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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으로만 들은 전쟁

by 소주인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도륙당하는 백성들과 약탈당하는 민가의 모습이 처참하게 그려진다. 왕도 남한산성에 들어가 버리고, 그 와중에 전국 곳곳에서는 전투가 벌어져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조선후기 한문소설에는 선각자가 등장하여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고자 그들을 깊은 산중이나 섬으로 데려가 마을을 새로 꾸려주고 살게 한다. 그리고서는 나중에 멀리서 전쟁에 휩쓸린 속세의 사람들을 바라본다는 설정이 간간히 등장한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곳이 곧 길지라는 인식이 생길만한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병자호란의 충격은 사회 전체 시스템을 뒤흔들어 놓았다.



김광계가 살고 있었던 예안은 실로 길지라 할 만한 곳이었던 것 같다. 김광계는 소문으로만 병자호란에 대해 듣는다. 병자호란 소식을 전한 것은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피란민들이었다. 가족을 살해당했다는 사람들 앞에서 김광계도 충격을 받았겠지만 과연 피부로 와 닿는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1637년 4월에도 아직 병자호란의 혼란이 진정되지 않아서 예안현에는 서울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4월 4일에는 이경선(李慶先)이 김광계와 김령(金坽)의 집에 각각 들렀다. 이경선은 이응진(李應進)의 손자로, 이응진은 김령의 부친 김부륜과 퇴계 이황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경선은 서울에 살다가 전란을 맞이하여 봉화로 난을 피했는데, 이번에는 예안에 있는 도산서원 사당에 왔다가 김령과 김광계에게 인사차 찾아온 것이었다.


김령은 병을 무릅쓰고 이경선에게 인사하고, 아들들을 시켜 사랑채에서 술과 밥을 대접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경선이 오래 머물러 있기에는 편치 않았던 것 같다. 이경선은 김령의 집을 나와 김광계의 집으로 갔다. 어느덧 저물녘이었다. 그는 먼저 김광계의 아들 김렴(金�)을 만나, 그의 안내를 받아 김광계를 만났다. 한창 <상서>를 베껴 쓰고 있던 김광계는 이경선을 환대하며, 함께 데리고 자며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환대 덕인지 이경선은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예안에 편지를 간혹 쓰게 되었다. 4월 23일에 김령의 집으로 보내온 편지에는 명·청간의 전투에 대한 소식이 쓰여 있었다. 인조의 항복 후, 청은 가도(椵島 : 평안북도의 서해안에 있는 섬)에 주둔한 명을 치기 위해 1637년 2월에 병력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 수군장(水軍將)이 임경업(林慶業)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봉에 서기를 주저하였으며 은밀히 명나라 도독 심세괴(沈世魁)와 내통하여 명군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였다.


4월 8일에는 결국 표면적으로는 청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임경업이 청군 장수 마부대(혹은 마부달馬夫達)과 함께 출전하여 가도의 동쪽과 서쪽 방면을 협공하였다. 이에 명나라 사람들이 몰살되었고, 시신이 바다를 덮어 배가 다니는 데 방해가 될 정도였다. 남은 천여 명의 명나라 사람들은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항전하였는데, 청의 8왕자 홍타이지가 격문을 띄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결국 그들을 이끄는 심세괴도 전사하였다고 하였다. 예안 사람들은 이경선이 보내온 이 소식을 듣고 명의 몰락을 절감하게 되었다.


1637년 윤4월 29일, 청의 흥성함과 명의 몰락은 도가 땅에 떨어진 일이라 생각하며 주자대전을 읽고 있던 김광계에게 갑자기 박자경(朴子敬)과 윤시우(尹時遇)가 찾아왔다. 김확(金確)과 금씨 아재도 뒤따라 김광계를 부르며 왔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고 책을 치우며 묻자, 명나라 군사들이 곧 바닷길을 따라 조선에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고 다들 말하였다.


듣자 하니 명의 진 도독(陳都督)이 조선 조정에 표문을 보내 유시하기를, “흠명 제독 편선 행사 괘 평로 장군 인 총병관 태자 소사 중군 도독부 좌도독(欽命提督便宣行事掛平虜將軍印摠兵管太子少師中軍都督府左都督)은 동일한 원수를 가진 조선을 분발시켜서 적노(賊虜)를 토멸하는 일로 표문을 보냅니다. 역도들이 감히 날뛰어 귀국을 유린하였는데 다만 힘이 약하여 지탱하기 어려워 겉으로는 순종하였지만 속으로 거역하였던 것이니, 한가닥 명 조정을 향한 충의만은 진실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방어사 임경업(林慶業)이 있는데 경업은 재질과 지모가 매우 장하고 겸하여 충성과 용기도 넉넉하여 진실로 간성(干城)으로 의지할 수 있으며 보장(保障)으로 믿을 만하니, 즉시 본관을 총병직으로 승격시켜 원래 관직의 사무를 관리하게 하여 맹세코 적을 섬멸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가도 전투에서 명이 패한 것은 오랑캐가 저지른 일이니 조선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때 명군을 이끌고 있는 것은 진 도독과 조 총병(祖摠兵), 소 총병(蕭摠兵) 등이었는데, 이들은 요동반도와 조선 사이의 여러 섬에 흩어져 주둔하였다. 장수의 수는 천 명이고 군사가 20만이라 전해졌다. 또한 그들 중 4만 명이 한양에 들어오겠다고 했다는 소문이 전해져 다들 듣고 놀라서 김광계에게도 알려주러 온 것이다.


