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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제자의 엉망진창 졸업여행

by 소주인

졸업은 늘 신나는 일이다. 초, 중, 고를 다닌 지긋지긋한 동네를 벗어나 대학이라는 '큰 물'로 나아간다고 좋아했던 고등학교 졸업 즈음을 문득 떠올리니 집구석이 제일 좋은 지금의 내가 미안하다. 그러고 보면 대학에 가서도 곧 사회라는 더 큰 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에 가득차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이 너무나 궁금하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약관에 품었던 청운의 꿈은 무지막지한 사회의 풍파에 이리 깎이고 저리 깎였다. 그래도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게 되었으니 슬픈 일만은 아니다.



퇴계문하를 졸업하다


서른 살을 이립이라 하던가, 큰 기둥이 우뚝 섰다기 보다는 적당한 나무토막을 흙바닥에 탁, 세워놓은 듯한 말이다. 만으로 서른이 된 금난수는 그간 수학하던 퇴계선생의 문하를 떠나기로 문득 마음먹었다. 그리고 공부하는 틈틈이 읽은 유람기를 따라 훌쩍 떠나기로 했다. 책으로만 접한 세상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과거시험에 실패하면서 켜켜이 쌓인 피로감도 떨쳐내고 싶었다.


금난수는 사촌 형 정복시(鄭復始)가 현감으로 있는 단성(丹城)의 두류산과 성주의 가야산을 목적지로 잡았다. 가야산 근처에는 당대 명사로 소문이 자자한 남명 조식이 살고 있다고 했다. 명사와 대면하고 새로운 생각을 접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금난수는 더 미루지 않고 퇴계선생 앞으로 나아가 고하였다.


“저는 재주가 옅어 과거 공부를 통해 입신양명을 할 수 없으니, 저의 분수를 알고 은거하여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이러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한탄스럽습니다.”


퇴계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나는 그대가 세상의 실정을 알았으면 하네. 그대는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만 판단하고 스스로 입신하는 일을 삼갈 뿐이네.” 라고 대답하였다. 제자가 넓은 세상에 나아가 많은 것을 느끼고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꺾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금난수는 뜰에서 하직인사를 올리고 길을 떠났다. 안동을 벗어나 세상을 보러 나아가는 첫 발걸음이었다.



스승의 마지막 심부름


그리고 준비를 다 마친 11월 12일 오후, 마침내 집이 있는 예안현을 떠나 길을 나선 금난수는 우선 아내의 오빠인 조목(趙穆)에게도 들러 하직 인사를 하였다. 조목 역시 영남의 이름난 선비였다. 금난수는 조목을 스승처럼 친형처럼 따랐다. 보통의 매부-처남 관계를 넘어선 깊은 관계였다.


다음날 아침, 외사촌 형인 남연복(南延福)의 집에 가서 아침을 얻어먹었다. 금난수가 아침을 먹고 있자니 남연복의 동생인 남연록(南延祿)도 얼굴을 비추었다. 외사촌들과 이야기를 적당히 나누고 나서 다시금 길을 나섰다. 금난수는 외가와도 스스럼없이 오가며 가까이 지내곤 했다. 아침나절에 느닷없이 들이닥쳐도 밥을 주는 것을 보라.


이날 저녁에는 일직현(一直縣)에 도착하였는데, 지금 기준으로 예안현으로부터 약 39km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월 14일에는 군위현에 도착하였는데, 이 역시 일직현으로부터 약 35km 떨어진 곳이다. 이 날은 종 성우(成雨)의 아버지인 최씨의 집에서 묵었다.


이날 밤에는 눈이 내렸지만, 금난수는 굴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약 30km 떨어진 장림역(壯林驛)으로 가서 아침을 먹었다. 여기부터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데리고 온 종 성손(成孫)과 짐말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뒤, 인동현(仁同縣)을 지나 배를 타고 칠진(漆津)을 건너 나루 상류의 오태리(烏太里)에 다다랐다.


일단은 성주에 먼저 가서 퇴계 선생이 성주 목사인 황준량에게 전하라고 한 영봉서원(迎鳳書院) 배향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다. 스승이 준 마지막 심부름이었다.


