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도 적용 가능한 이야기이다. 전쟁이 나면 군인보다는 민간인이, 그 중에서도 여성과 아이가 훨씬 더 많이 희생된다고 한다. 병자호란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때 만들어진 미담 중에 남편이나 시부모를 감싸다가 죽은 여성 이야기가 가끔 보이는데, 진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차라리 죽었으면 열녀로 기려졌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른바 환항녀라는 굴레를 쓰고 사회에서 철저히 버려졌던 여성들의 비참한 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겪은 채 도성으로 귀환한 조선 조정은 전쟁 사후 처리에 골몰한다. 예안에도 이와 관련한 소식이 전해졌다. 1637년 5월 9일, 주자대전을 읽고 있던 김광계는 여러 손님을 맞이했다. 벗 금발(琴撥)의 아들 금호겸(琴好謙), 재종질 김확(金確)의 아들인 김익중(金益重)과 김확의 사위 성이염(成以恬)과종형제 김광술(金光述)이 우르르 김광계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 날 서울에서 병자호란의 전후처리와 관련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지난 4월 16일에 인조가 모화관으로 나아가 남한산성을 지킨 병졸에게 술과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이 때 시정의 백성들이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가에서 통곡하였다. 전란으로 부모와 처자를 모두 잃고 이에 대해 호소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때 어가가 궁궐을 나간 뒤, 유성이 명정전(明政殿)앞에 떨어졌다. 또한 명나라의 20만명의 군사가 한성으로 들어온다는 소문 도성이 흉흉하다고 하였다.
항복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다들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왕이 항복할 때 청 장수 용골대 등이 홍타이지에게 간언하기를, 이미 서로 화친하게 되었으니 서로 사로잡은 포로들은 돌려주자고 하였으며 또한 조선이 명을 따른 지 오래되었으니 명의 잔당을 칠 때 조선의 병사들이 명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이에 홍타이지는 청이 요구한 내용을 조선이 이미 잘 따르고 있으므로 조선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염려라고 용골대 등의 장수를 달랬다고 한다. 이야기가 이에 이르자 자리에 모인 김광계 등 여러 사람은 청이 의외로 의리를 알고 있음에 감탄하였고, 한편으로는 조선 조정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누구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나흘이 지나 5월 13일에는 서울에서 약장수 이양일(李陽一)이 왔다. 그는 생생한 서울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지난 4월 16일에 모화관에 인조가 갈 때 길가에서 백성들이 울며 “우의정 최명길을 청에 보내어 사로잡힌 남자와 부녀자들을 속환시켜 달라”라고 애걸하였는데, 인조는 빠르게 가기를 재촉하여 듣지 않고 갔다고 하였다.
또, 5월 16일에 의병에게 쓰인 의량목을 세러 향교에 나간 김광계는(김광계도 의병활동을 지원했었다) 신효남(申孝男)⋅윤욱(尹煜)⋅김시만(金時萬) 등에게 또 다른 소식을 들었다. 지난번 명나라 군대가 주둔해 있던 가도(椵島 : 평안북도의 서해안에 있는 섬)가 청군에 의해 함락될 때 명의 장수 30여 명이 모두 사로잡혔는데, 이 때 청군이 모두를 항복시키려고 한 명을 참수하여 협박하였으나 단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한편, 의병장 전식(全湜)이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사실상 그는 조령을 넘다가 적군이 괴산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한 자였다. 그렇기에 그가 당상관이 되어다는 소식은 모두에게 쓴웃음을 짓게 하는 소식이었다.
5월 26일, 전날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아침부터 아우 및 조카들과 함께 음복을 하고 있던 김광계에게 김시익(金時翼)이 찾아왔다. 김시익은 김광계에게 오기 전에 김령(金坽)에게 먼저 들러 온 터였다. 그는 전란의 여파로 아직 안정되지 않은 서울 소식을 가지고 왔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서울의 양반들 중 한 명도 집이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서울의 대다수의 집은 전란으로 불타고 허물어져 사족 뿐 아니라 민가의 피해도 막심했다. 조밀하게 붙어 있는 집들 중 한 채에만 불이 나도 곧 근처의 모든 집에 불이 쉽게 번지는 것도 문제였고, 모든 건물이 거의 목재로만 되어 있는 것도 피해를 가중시켰다. 건물의 피해도 참혹했거니와, 사람이 상한 것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강화도로 분조한 세자를 따라 도망간 사람이든,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사람이든 가족 모두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때 사족의 부인들 중 청군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천만 다행으로 스스로 도망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정조를 의심하여 그녀들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거리를 떠돌다가 조선인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에서 알고 강간범들을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여 강간범들은 처벌을 피하게 되었다.
그나마 청군이 밀려 내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곧바로 남쪽으로 피난을 간 사람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또한 비록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남한산성에서 왕을 수행한 자들은 당상관(堂上官)인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그 수는 200여명에 달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수비한 군졸들도 모두 수령이 되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렇듯 나라가 맞은 위기는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의 약자이자 대다수를 이루는 힘없는 농민들과, 일종의 특권층이었던 사족이라 할지라도 그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그들의 인생을 무참히 짓밟히게 되었다.
