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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에서 난 인심, 돈독해지는 우정

by 소주인


전세계적인 역병이 들기 전에는 사람 만나고 술 마시는 일을 꽤나 즐겼더랬다. 하지만 시국 탓에 그렇게 쌓인 우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아낀 술값으로 여러 상황에 선물이나 봉투(!)를 보내게 되었는데, 벌이는 늘질 않았으나 어째 씀씀이는 꽤 커져버렸다. 현물로 주는 물건이 아닌만큼 표상적인 액수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 좀 인심을 썼다 싶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최근 몇년 사이에 나는 꽤 쉽게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게 되었다. 나의 곳간에는 쥐가 사는지 항상 쌀이 축나 있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런저런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주위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석사과정 때 아르바이트를 빡세게 할 때보다 지금 버는게 적은데도.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일까? 소소한 선물을 하고 상대가 소소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보면 나도 같이 기분이 좋아진다. 매력없는 내 곁에 이런걸로라도 친구들을 붙잡아 놓을 수 있다면 아주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금난수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인싸 중 인싸였던 듯하다. 아무데고 가서 아무나 소개받아 쉽게 벗이 되곤 했다. 금난수는 평소 농담하는 것도 좋아했고 노는 것도 좋아했으며 사사로운 것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스스럼없이 행동하곤 했는데, 이를테면 한달 전 처음 알게 된 사람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한동안 그 집에 머무르며 대접받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해냈다.


어쩌다 보니 금난수를 대접하게 된 사람은 지난 달 단성에서 술을 마시다가 만난 권경화(權景和)였다. 금난수가 공부하는 산사인 율사(栗寺)와 가까운 마을인 단계(丹溪)에 살고 있었다. 금난수는 율사에서 책 읽는 것이 지겨워졌는지 단계로 내려가 권경화의 집에 썩 들이닥쳤다. 권경화의 집은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부잣집이었기에 금난수는 자신이 별로 폐를 끼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권경화는 금난수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인지, 갑자기 찾아온 금난수를 귀찮아하지 않고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술을 아끼지 않고 계속해서 내 왔을 뿐 아니라 악사들을 불러 풍악을 울려 주기도 했다. 금난수는 권경화의 너그러운 마음씀씀이를 기리며(?) 시를 지어 권경화를 기쁘게 해 주었다.



주인은 냉랭한 서생이 아니어서 主人非是冷書生

술과 풍악으로 나그네 마음 즐겁게 해주네 杯酒絃歌娛客情

한밤중에 홀로 술 깨니 세상은 적막하고 半夜獨醒人間寂

일어나 바라보니 지는 달빛만 창에 잦아드네 起看殘月照窓明



이렇게 지은 시를 자기 일기에도 적어 놓았으니, 권경화의 대접이 아주 마음에 들었나보다.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된 사이였지만 권경화의 극진한 대접이 금난수와 권경화 사이의 우정을 돈독하게 해 주었으리라.


<성재일기>


1560년(명종 15)- 금난수 31세


12월 24일

권명숙과 함께 말을 타고 나란히 단계丹溪로 내려왔다. 시를 지었다.


평생 산수를 좋아함은 타고난 성벽인데 生平山水元成癖

하물며 냇물이 맑아 티끌 씻음에랴 矧是溪淸可濯塵

어찌 …… 흥을 깨어 何事■■消興味

객지에서 깊은 시름만 오락가락 하네 客中深恨往來頻


권경화權景和 집에서 잤다. 권경화의 집은 부자 집이어서 술과 음악으로 손님을 즐겁게 해주었다. 시를 지었다.


주인은 냉랭한 서생이 아니어서 主人非是冷書生

술과 풍악으로 나그네 마음 즐겁게 해주네 杯酒絃歌娛客情

한밤중에 홀로 술 깨니 세상은 적막하고 半夜獨醒人間寂

일어나 바라보니 지는 달빛만 창에 잦아드네 起看殘月照窓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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