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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 선생님은 너 노는 줄 아시니?

by 소주인

제목을 어떻게 품위있게 지어야 할지 아주 고민했다. 선생을 물고핥고빨고 뭐 이런 동사들이 생각났지만 그래도 선을 지키려는 온전한 정신이 가까스로 남아 있었다. 아무튼, n년간 대학원생으로 지내느라 좀 비틀려버린 학생인 내 입장에서 보기에 아주 아니꼬운 에피소드가 있어서 뽑아 보았다.



사흘 전, 단성에 있는 이원의 집에서 입춘을 맞이한 금난수는 그대로 단성에 머물며 벗들과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1월 17일에도 밤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고는 머물고 있던 향교로 돌아가는데 마침 그 길목에 이원의 집이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런걸 크게 신경쓸 금난수가 아니다. 금난수는 이원의 집 문을 두드렸다. 하루 일과를 마친 마당쇠가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주인어른이 이미 쉬고 계시니 뵐 수 없다는 말에 금난수는 그저 문안인사만 전해 달라고 하였다.

아직 안 자고 있던 이원은 쳐들어온 금난수에게 금난수의 스승인 이황의 호, 퇴계로 운을 띄워 시를 지어 보냈다.


오늘 회포를 풀어보니 모두 마음에 들고 此日開懷總可人

비단 대련 한 폭 퇴계 물가에서 왔구나 錦聯來自退溪濱

섣달 매화 눈 덮일 적 즐거운 모임 이루고 臘梅帶雪成佳會

향긋한 진액만 묻혀오니 아마 숨어 사는 이겠지 香液傳心想隱淪


퇴계 문하를 떠나 숨어지내다가 어디서 즐겁게 놀고 왔냐는 가벼운 타박일까? 술병은 안 가져오고 술냄새만 풍긴다는 놀림일까? 이원의 시에 웃음을 참지 못한 금난수도 자기 스승인 퇴계의 운을 이용해 답하였다.


산남에 와서 노인 한 분 뵈니 來拜山南一老人

맑은 향기 마음에 스미는 푸른 강변 일세 淸香心事碧江濱

곧은 매화 참대 같은 삶 종신토록 기약하니 貞梅苦竹終身契

뉘 알리요 선생이 이곳에 숨어 삶을 誰識先生此隱淪


이원과 함께 즐긴 매화 향기가 아름다웠으며, 마치 눈 속에 피어 있던 매화가 이원의 절개와도 같다고 짐짓 치켜세워준 것이다. 하지만 한 수로 끝내기는 아쉬워서,


강성에서 참 마음을 기르는 이 맞닥뜨렸으니 江城逢着養眞人

때마침 향기 찾아 적막한 물가에 당도하였네 時到尋香寂寞濱

만약 선생과 함께 이곳에 머물러 산다면 若與先生同住着

사나운 물결 굽이칠 때 침몰함은 모면하리 滔滔欲浪免沈淪


금난수는 이원과 함께 은거한다면 세상의 풍파를 잊고 살 수 있으리라고 하는 내용의 시를 한 수 더 지었다. 밤늦게 들이닥쳤으면 이 정도 립서비스는 해 주어야 마땅한 법.

그러고 보니 금난수는 스승인 이황을 떠나올 때 그 앞에서 그저 은거하고 싶다고 아뢰었는데, 은거는 커녕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술 마시고 놀기만 하고 있다. 금난수는 내심 마음이 불편해졌는지 다음날 다시 이원에게 시를 보냈다.


와서 풍파를 맞아보니 사람 잃을까 걱정되고 來見風波患失人

어찌 한가함이 퇴계 물가와 같지 않겠는가마는 安閑不似退溪濱

당연히 두루 유람하고 일찍 돌아가 何當遊歷還歸早

다시 천연대를 마주하여 숨어 사는 법 배우리 更向天淵學隱淪


그만 놀고 퇴계 선생 지척으로 일찍 돌아가 은거하겠다는 것이다. 이원이 금난수의 말을 믿어주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1561년(명종 15)- 금난수 32세


1월 17일

밤을 틈타 지나는 길에 이 훈도李訓導(이원李源)에게 안부를 여쭈었다. 이 훈도가 퇴계의 운韻을 차운하여 시를 보냈다.

오늘 회포를 풀어보니 모두 마음에 들고 此日開懷總可人

비단 대련 한 폭 퇴계 물가에서 왔구나 錦聯來自退溪濱

섣달 매화 눈 덮일 적 즐거운 모임 이루고 臘梅帶雪成佳會

향긋한 진액만 묻혀오니 아마 숨어 사는 이겠지 香液傳心想隱淪

차운하였다.

산남에 와서 노인 한 분 뵈니 來拜山南一老人

맑은 향기 마음에 스미는 푸른 강변 일세 淸香心事碧江濱

곧은 매화 참대 같은 삶 종신토록 기약하니 貞梅苦竹終身契

뉘 알리요 선생이 이곳에 숨어 삶을 誰識先生此隱淪

또 한 수,

강성에서 참 마음을 기르는 이 맞닥뜨렸으니 江城逢着養眞人

때마침 향기 찾아 적막한 물가에 당도하였네 時到尋香寂寞濱

만약 선생과 함께 이곳에 머물러 산다면 若與先生同住着

사나운 물결 굽이칠 때 침몰함은 모면하리 滔滔欲浪免沈淪


【이 위 3수의 시는 14일자 아래에 있었다.】


1월 18일

종을 돌려보내면서 퇴계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보냈다.

와서 풍파를 맞아보니 사람 잃을까 걱정되고 來見風波患失人

어찌 한가함이 퇴계 물가와 같지 않겠는가마는 安閑不似退溪濱

당연히 두루 유람하고 일찍 돌아가 何當遊歷還歸早

다시 천연대를 마주하여 숨어 사는 법 배우리 更向天淵學隱淪

이날 돌아와 향교에 우거하였는데, 하대용河大容과 양진숙梁晉叔이 와서 우거한 지 이미 사나흘 되었다.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8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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