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를 보다 보면 내 안의 한국인이 썽을 낼 때가 있다. 홈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이 남의 집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신발도 안 벗고 침대 위에 올라가는 장면! 그러고 보니 영어회화 시간에 자주 배우는 표현으로 주인이 손님들에게 편히 있으라고 하는 말인 "make yourself at home"이 있다. 난 이게 그냥 맘 편하라고 해주는 말인줄 알았는데 미드를 보면 다들 진짜 자기 집처럼 군다...드라마니까 그렇겠지?
조선시대에는 경치가 좋은 곳에 정자나 별장을 지어놓곤 했다고 한다. 그곳은 주인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관광명소 들르듯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다.(아무나 그럴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일기들을 보다 보면 옛날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 집에도 쑥쑥 잘 들어간다.
과거합격자에게 술을 얻어마시고는 급 반성하며 공부를 하러 율사(栗寺)에 올라간 금난수.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금난수는 이레만에 율사에 이미 와 있던 권문현(權文顯)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산 아래 동네인 단계(丹溪)에는 손꼽히는 부자인 권경화(權景和)가 살고 있었다. 금난수는 태연자약하게 권경화의 집으로 찾아가 머물렀다.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권문현의 동생인 권문저(權文著)도 술병을 허리에 차고 권경화의 집에 왔다. 술꾼들의 술 마실 핑계는 화수분같은 것 아니겠는가.
술병을 끌러 내려놓던 권문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류화중(柳和仲)의 정자가 아름다우니 구경을 가자고 여러 사람의 소매를 끌어대었다. 그래서 일단 금난수는 권문현과 함께 류화중의 정자인 죽정(竹亭)으로 향했다. 권문저와 권경화는 정자에 갈거면 풍악도 울려야 한다며 준비를 해서 가겠다고 했다.
막상 죽정에 도착하니 주인인 류화중은 출타중이었다. 주인이 없었지만 그들은 죽정에 스스럼없이 들어가 죽정의 푸른 대나무와 맑은 못을 구경하며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정자를 가꾸는 데 꽤 신경을 썼는지 권문저의 말대로 풍경이 꽤 아름다웠다. 금난수와 권문현은 이곳이 바로 별천지 아니겠냐며, 류화중이 자기 스스로를 무릉옹(武陵翁)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고 서로 떠들어댔다.
류화중에게도 손님이 죽정에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류화중이 말을 달려 돌아오는 동안, 금난수는 권문현에게 짓궂은 제의를 하였다.
“우리가 주인이 없는 이곳에 먼저 도달해 있으니, 류화중이 돌아오거든 우리가 주인으로서 손님인 류화중을 맞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저기 있는 사람을 시켜서 돌다리를 지키라고 하고 류화중이 못 건너오게 막아봅시다. 그러고서는 통성명을 하게 해서 손님의 예를 갖추게 한 다음에 건너오게 하는 겁니다.”
권문현은 껄껄 웃으며 금난수의 장난 제의를 받아들였다.
곧 죽정에 가자고 제안했던 권문저와 권경화도 뒤이어 죽정에 도착하였다. 어디서 금세 가야금을 잘 타는 아이를 찾아서 함께 데리고 왔다. 그리고 뒤에 선 종은 술단지를 지고 있었다. 금난수의 장난에 진땀을 뺀 류화중도 술을 내놓고 자리에 앉았다.
별천지와도 같은 경치, 향기로운 술, 듣기 좋은 음악, 그리고 좋은 벗까지 함께 하는 단계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금난수는 권문현과 함께 단성(丹城)을 향해 갔다. 단성에서도 굉장한 술자리가 있을 것만 같았다.
1560년(명종 15)- 금난수 31세
12월 25일
권찬숙權粲叔이 술병을 차고 보러왔다. 서로 끌어가며 류화중柳和仲의 죽정竹亭에 와서 구경하였다. 푸른 대나무와 맑은 못이 있어서 경치가 빼어난 한 별천지였다. 류화중은 스스로 무릉옹武陵翁이라고 부르는데, 마침 밖에 나가서 단계로 돌아오다가 우리들이 당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말을 달려 돌아왔다. 내가 장난으로 권명숙에게
“우리들이 이곳에 왔으나 주인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니, 우리가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옳다. 사람을 시켜 돌다리에서 지키고 있으면서 건너지 못하도록 하다가 통성명을 한 뒤에 건너오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짓궂은 농담을 하니 매우 우스웠다.
권경화와 권찬숙도 가야금을 타는 아이를 이끌고 술병을 들고 잇달아 왔다. 류화중도 술을 내놓고 함께 앉아 잔을 주고받았다. 오후에 권명숙과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단성丹城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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