<매원일기>
정축년(1637, 인조15)-김광계 57세
5월 9일 병자
<주자대전>을 읽었다.
○ 금호겸琴好謙⋅성이염成以恬⋅김익중金益重⋅김광술金光述 형제가 보러 왔다.
九日 丙子 大全. ○ 琴好謙·成以恬·金益重·金光述兄弟來見.
5월 13일 경진
서울에 사는 약장사 이양일李陽一이 어제 와서 머물며 잤다. 동네 사람 및 금호겸 등 여러 사람이 많이 와서 중국 한약재를 샀다. 오늘은 손님을 맞아들여 대접하는 일로 일과를 접었다.
○ 밤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까지 내렸다.
十三日 庚辰 京中藥商李陽一昨日來, 留宿. 洞人琴好謙諸人多來貿唐材. 是日以應接, 輟課. ○ 夜雨至朝.
5월 16일 계미
이실而實과 함께 향교에 들어가서 의량목義粮木을 세어 보았다. 신효남申孝男⋅윤욱尹煜⋅김시만金時萬 등 여러 사람이 와 모였다. 나는 그길로 도산서원으로 갔는데, 신 유사申有司는 벌써 와 있었다.
소서小暑 유월절六月節이다.
十六日 癸未 與而實入校中, 計數義粮木. 申孝男·尹煜·金時萬諸人來會. 余仍徃山院, 申有司已來矣. 小暑六月節.
5월 26일 계사
아침에 비가 내려서 저녁에 갰다.
○ <주자대전>을 읽었다. 아침에 아우 및 조카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 흠경欽卿이 보러 와 김 참판金參判이 벌써 돌아갔다고 한다.
二十六日 癸巳 朝雨晩晴. ○ 大全. 朝與弟姪輩, 酌酒叙[話]. ○ 欽卿來見云, 金參判已還.
<계암일록>
김령(김관계의 재종숙) 61세
5월 9일
흐림. 지난달 16일에 대가大駕가 모화관慕華館으로 나가서 남한산성을 지킨 병졸을 호궤犒饋했는데, 시정의 남은 백성이 길가에 늘어서서 통곡하였다. 대개 부모와 처자식을 모두 잃고, 그 잘못을 나라에 돌린 것이다. 대가가 궁궐을 나간 뒤에 천화天火가 명정전明政殿 앞에 떨어졌다. 그 빛은 빛나고 환하며 떨어진 소리는 수 백리까지 들렸다. 그것을 보니 돌로 변해 있었는데, 무거워서 500명으로도 들 수가 없었다. 대개 천구성天狗星(유성의 일종)이다. 변괴가 심하다. 명나라의 40만 군사가 온다고 하는데, 대략 20만 명이라고 한다.
○ 애초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약속할 때 오랑캐 장수 용골대 등이 사사로이 서로 말하기를 “이미 화친이라고 하면 사로잡힌 남녀를 돌려주는 것이 좋고, 또 조선은 신하로 명나라를 섬긴 지 수백 년이 되었으니, 가도를 공격하고 명나라 조정을 공격하는 등의 일은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공유덕孔惟德·경중명耿中明 등의 여러 적도 모두 “그렇다.”라고 하였다.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할 때 호서胡書에 쓰인 조목에 대해 하나하나 모두 따랐다. 그러자 오랑캐 칸이 용골대 등에게 말하기를 “저들이 모두 따르고 있으니, 너희가 참으로 지나치게 염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오랑캐 역시 의리를 알건만, 온 조정에 삼정승과 육조판서 중에 한 사람도 이것을 언급하는 자가 없으니, 통탄스럽다. 상놈의 무리도 분통을 터트릴 것이다.
5월 13일
비가 내렸다. 아침에 약을 파는 사람 이양일李養一이 왔다. 그를 통해 들으니, 모화관에서 군사를 호궤할 적에 도성 백성이 대가 앞에서 통곡하며 “우의정 최명길을 오랑캐에게 보내어 사로잡힌 남자와 부녀자들을 속환贖還 시켜 달라.”고 애걸했는데, 주상이 빠르게 달려서 듣지 않고 지나갔다고 한다.
5월 16일
맑음. 여헌(장현광)이 봄에 변란을 겪은 뒤로부터 곧장 집을 버리고 들어가지 않으며 의성 등지를 거쳐서 지금 영천 경계에 들어갔다. 깊은 골짜기가 험난하고 인적이 통하지 않아서 참으로 별천지였다. 대개 변고가 극심하여 차마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세상을 떠나 속세를 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에 재상을 추천하는 데에 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장응일張應一이 종을 가두고 출두하라는 독촉을 받고는 부득이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막 오랑캐에게 보낼 표表를 짓고 있었는데, 서울 사람으로서 괴원槐院(승문원)의 관원이 된 자가 기미를 알고 미리 피하려고 했으나, 장응일 군은 졸지에 피할 수 없게 되어, 문서를 가지고 최명길의 처소에 왕복하였다. 분한 마음이 비록 극에 이르렀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좌의정 이성구李聖求가 사은사로 가고, 대제학 이식李植은 표를 지었는데, 표에 “덕은 천지와 합하고 밝음은 일월과 나란하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최명길은 차마 말할 것도 없고, 이성구도 매 한가지며, 이식은 더욱 소인이다. 주상이 오랫동안 통곡 속에 지내느라 나랏일이 모두 최명길의 손에서 나온다고 한다.
