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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원일기> 읽기 종료

by 소주인

지금까지 김광계가 쓴 <매원일기>의 중후반부인 1634년부터 1645년까지를 읽어보았다. 이 기간동안 김광계의 나이는 54세부터 64세에 이른다.

대체로 김광계는 심심하게 살아간다. 비록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지만 김광계가 살고 있는 예안에는 전란의 화가 미치지 않았기에 김광계는 평온한 일상을 이어나갔다.

노년에 해당하는 나이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겠지만 김광계가 적어내려간 매일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말갛다.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재종숙 김령의 <계암일록>을 참고해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령은 동네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부터 시작하여 서울에서 조보로 전해지는 여러 조정의 소식에도 폭넓게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적어 놓았다. 그 자신이 짧게나마 관직생활을 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 정도면 그냥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김광계는 평소 재종숙 김령에게 자주 방문하였고, 김령은 다소 김광계를 답답해 하기는 했지만 가까운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일기에는 서로가 꽤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매원일기>를 읽으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때에는 <계암일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매원일기> 날짜에 해당하는 실록도 찾아보았다. 사실 다른 일기들에 비해서 <매원일기>는 실록의 참고가 크게 필요하지 않은 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광계의 관심이 조정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의 생활이 조정의 동향과는 크게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직을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일가친척 중 주요한 관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김광계의 일상은 실록의 기록과 아주 괴리되어 있다. 경-향 분리가 과연 이런 것일까.(아님)

김광계가 향촌에서 가진 지위는 퇴계 가문과의 혼맥 및 학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퇴계 가문과 맺은 혼맥 및 학맥은 김광계의 선대가 벼슬을 했기 때문이었지만 김광계에게는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그리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명맥을 잇기 위한 초시~소과 정도에만 통과하면 계속해서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쥐꼬리만한 녹봉을 받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광활한 토지와 풍부한 노비 노동력을 이용하여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광계에게는 나라에 대한 충심과 지역사회 엘리트로서의 책임감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전란이 일어났을 때 노구를 이끌고 수성장으로 나섰던 것은 뭐가 어찌 되었든(타의로 뽑혔든, 뽑힌 뒤에 자리보전하느라 전장에는 나가지도 않았든) 간에 분명 용기있는 일이었다. 김광계 평생에 걸쳐서 이룬 가장 뚜렷한 업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김광계를 인물사전으로 검색했을 때 의병장으로 나섰다는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으로 쓰여 있는 것이리라.


조선시대의 일기는 사적인 감정을 담는 기록이 아니었고, 집안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데 목적이 있는 기록이었다. 김광계의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소략한 일기는 목적에 충실(?)했고, 행간에서 묻어나는 감정과 일상을 어떻게든 느껴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한동안 거의 인간 휴롬이 되어 김광계를 착즙하는 일상을 보냈는데, 이 시기에 내가 충실히 일기를 썼다면 아마도 김광계를 잔뜩 욕하는 일기를 써 놓았을 것이다.


아무튼, 10년간의 김광계 착즙은 여기서 마친다.

다음으로는 이어질 착즙 대상은 김광계보다 1.5~2세대 정도 앞선 시기를 살았던 금난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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