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인의 혐중
요즘 사람들이 중국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을 볼 때면 명이 망하고 청이 섰을 때 조선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 같다. 근본적인 것은 만주족을 인정할 수 없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오랑캐였던 만주족이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니!
중국이 싫은 이유야 사람마다 각기 다르고 그 이유도 다양하겠지만 조선시대의 혐중이나 오늘날의 혐중은 모두 중국의 국력성장에 대한 경계심에 기반을 둔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조선 사람들도 오랑캐에 불과한 만주족이 감히 천자의 자리를 빼앗고 중원을 차지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오랑캐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조선 사람들에게 청에게 항복한 시점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는 것은 절개를 굽히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나라에서 과거를 보라고 하니까 어쩌고 하면서 꾸역꾸역 과거를 다들 보기는 하는데, 일단 합격이나 한 후에 절개 운운하는 편이 어떨까...라고 말하면 너무한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과거를 보러 온 응시자들의 속내는 그들만이 알 수 있으리라. 정말로 내키지 않는지, 아니면 이번에 장원급제해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는지.
1639년 1월 20일, 안동에서 과거시험이 있었다. 평소와 달리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유생들이 과거를 보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난 병자호란 때 항복하여 청의 연호를 쓰게 된 일 때문이었다. 이를 굴욕적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그렇다고 과거를 일부러 보지 않는 일은 또 남과 다른 행동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다들 어쩔 수 없다고 중얼거리며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과거 시험장으로 향하였다.
이번 안동 시험장을 관리하러 파견된 경시관(京試官)은 임효발(任孝發)이고, 참시관(參試官)은 상주 목사 조계원(趙啓遠)과 성주 수령 윤득열(尹得說)이었다. 과거 합격자의 자격조건을 확인하는 녹명관은 김산(金山) 수령 조정융(曺挺融)이었는데, 이 사람도 지난 관직에서 죄를 지은 바가 있어 그 사람이 응시자격을 확인하는 것 역시도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과거 응시자는 600명에 달하였다. 김광계의 재종숙 김령의 큰아들과 둘째아들도 이번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 청의 연호를 쓰는게 못마땅한 것 치고는 꽤 많은 수의 응시자가 몰린 것이다.
그 다음 달인 2월 3일에는 예천에서 소과 시험이 있었는데, 이 시험에는 김광계의 아들인 김렴도 자신의 사촌들과 과거를 보러 갔다. 이번에도 재종숙 김령의 아들들이 과거에 응시하였고, 곽씨 집안의 곽유녕(郭惟寧)이 멀리 현풍현에서 와서 김광계의 집에 머물며 과거 시험을 보았다. 이번 경시관은 임효달(任孝達)이었다.
과거 시험장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김령의 막내아들은 복통 때문에 과거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다.
2월 14일에 과거 합격자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다. 오천에서는 오직 김광계의 재종형제인 김요형(金耀亨)만 합격했다. 김요형의 아버지 김령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 보다는 이런 굴욕적인 시기의 과거에 합격한 것을 씁쓸해 하였다.(정말 씁쓸했을까?)
<매원일기>
기묘년(1639, 인조17)-김광계 59세
1월 23일 신사
상서를 외웠다. 곽유한郭維翰이 시험 장소에서 왔다. 현풍玄風 숙모가 이달 14일에 세상을 버린 것을 듣고 아우들과 함께 모여서 곡을 하였다. 방磅과 렴�이 안동에서 왔다.
○ 박 형朴兄이 내일 손녀딸의 혼인을 치를 예정이어서 가 보려다가 눈이 내리기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二十三日 辛巳 誦書. 郭生維翰自試所來. 聞玄風叔母主此月十四日捐世. 與兄弟會哭. 磅·�自安東來. ○ 朴兄以明日將醮孫女, 欲往見, 而以雨雪未果.
1월 24일 임오
곽유한 군이 그대로 머무르고 있고, 금씨琴氏 아재가 보러 왔다. 우성牛星이 영주에서 왔다.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새벽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二十四日 壬午 郭君留. 琴叔來見. 牛星自榮川來. 夜大雪到曉不止.
1월 25일 계미
상서를 외웠다. 또 눈이 내렸다.
○ 곽유한 군과 우성이 떠났다.
二十五日 癸未 誦書. 又雪. ○ 郭君及牛星去.
2월 7일 을미
아이와 조카들이 시험 장소에서 돌아왔고, 포산苞山 수재秀才 곽유녕郭惟寧도 시험 장소에서 왔다.
七日 乙未 子姪等自試所來. 苞山郭秀才惟寧亦自試所來.
2월 9일 정유
곽유녕은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 김윤金鋆⋅금호겸琴好謙⋅김옥金鋈이 보러 왔다.
九日 丁酉 郭生留. 金鋆·琴好謙·金鋈來見.
2월 10일 무술
곽유녕이 떠났다. 며느리가 돌아왔다.
十日 戊戌 郭生去. 子婦還.
2월 14일 임인
과거 합격자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오천烏川에서는 오직 김요형金耀亨만 입격했다고 하였다.
十四日 壬寅 聞榜聲, 烏川唯金耀亨得參.