○ 가도가 함락될 때 명나라의 장수 30여 명이 모두 사로잡혔다. 오랑캐가 그들을 항복시키려고 한 사람을 참수하여 협박했으나,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명나라 사람이 가상하고 가상하다.
○ 전식全湜이 2월 10일 뒤에 서울로 올라가서 이조 참의가 되었는데, 지금 승진하여 이조 참판이 되었다. 대개 의병장에 대한 포상 때문이다. 전식은 스스로 그 수고를 말하지만, 털끝만큼도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감사가 다만 전식의 이름을 인근 지역 의병대장에 올렸기 때문이다. 매우 가소롭다. 일찍이 의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조령을 넘다가 적이 괴산에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는 낭패하여 급히 달려 돌아왔었다.
5월 26일
흐리고 잠깐 비가 내렸다. 김시익金時翼이 왔다. 홍익한이 오랑캐 진중에서 굴복하지 않고 공사供辭를 진술했다고 한다. 귀하고 가상하다. 사람을 아는 것이 정말 쉽지 않구나! 오랑캐 장수 용골대가 힘껏 구원했다고 한다. 오랑캐에도 사람이 있구나!
○ 이번 호란에 서울의 사족 중에 한 명도 집이 완전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듣고 보니, 참혹하고 한탄스럽다. 변란 초에 곧바로 남쪽 지역으로 달아난 사람들은 다행히 화를 면하였다. 전식은 매우 비루하여 상주 사람들도 비웃고 꾸짖었다고 한다. 사족의 부인 중에 오랑캐 진중에서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은 그 남편이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상놈들에게 겁간을 당하였다. 법사法司에서 겁간한 자들의 죄를 다스렸는데, 부녀자들이 겁간이 아니라고 증명하였다. 남한산성까지 대가大駕를 수행한 자들은 당상관인 가선대부와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았는데, 거의 200여 명이나 되었다. 수비한 군졸들도 모두 수령이 되었다.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1637년(인조 15) 5월
신하들의 벼슬살이 거부
손상된 종묘 복구
명나라 연호를 문서에 쓰는 일을 중지
참고 : 병자년 연말의 전쟁 경과
어가가 궁을 떠난지 이틀째인 1636년 12월 15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새벽에 일찌감치 산성을 출발하여 강화도로 향하려 하였다. 하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산길이 얼어붙어 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였다. 결국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 보려 하였으나, 결국 이러한 날씨에는 강화도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다. 이런 때에도 변방을 지키지 못한 장수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부원수 신경원(申景瑗), 평안 병사(平安兵使) 유림(柳琳),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 등을 죄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인조는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전날 적진으로 가서 강화를 논하던 최명길이 돌아왔다. 청 측에서 왕제(王弟) 및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원한다는 조건을 고하였다. 이에 가짜로 왕제와 대신을 만들어 보낼 것을 논의하였다. 또한 인조는 사기의 진작을 위하여 병사들을 뜰에 모아놓고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을 유시하였다.
이후 청군이 성 아래에 도착하였으며, 최명길이 다시금 강화조건을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인조는 최명길이 청에 속았다고 여기며 혼란스러워 할 뿐이었다. 대신들은 인조만이라도 강화도로 가야 한다 고하였지만, 인조는 자신이 홀로 살아남는다고 해서 어떻게 나라가 지켜지겠냐며 거절하였다.
다음날인 12월 16일, 최명길 등은 계속해서 적진을 오가며 강화를 의논하였다. 결국 전날 가짜로 꾸며서 내보내기로 했던 왕제와 대신을 보냈는데, 청 장수가 그들이 가짜라는 것을 간파하여 강화가 무산되었다. 또한 밀서를 써서 여러 도에서 군사를 부르고 도원수와 부원수에게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12월 17일, 인조는 당상관을 모아놓고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침통해 하였다. 결국 대군이 아니라 세자를 인질로 보내게 되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자, 세자 역시 매우 침통해 하며 눈물지었다. 한편 청군은 삼남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끊기 위해 진군하고 있었다.
이 다음날부터 인조는 성 내의 병사들과 이외에 공을 세운 자들을 상주고 격려하며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이루어진 전투에 대한 공을 부풀려 고하는 자들도 있어 간혹 노하기도 하였다. 지구전이 불리한 것을 알면서도 외부에서 반드시 구원하러 오는 군사가 있을 것이라 여기며 버티고 있었고, 승려들이 군수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2월 26일, 강원도에서 온 권정길(權井吉)이 검단산(儉丹山)에 도달하였으나 결국 청군의 습격에 의해 패배하였다. 또한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세규(鄭世規)도 다음날 험천(險川)에서 전군을 잃었다.
결국 인조는 좋으나 싫으나 강화를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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