류대화柳大華가 가족을 이끌고 가흥可興을 지나다가 밤에 도적을 만났다. 류대화는 겨우 죽음을 모면했으나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살해되었는데, 찢어 울타리에 걸쳐 놓았다고 한다. 듣고 나니 아주 놀라운 일이다. 이때의 이러한 변고에 대해 누가 영해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겠는가? 더욱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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