이 때 조정에서는 진 도독의 표문을 모두 믿을 수 없고, 일종의 허장성세일지도 모른다고 하여 국경에 답서를 비치해 두자고 하였다. 그리고 답서에는 “조선은 이미 명을 위해 청과의 화친을 배척하다가 전 국토가 노략질 당하고 두 왕자가 심양에 끌려갔으니 국왕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이러한 표문이 오간 것을 청이 알게 되면 다시금 큰 일이 날 수 있으니 더 이상 우리가 전란을 입지 않게 하라”는 내용을 적게 하였다는 이야기에 이르자, 이에 대해 모여 앉은 예안사람들은 조정 신료들이 어찌 대처해야 할 줄 모르고 황망해하기만 한다고 한탄하였다. 하지만 전란을 피부로 겪지 않은 사람들의 한탄이니, 무슨 영양가가 있겠는가.




<매원일기>


정축년(1637, 인조15)-김광계 57세


4월 4일 계유

상서를 베껴 썼다. 해가 저물어서 염�이 수재 이경선李慶先과 함께 왔는데, 이군은 곧 이응진李應進의 손자이다. 이공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일부러 와서 방문하였기에 같이 자면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 밥을 먹은 뒤에 서쪽 산기슭을 구경하였는데, 자줏빛과 붉은색 꽃 천만 송이가 밝게 비치어 사랑할 만하였다.

四日. 癸酉. 寫書. 日暮�與李秀才慶先來, 李君乃李應進之孫. 李公受業於溪門云. 委來相訪, 同宿接話至夜深. ○ 食後遊西麓, 萬紫千紅照耀可愛.


4월 5일 갑술

뒤따라가 침락정枕洛亭에서 환송하였는데, 이도以道도 오천에서 와 모였다. 강사의 마루에 열을 지어 앉아 술을 몇 순배 마셨다. 다시 강을 건너 이실서당에 들어가니 경익景益이 또 술을 가져오고, 이실도 술을 가져오게 하여 서로 권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염�이 이군과 함께 역동서원으로 가고 나는 이도와 함께 정지서당에서 잤다.

○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어 경치가 날로 새로워지니, 신록이 서로 비치고 떨어진 꽃잎이 뜰에 가득하다.

五日. 甲戌. 追送于枕洛, 以道亦自烏川來會, 列坐江軒, 酌數巡. 還渡江入而實書堂, 景益亦持酒來, 而實亦命酒相屬. 日暮�與李君往易院, 余與以道, 宿定止書堂. ○ 春夏之交, 景物日新, 新綠交暎, 落花滿庭.


윤4월 29일 정묘

주자대전을 읽었다. 박자경朴子敬과 윤시우尹時遇가 찾아오고, 이실而實과 금씨 아재도 왔다. 황혼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강어단알彊圉單閼이다.

二十九日 丁卯 大全. 朴子敬⋅尹時遇歷訪, 而實⋅琴叔亦來. 黃昏返家. 彊圉單閼



<계암일록>

김령(김광계의 재종숙) 61세


4월 4일

맑음. 밥을 먹은 뒤에 서울 손님 이경선李慶先이 들렀다. 아이들에게 사랑채에서 접대하게 했는데, 이미 술을 마시고 또 밥을 먹었다. 이경선의 조부 이름은 응진應進으로, 나의 선친先親(김부륜)과 동문수학한 친구이다. 이경선이 봉화로 난을 피했는데, 도산서원 사당에 알묘하러 왔다가 서원 주변에 역질이 있어서 하지 못하였다. 내가 병을 무릅쓰고 잠시 만나보았다. 이경선은 이어 운암에 가서 원장 이지以志를 방문하였다. ­이하 원문이 빠짐­


4월 23일

맑고 바람이 불었다. 깜깜한 저녁에 돌아왔다. 이 형의 편지를 보니, “임경업과 류림柳琳의 무리가 김여량金汝良을 선봉으로 삼아 이달 초 8일에 오랑캐 장수 마부대 등과 함께 가도 서쪽 방면을 습격했습니다. 오랑캐 군사와 함께 동쪽과 서쪽에서 협공하여 한인漢人 남녀노소를 모조리 죽였는데, 떠다니는 시체가 바다를 덮는 바람에 배가 다니는 데 방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인이 한쪽 가에서 40여 척의 배를 타고 바다로 달아났고, 천여 명은 높은 봉우리에 올라갔는데, 오랑캐 장수 제8왕자八王子(홍타이지)가 자주 격문을 띄워 항복을 권유했으나, 듣지 않고 고전苦戰하다가 모두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후부터는 짐승만도 못하게 되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전임 감사가 잡혀갔는데,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의 일 때문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두 감사는 으레 이처럼 되는 법이다. 신임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가까운 날에 부임할 것이라고 한다. 최명길崔鳴吉은 우의정 겸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영의정에는 김류金瑬, 좌의정에는 이성구李聖求가 되었다. 나라를 그르치고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모두 최명길 때문이고, 김류 역시 용렬하고 비루하여 말할 것도 없다.


