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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욕의 유구한 전통

by 소주인

1799년(정조 23) -노상추 54세


8월 20일(병오) 볕이 나고 서풍이 붊.

(전략) 경주慶州의 한량 최종기崔宗岐가 장화심張華深 령令과 대단한 말다툼을 했다고 한다. 시비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작년 6월에 경력 허승許乘이 선천宣薦을 뽑을 때에 권의택權宜擇·최종기崔宗岐·조여충趙汝忠을 호천呼薦했으나 모두 통과하지 못하였다. 장張 령令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최종기는 그 아버지가 경주의 천총千摠이고, 그 역시 직접 농사를 짓고 땔감을 졌으니, 남항천南行薦에 거론되기에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퍼져서 결국 최崔 군君의 귀에 들어갔는데, 이번에 천총이라고 들은 말은 본래 이러한 일이 없었으니 도리어 무고를 당한 것이다. 최군이 그 아버지가 무고를 당한 것에 분노하여 문여집文汝緝의 여관에서 만나서 시비를 논하고 곡직을 분별했으며 장령을 질책하며 온갖 구박을 하였다. 장령은 말이 막히자 육축六畜을 가리키며 맹세하면서 본래 발설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최군이 말하기를, “남이 기휘忌諱하는 것을 모욕하고 맹세하는 말을 끊어버리는 것이 바로 그대 집안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말은 매우 망측하지만, 자신이 만든 재앙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장령의 수치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8월 22일(무신) 볕이 남.

(전략) 도사 장지원張趾元이 이현보 령에게 말하기를, “일전에 최종기崔宗岐가 장화심張華深 령을 아주 심하게 구박하니 장張 령이 가축을 가리키며 맹세했지만 최종기가 풀지 않았습니다. 구박이 아주 심했는데도 문경성文敬成은 방에 누워서 도와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 사람의 잘못은 최종기보다 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그럴 듯하지만 장지원의 말도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최종기가 말하기를, “내가 과거를 보지 않은 것은 실로 부형父兄이 무고를 당한 수치를 씻어 내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는데, 곁에 있는 사람이 나서서 장령을 구하고 저 최崔 군君을 막을 것인가. 최군이 장령을 다그쳐서 말하기를, “령은 아버지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장령이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최군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 감히 남의 부형을 무고하고 욕보인 것입니까?”라고 했으니, 이러한 때에 누가 감히 말을 하겠는가. 장張의 논리는 실로 의리를 저버리고 사적으로 비호한 것이다.




2022년 2월 25일


몇년 전 코난쇼 한국편에서 코난이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한국인 출연자는 코난이 게임하는 것을 도와주며 한국의 게임 관습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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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언제나 승리해야 할 의무를 진 사람들이다.


선전관청에서는 매년 6월에 일회(一會)를 열어 선전관이 될만한 후보군을 선출한다. 이때 몇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결국 선전관 후보가 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경주의 한량 최종기(崔宗岐)였다. 이를 두고 무관 장화심(張華深)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경솔한 이야기를 한다. 최종기의 부친이 경주의 천총(千摠)이며, 직접 농사를 짓고 땔감을 지니 최종기는 남항천(南行薦)에 들기에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남항천, 즉 음관으로서 천거받아 선전관이 되기 위해서는 집안 출신이 중요했다. 선조대에 공을 세운 일이 있거나 높은 관직을 역임한 일이 있는 '문음자제'여야 했다. 다시 말해 찐 양반 집안 출신임을 증명해야 선전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총이라는 자리는 중앙의 각 군영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일컬을 경우 정3품 관직이라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뉘앙스로 보아 경주의 천총은 그보다 끗발이 좀 떨어지는 직위였나 싶다. 이 부분은 공부가 부족하므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직접 농사를 짓고 땔감을 졌다는 것은 양반이 아닌 상민으로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장화심은 최종기의 부친이 상놈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장화심의 말은 금세 최종기의 귀에 들어갔다. 최종기는 펄펄 뛴다. 그 부친이 실제로 천총도 아닌데 천총이라고 무고했다며 장화심을 찾아가 따진다. 최종기가 쏘아붙이는 말에 장화심은 쩔쩔매다가 근처에 있던 육축(六畜: 말, 소, 양, 개, 돼지. 닭 등의 가축)을 가리키며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맹세하였다.

최종기는 장화심을 다그치면서 물었다. "령은 아버지가 있습니까?" 장화심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최종기는 "그렇다면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 감히 남의 부형을 무고하고 욕보인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그대 집안의 가르침입니다." 라며 장화심의 집안을 욕하였다. 요즘 식으로 풀면 "니네 아버지가 너 그렇게 가르쳤냐?" 정도겠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노상추는 뭐라고 생각했는가 하면, 장화심이 욕을 먹은 것은 바로 그 자신의 허물이니 별 수 없다는 것. 노상추는 평소 꼰대같을 정도로 사람의 도리니 뭐니 하는 말을 일기에서 많이 하는데, 가족 욕에 대해서는 이렇게 관대한 태도를 취하니 의외다.


*추가- 18세기 전후 지방 천총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찾아볼 수 있는 대로 찾아봤다. 1848년 안변에서 이방이었던 박윤항이 2년 뒤인 1850년에는 천총을 맡고 있으며, 1850년 이방이었던 신치순은 3년 뒤 천총이 되었다. 제한적이지만 이러한 사례를 볼 때 천총은 양반이 맡는 직위가 아닌 호장, 이장, 형방 등 삼공형과 동렬에 있는 향리의 직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경하, 2014, 「19세기 함경도 안변의 향청, 작청 직임과 인사관행」, 『역사민속학』 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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