무슨 일인고 하니, 성주 이씨 문중에서 현조인 이조년(李兆年)과 이인복(李仁復)을 배향하고자 건립된 영봉서원에 새로 김굉필(金宏弼)을 입향하고자 하는 논의가 일어났는데, 문제는 이조년이 유상(遺像)에서 염주를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이조년이 고려대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이 당시 유생들에게 민감한 사안이었다. 유생들은 이단적 요소를 가진 이조년과 함께 저명한 유학자인 김굉필을 제향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아우성이었다.


성주 이씨 문중에서도 발끈하고 나섰다. 이 때 성주 목사였던 황준량은 매우 난감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비록 그가 이황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는 앞으로 성주를 관할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준량은 이 사안에 대해 스승인 이황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그리고 이황의 조언을 전하는 임무를 지금 금난수가 띠고 성주로 가고 있었다.


11월 16일에는 약목(若木)에서 아침을 먹은 뒤, 비로소 성주에 당도하였다. 지금 도로 기준으로 약 170km나 이동해 온 것이다. 아마도 좀 더 돌아가는 길이 있었을 수도 있고, 배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현대 기준의 이동거리를 적용하는 것이 마땅치는 않지만, 닷새 동안 외지에서 유숙해 가며 이 정도 거리를 이동하였으니 피로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금난수는 관아에 먼저 가서 목사에게 자신의 명함을 전해주라고 건네 준 뒤, 근처의 민가에 숙소를 정하고 지친 몸을 쉬었다. 목사와는 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


금난수는 성주에 도착한 이튿날인 11월 17일에 객사에서 황준량을 만났다. 황준량은 그 지역의 유생들과 강독과 제술을 하며 학문적 성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금난수는 이를 치하하면서 황준량의 기분을 조금 띄워준 뒤, 서원 제향 문제에 대한 스승의 말을 전하였다. 퇴계의 전언은 이조년과 김굉필을 함께 제향하되 그 사이를 가림막으로 막으라는 것이었다. 금난수가 전하는 말을 듣고 황준량은,


“선생님의 말은 언제나 옳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느 한 편을 들기가 힘드니 곤란하다.” 라고 대답하였다. 황준량이 난감해하며 스승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금난수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등산로는 얼고, 언 마음은 술로 녹이네


아무튼 이제 스승이 시킨 일도 다 했겠다, 금난수는 홀가분하게 가야산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가야산은 성주의 서쪽 30리에 위치한 산인데, 워낙 우뚝 솟아 있어서 멀리에서도 그 모습이 잘 보였다.


성주 남쪽의 극전리(棘田里)에는 이윤승(李允承)이 장가를 들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퇴계 문하의 이종량(李宗樑)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가야산으로 가기 전날, 성주 목사 황준량이 여러 유생들을 모아 제술을 하는 자리에서 금난수를 만났다. 이윤승은 다음날 금난수가 가야산으로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길을 떠난 것도 잠깐, 가야산은 이미 한겨울이었다. 눈과 얼음으로 길이 막혀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금난수의 유람은 이렇게 다음 해 봄으로 미루어졌다. 이윤승은 애석해 하는 금난수를 데리고 극전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추위에 지친 몸을 쉬게 해 주었다.


하지만 금난수는 가야산 유람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왕 길을 나선 김에 여러 친지와 벗들을 만나고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주에서 고령(高靈)과 합천(陜川)을 지나 류씨 아재가 올해 현감에 제수된 삼가(三嘉)에 이르렀다. 류씨 아재에게 인사를 드리니 아재는 날이 늦었으니 묵어가라고 청하였다.


하루를 삼가에서 묵은 뒤, 이번에는 단계(丹溪)를 지나 외사촌 형 정복시(鄭復始)가 현감으로 있는 단성(丹城)에 당도하였다. 정복시는 금난수에게 여러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금난수는 사람 만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우선 정무중(鄭茂仲)과 송중윤(宋仲胤)은 단성에 도착한 날 자리를 함께하였고, 다음날에는 손상중(孫翔仲)이 술을 가지고 금난수를 찾아왔다. 때마침 송중윤과 손형중(孫衡仲), 황경숙(黃慶叔)이 찾아와 자리는 차츰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금난수는 좋은 벗들을 사귀게 된 것을 기뻐하며 시를 지었다.