윤4월 28일

흐림 명나라 군사들이 바닷길을 따라 크게 들이닥쳐 먼저 글로 우리나라 백성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평도平島의 패배는 오랑캐 적이 저지른 짓이니, 너희가 어찌 알겠느냐?”라고 하였다. 대개 좋은 마음으로 관대하게 위로한 것이다. 진 도독陳都督과 조 총병祖摠兵, 소 총병蕭摠兵 등 여러 장수가 각각 군사를 이끌고 여러 섬에 주둔하였다. 전투하는 장수가 천 명이고, 군사가 20만 명이다.


윤4월 29일

흐림. 듣건대, 명나라 군사 4만 명이 장차 한양에 들어온다는데, 패문牌文이 이미 도착하자, 도성 안이 흉흉하여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대가大駕를 남쪽으로 피난시키자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심양에 위급한 상황을 알리자고 하였다. 세상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37년(인조 15) 4월

신하들이 벼슬하기를 거부함

쌍령과 험천에 쌓인 시체를 매정하고 제사함

가도에서 버티던 심세괴 등 명군 패배

광해군의 유배지를 제주로 옮김



참고: 명청 전쟁과 명의 멸망

명은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 세력의 저지를 위해 누르하치가 세운 요새가 있는 사르후로 토벌군을 보냈으나 패배하고 만다. 사르후와 자이판은 농경지대인 요양, 심양을 점령하는 데 필요한 거점이었다. 이곳을 지켜낸 누르하치는 그 기세를 몰아 요양과 심양을 공격하고 요하 동쪽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리고 1621년 4월, 수도를 요양으로 옮겼다.

그러나 새로운 토벌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던 명은 대신 요서지역의 방어를 굳히는 데 힘썼다. 이 중 영원성(寧遠城)을 지키던 원숭한(袁崇煥)은 서양식 대포를 차용한 홍이포(紅夷砲)를 성에 배치하는 등 후금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비하였다. 하지만 명 정부는 만리장성 이북의 모든 수비군을 산해관(山海關) 안쪽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원숭한은 항명하고 자신의 휘하 1만명과 함께 영원성에 머물렀다. 누르하치는 이 소식을 듣고 1626년 영원성으로 10만명의 군대를 진격하였으나 새로운 화포의 활약으로 누르하치까지 전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8왕자 홍타이지가 후금의 칸이 되었다.

홍타이지는 한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 그들을 회유하였고, 자신의 세력을 탄탄히 하려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동반도와 조선의 도서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모문룡(毛文龍)등의 명군과 조선을 회유하거나 제거해야 했다. 1623년 반정을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명청 교체기라는 복잡한 시기에 대처해야 했다. 명은 인조가 왕위찬탈을 했으므로 퇴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인조는 모문룡의 경제적 편의를 봐 주는 조건으로 결국 명의 책봉을 받아낼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이에 후금 내부의 사정도 정리하고 외부의 위협도 제거하기 위해 조선으로 장수들을 보냈다. 1627년 3만명의 후금군이 조선을 침공하자, 이괄의 난 등으로 북방이 약해져 있던 조선은 의주와 정주를 함락당하였다. 하지만 후금의 후방에 대한 염려로 인해 후금은 조선과 재빨리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조건은 조선이 명의 연호를 쓰지 않을 것,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등이었다.

이후 홍타이지는 후금 내부의 안정을 위해 한인의 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곧 명의 약화를 의미했다. 1629년 홍타이지는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을 포위하였다. 영원성의 원숭환이 후금군의 북경 공격을 막아내기는 했으나, 명 조정의 혼란은 계속되어 결국 원숭환이 처형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1636년 후금에서 국호를 개칭한 청은 홍이포를 만드는 기술을 얻게 되고, 모문룡의 해상전력을 거의 모두 흡수하였다. 동시에 몽골과의 혼인동맹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후방에 대한 염려를 덜었다.

이후 청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에 군신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인조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청태종은 1636년 겨울 10만명을 이끌고 친히 조선으로 출병하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고, 산성 밖과 연락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직적 군사대응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성 밖의 관군은 전투에서 각개격파되었고, 결국 인조는 성 밖으로 나와 삼전도에 있던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억지로 끊게 되었고, 명 역시 지속된 전란과 1637년 봄의 가뭄까지 겹쳐 사회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 결국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중 섬서(陝西)지방에서 일어난 이자성(李自成)은 여러 지방의 반란군을 규합하여 관군을 격파하였다. 이자성군은 1644년 북경에 들어서게 되는데,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가족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이로써 명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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