<계암일록>
김령(김광계의 재종숙) 63세
1월 17일
맑았으나 추위가 심하였다. 예안 현감이 권인보權仁甫를 보기 위하여 금람琴攬의 집에 왔다가 ‘와서 보고 싶다’고 말을 전해 왔으나 병을 조리하는 데 방해가 될까 염려되어 아이들을 보내어 사양토록 하였다. 대개 아이들에게도 말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 안동 시험장에 경시관京試官은 임효발任孝發이고, 참시관參試官은 상주 목사 조계원趙啓遠과 성산星山(성주) 수령 윤득열尹得說이었다. 이때의 과거는 조금이라도 선비라고 하는 자들은 깊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도가 행해지지 않는 시절에 별다르다고 지목되는 것은 두려운 일인지라 어쩔 수 없이 무리를 따라 과거를 보러 가는데, 그 득실(합격과 불합격)은 전혀 관계치 않았다.
1월 18일
맑았으나 추위가 심하였다. 큰아이와 둘째아이가 안동 시험장으로 나아갔는데,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저물녘에 홍도형洪道亨 군이 천성川城에서 왔다. 홍군은 지난겨울에 상경하여 그 길로 서로西路(서도西道)로 갔다가 설 전에 돌아왔는데, 그 곤궁함이 가련하였다. 지금도 과거를 보러 갈 뜻은 없었는데, 어버이의 명 때문에 억지로 가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밤이 깊었다.
1월 19일
맑았으나 추위가 심하였다. 홍도형 군이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안동 시험장으로 갔다.
○ 큰아이의 편지를 보고 김산金山 수령 조정융曺挺融이 녹명관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은 지난번 찰방이었을 때, 사림에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선비가 그 앞에서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인심이 바른 도를 잃어서 뭇 사람들이 휩쓸리듯 쏠렸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통탄스럽고도 한탄스럽다. 오시에 이지以志가 오고, 김참金墋도 와서 술을 몇 잔 마시고는 저물녘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 감사監司 이경증李景曾이 박황朴潢을 보려고 감영에서 북쪽으로 올라와 영천으로 향한 뒤 또다시 나만갑羅萬甲을 보려고 영천에서 영양으로 향할 것이고, 22일에 우리 현에 당도할 것이다. 이처럼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날을 당하여 그의 사사로운 일 때문에 군과 현을 두루 다니며 온갖 폐단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의 죄를 이루 다 말할 수가 있겠는가?
1월 21일
맑음. 오시에 윤생이 돌아와서 아이들의 편지를 보았다. 어제 과거시험장에 들어온 응시자는 6백 여 명이었다고 한다. 생질 교僑는 오지 않았다는데, 이러한 때에 과거시험장에 오지 않은 것이 또한 무슨 안타까운 일이 되겠는가?
1월 23일
맑음. 둘째아이가 돌아왔는데, 이미 캄캄해지려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홍준형洪俊亨이 또 이르러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1월 26일
눈과 비가 번갈아 내리다가 오시에 그쳤다. 길을 다니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 내달 초3일에 감시監試가 열리는데, 예천이 시험장소이다. 떳떳한 도리가 무너지고 없어졌으며 우주가 어둡고 막혔으니, 이 어떠한 때인가?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과거 보는 것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일이 무도한 것이 이미 극에 다다랐으나 지목받는 것은 두려운 일인지라 어쩔 수 없이 무리들을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면해야 할 것이다. 이미 안동 시험장에 갔었고 앞으로 예천 시험장으로 갈 것인데, 모두 그만두어야 하지만 억지로 하는 것이다. 어찌 일일이 다 말할 수 있겠는가?
1월 29일
맑음. 밥을 먹은 뒤에 둘째와 셋째 두 아이가 예천 시험장으로 갔는데, 다만 물결을 따라 무리 속에 뒤섞이기 위한 것으로 실제로는 원하는 바가 아니다. 밝음은 속일 수 없으나 억지로 지어 행하는 것이다. 혼탁한 세상에는 자신의 뜻대로만 할 수 없는 것이 대개 이와 같다.
1월 30일
다소 흐렸다. 큰아이와 막내 아이 둘이 예천 시험장으로 갔다. 나의 병 때문에 더욱 가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억지로 가도록 하였다.
○ 경시관京試官 임술지任述之 군이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 여염집에서 끼니를 잇기 어려워 모두 쌀겨로 죽을 쑤어 먹는다고 하니, 차마 듣지 못하겠다.
2월 6일
맑음. 쌓인 눈이 여전히 많았는데, 해가 뜨자 처마에서 눈 녹은 물이 빗물처럼 떨어졌다. 오후 늦게 한僩이 영천에서 왔다. 얼마 있다가 막내아이가 돌아와서 아이들의 편지를 보았다. 셋째아이가 어젯밤 과거시험장에서 배탈이 나서 큰아이와 둘째아이가 좀 더 머무르면서 간호를 한 다음 좀 편안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돌아올 것인데, 둘째아이는 셋째아이와 함께 오고 큰아이는 용궁龍宮으로 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먼저 막내아이를 보내어 내일 제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소식을 듣고 보니 몹시 염려스럽다. 큰 눈이 이토록 내렸으니, 애초에 과거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2월 13일
맑음. 오시쯤에 이지以志가 왔다. 얼마 있다가 이실而實이 또 이르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을 몇 잔 마시고는 저물녘이 되어서 돌아갔다.
2월 14일
맑음. 밥을 먹을 때 향교의 사람이 방목榜目을 가지고 왔는데, 큰아이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대개 그저께 늦게 방이 붙었던 것이다. 요즘의 과거는 합격 여부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다만 무리들을 따라 과거를 봄으로써 남들과 별달리 보이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는데, 또한 합격하기까지 하였으니 가소롭다. 오시에 김당金塘·김참金墋이 오고, 류시원柳時元도 들렀다.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39년(인조 17) 1~2월
전국적으로 전염병, 기근 발생
청에 보낼 세폐 논의
심양에서 역관을 무고한 정뇌경 처리 문제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7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