술과 풍류로 좋은 벗들 사귀었는데 杯酒風流結好朋

취하여 돌아온 썰렁한 여관 얼음장 같네 醉歸孤館冷如氷

나그네 서글픈 심사 누구에게 말하랴 客中愁緖憑誰說

단지 침상 머리의 등잔불만 짝한다네 秖伴床頭一點燈


다음날인 11월 26일에는 권경화(權景和)와 권정로(權廷老)도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송중윤은 이날까지 함께 술을 마시고 금난수와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월이 되어도 연일 술자리가 이어졌다. 12월 6일에는 조식의 문인인 정구(鄭構)가 밤에 불러 정무중, 송중윤과 함께 찾아가니 도희령(都希齡)이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여 돌아온 것을 축하하며 한 잔 하는 자리였다.


12월 14일에는 금난수와 꼭 붙어다니던 송중윤이 돌아가게 되어 손형중의 정자가 있는 강가에서 이별의 시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미 마음만은은 십년지기였다.


경개에 어찌 미리 몰랐음을 꺼려하겠는가 傾蓋何嫌識未曾

서로 만난 그날에 좋은 친구 되었네 相逢當日得良朋

자태는 빼어나고 아름다워 난초 가의 옥이요 儀容秀美蘭前玉

담소는 맑고 참되니 골짜기 아래 얼음이네 談笑淸眞壑下冰

객지에서 서로 만나 흔쾌히 마음 텄으나 客裏相從欣有得

강어귀에서 헤어지니 한스러움 풀 길 없네 江頭分送恨無憑

양관의 이별 한 곡조에 강변엔 석양 기울고 陽關一曲斜陽畔

헤어질 때 시 짓자니 떠듬떠듬 어눌하네 臨別題詩澁未能



학문의 품으로 돌아온 탕아


금난수는 한동안 단성에 머무르며 여러 벗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즐겁게 지내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과거에 합격하고 금의환향한 사람의 술을 얻어마시자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계속 놀면서 지낼 수는 없었다.


금난수는 여러 벗들과 이별하고 책을 책겨서 율사(栗寺)에 올라갔다. 율사에는 권문현(權文顯)이 먼저 올라와 지내고 있었다. 혼자 지내는 것이 적적했는지 금난수를 보고 화색을 띠며 반겼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반갑다는 시도 지었다.


홀로 외로이 바다 밖에서 부쳐 살았는데 孑孑孤栖海外蹤

그대 여기에 와 상종하니 기쁘다네 喜君來此得相從

연전에 관락을 좇지 못해 한탄스웠는데 年前恨不趨關洛

마음 튼 고담준론에 새벽종이 우네 肝膽崢嶸到曉鍾


두 사람은 깊어가는 겨울 산사에서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학문을 정립하려 애썼다. 하지만 사람 좋아하는 금난수가 과연 책만 읽었을지?




<성재일기>


1560년(명종 15) 11월-금난수 31세


나는 어렸을 적부터 두류산頭流山의 웅장하고 빼어남과 가야산伽倻山의 기묘한 절경을 듣고 이전 사람이 유람한 기록과 등산한 뒤의 기억을 읊은 시를 보았다. 또 조남명曺南溟【휘諱는 식植이고 자字는 건중健仲이다.】의 사람됨을 듣고는 항상 남쪽 지방으로 유람을 하면서 가야산과 두류산을 올라보고 남명을 만나 마음과 눈을 넓게 틔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길이 막히고 멀며 티끌 세상에 골몰하느라 남쪽 하늘로 고개를 돌려 바라만 볼 뿐 실행할 수 없었던 지가 십여 년이었다.

기미년(1559년) 봄에 정형鄭兄【이름은 복시復始이고 자는 이건以健으로 사촌 형이다.】이 단성 현감丹城縣監이 되고 그 다음해에 류씨 아재도 삼가 현감三嘉縣監이 되었는데, 단성은 바로 두류산의 동쪽 자락에 있고 삼가현과는 경계가 이어져 있으며, 삼가현은 곧 남명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길이 성주星州를 지나쳐 가고, 가야산도 성주 지경 내에 있으며, 이 해 가을에 황금계黃錦溪【휘는 준량俊良이고 자는 중거仲擧이다.】가 성주 목사가 되었다. 이는 내가 남쪽을 유람하는 데 있어서 큰 행운이기에 이때 마침내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섰다.



11월 9일

퇴계退溪 선생께 나아가 하직 인사를 하기를,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과 존귀하고 비천함은 비록 다르나 각자가 처신을 합니다. 수秀는 재주가 옅어서 과거 공부로 이름을 이룰 수 없습니다. 곧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거친 밭이나 가꾸는 일이 합당하니, 이것이 저의 분수입니다. 그러나 위로 부형이 계셔서 스스로 뜻을 이룰 수 없고, 시속을 따라 골몰하느라 본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한탄스러움이 있습니다.”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해 주겠네. 그대가 세상의 실정을 알고 행했으면 하네. 그대는 유독 마음으로만 알고 삼갈 뿐이네.”하시고, 또 성주의 서원 묘향廟享을 말씀하시면서 목사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운운하셨다. 마침내 뜰에서 하직인사를 올렸다.


11월 12일

오후에 길을 나서서 조월천趙月川【휘는 목穆이고 자는 사경士敬이다.】에게 들러 하직인사를 하고 저녁에 가마加麻에서 잤다.


11월 13일

백수伯綏【남연복南延福이다. 자가 백수伯綏이고 사촌 형이다.】형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중수仲綏【남연록南延祿이다. 자는 중수仲綏이고 연복의 아우이다.】가 와 있었다. 일직현一直縣에서 잤다.


11월 14일

군위현軍威縣을 지나 비지飛池 최씨 집에서 잤다. 이는 성우成雨의 아버지 집이다. 밤에 눈이 내렸다.


11월 15일

장림역壯林驛에서 아침을 먹고 종 성손成孫과 짐말을 돌려보냈다. 인동현仁同縣을 지나 칠진漆津을 건너서 나루 상류의 오태리烏太里에서 잤다.


11월 16일

약목若木에서 아침을 먹었다. 성주에 당도하여 김사원金士源을 만나 목사에게 명함을 전해주도록 하고 민가에 숙소를 정하였다.


11월 17일

객사客舍에서 목사를 뵈었다. 목사가 교수 오건吳健 자강子强과 함께 여러 유생을 모아놓고 강독을 하기도 하고 제술製述을 하기도 하면서 상벌賞罰을 시행하였는데, 학문을 장려하는 마음이 아주 근실하였다. 성주 유생들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 참에 서원의 묘향廟享에 대한 일을 아뢰니, 목사가 퇴계 선생의 말을 일러,

“누가 선생의 말을 믿지 않겠는가마는 김金(김굉필金宏弼)을 제향하고 이李(이조년李兆年)를 폐지하는 하는 일이 미안하다는 말은 인정에 있어서 모두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으니, 무엇을 따라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다 말을 하지 못하고 그쳤다. 이 진사李進士【이름은 숙량叔樑이고 자는 대용大用으로 대구大丘로 장가들어 살고 있다.】가 대구에서 왔다.


11월 19일

목사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가야산은 성주 서쪽 30리쯤에 있다. 우뚝 솟아 허공에 지탱하고 있어서 눈만 들면 바라볼 수 있으나 얼음과 눈으로 길이 막혀 올라가 유람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년 봄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돌아오는 길을 더듬어 자술子述과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극전리에 돌아와 그의 집에서 잤다.


11월 23일

단계丹溪를 지나 단성丹城에 당도하여 정형과 함께 정무중鄭茂仲을 만나보았다. 송중윤宋仲胤이 자리에 있었다.


11월 25일

손상중孫翔仲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송중윤과 손형중孫衡仲과 황경숙黃慶叔이 와서 모였다. 마음껏 즐기고 자리를 마쳤다.


시를 지었다.


술과 풍류로 좋은 벗들 사귀었는데 杯酒風流結好朋

취하여 돌아온 썰렁한 여관 얼음장 같네 醉歸孤館冷如氷

나그네 서글픈 심사 누구에게 말하랴 客中愁緖憑誰說

단지 침상 머리의 등잔불만 짝한다네 秖伴床頭一點燈


11월 26일

권경화權景和와 권정로權廷老도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송중윤은 나와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월 5일

무중武仲과 함께 나와서 강변을 거닐었다. 시를 지었다.


비갠 하늘 맑고 먼 들 청명한데 雨霽天空野外淸

강어귀에서 종일 실컷 거닐었네 江頭終日爛熳行

모래사장에 앉아 세상 일 잊으니 坐來沙上忘機處

물색과 산 빛이 눈부시게 밝네 水色山光照眼明


모래톱에 말을 풀고 상류에 앉아서 放馬沙汀坐上流

한 잔 술 권하며 시름 털어내네 一杯相屬洗淸愁

오는 손님 없다고 아쉬워 마오 勸君莫恨無來客

물안개 속 한 쌍의 갈매긴들 어떠리 何似烟波兩白鷗


12월 6일

정긍보鄭肯甫가 부르기에 밤에 무중茂仲, 중윤仲胤과 함께 갔다. 도자수都子壽가 서울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금의환향하여 함께 앉아 술잔을 나누었다. 밤중에 자리를 마쳤다.


12월 7일

도자수가 와서 고을 수령을 뵙고 객사에 유숙하였다.


12월 14일

손형중의 강가 정자에서 송중윤을 전별하였다. 작별시를 주었다.


경개에 어찌 미리 몰랐음을 꺼려하겠는가 傾蓋何嫌識未曾

서로 만난 그날에 좋은 친구 되었네 相逢當日得良朋

자태는 빼어나고 아름다워 난초 가의 옥이요 儀容秀美蘭前玉

담소는 맑고 참되니 골짜기 아래 얼음이네 談笑淸眞壑下冰

객지에서 서로 만나 흔쾌히 마음 텄으나 客裏相從欣有得

강어귀에서 헤어지니 한스러움 풀 길 없네 江頭分送恨無憑

양관의 이별 한 곡조에 강변엔 석양 기울고 陽關一曲斜陽畔

헤어질 때 시 짓자니 떠듬떠듬 어눌하네 臨別題詩澁未能


이날 조자앙趙子仰 형이 함안咸安에서 와서 함께 잤는데, 다음날 진주晉州로 길을 나섰고, 류중술柳仲述 형이 삼가三嘉에서 와서 함께 자고 다음날 호남湖南으로 길을 나섰다.


12월 16일

율사栗寺에 올라가니 권명숙權明叔이 와서 기거한 지 이미 대엿새나 되었다.


12월 19일

들으니, 김취려金就礪가 서울에서 내려와 퇴계서당退溪書堂에서 임시로 기거한다고 한다. 종을 보내어 삼가에서 양식을 구하여 오도록 하였는데, 집에서 보낸 편지를 가지고 왔다.


12월 23일

권명숙이 시를 지었다.


홀로 외로이 바다 밖에서 부쳐 살았는데 孑孑孤栖海外蹤

그대 여기에 와 상종하니 기쁘다네 喜君來此得相從

연전에 관락을 좇지 못해 한탄스웠는데 年前恨不趨關洛

마음 튼 고담준론에 새벽종이 우네 肝膽崢嶸到曉鍾


차운하여 지었다.


나는 듯 흰 구름 자취 뒤 쫓아 飛鞚追躡白雲蹤

객지에서 서로 만나 즐겁게 상종하네 客裏相逢喜有從

주옥같은 시에 화답하자니 새삼 부끄러워 欲報瓊詞還愧拙

짧은 종채로 어찌 큰 종을 울리랴 寸莛其奈打洪鍾


명숙이 거듭 이전의 운을 써서 지었다.


구름 헤치고 골짜기 건너 신선 자취 찾아오니 穿雲渡壑訪仙蹤

때 마침 산승이 나를 따라오네 時有山僧得我從

실컷 구경하지 못하여 돌아갈 수 없으니 遊賞未闌歸未可

숲 건너 달빛 일렁여 종소리 몇 번 자아내네 隔林搖月數聲鍾


내가 차운하였다.


남극으로 훨훨 날아 속세 티끌 벗어나니 扶搖南極出塵蹤

구름 밖 주림에서 즐겁게 상종하네 雲外珠林喜得從

이 가운데 풍류는 기이한 흥취가 있고 箇裏風流奇興在

대 숲 이내 낀 달빛에 아침저녁 종소리 들리네 竹林烟月暮晨鍾


noname01.jpg 금난수의 이동경로(현대 기준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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