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수 하면 뭐라도 될것
내가 사학을 전공하면서 느낀 점 중 하나. 역시 사학은 노예도 있고 부동산도 있어서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기 시작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어...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대학에 설치되어 있는 모든 과들 중 최고 아웃풋은 사학과다. S사 이*용도, 또 다른 S사 정*진을 생각해 보면...역시 그렇다. 사학을 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내가 지금 사학을 하고 있으니 이렇게 고생스러운 게다. 취업 못 한다고 1n년간 구박이나 듣고.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관리 뿐이었다. 직업 없으면? 학생(서자의 경우엔 업유)이지. 제사지내는 집에서 자랐다면 학생부군신위...어쩌고 하는 말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벼슬 못했다는 말이다. 갑자기 지방쓰는 법이 궁금해져서 검색하니 요즘엔 고인이 국회의원 했으면 그 자리에 국회의원이라는 직위 이름을 넣어서 현고국회의원부군신위 라고도 쓴다고 한다. 이건 좀 웃긴데. 웃겨서 더 검색해보니 공무원을 했으면 현고사무관부군신위 현고차관부군신위 등등으로도 쓴단다. 나 박사학위 따면 나도 나중에 지방에다가 현비박사O씨신위라고 적어주려나?
아니 딴데로 너무 많이 샜다. 아무튼, 택할 수 있는 진로가 그리 많지 않았던 양반들이 전부 과거시험으로 몰리니, 온 집안 사람이 장기 공시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과거시험은 연령제한도 없으니 글 깨쳤다 싶은 순간부터 욕심 없어지는 순간까지 주구장창 과거를 보는 것이다. 금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퇴계 문하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입신을 위해 과거를 보기 시작하였다. 동네 산에 있는 절은 오늘날의 신림이나 노량진의 고시촌 같은 공간이었다.
진주와 단성에서 벗들과 함께 놀기만 하던 금남수는 2월 13일에 남중수(南仲綏)와 함께 삼가현으로 향했다. 삼가에서 진사시와 생원시가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시험 직전까지 놀기만 하다니,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할까. 단계현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어 삼가현에 도착한 금난수는 일단 현감으로 있는 류씨 아재에게 인사를 올리고, 권자유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날에는 단성 현감으로 있는 사촌형인 정복시가 삼가에 도착하였다. 함안에서는 조성(趙成)·조감(趙堪)·신뢰(申磊)가 과거를 보기 위해 왔고, 단성에서도 황경숙(黃慶叔) 형제가 와서 모였다. 모두 금난수의 친인척이었다. 이에 모인 일족이 총 열 네 사람이나 되었다. 일찌감치 과거에 합격했기에 과거시험을 보는 자들과는 처지가 다른 정복시는 다들 시험을 잘 보라며 격려를 해 준 뒤 다음날 떠나버렸다. 금난수는 남인록, 권자유와 함께 남원리(南院里) 이동(李同)에 있는 집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함께 벼락치기를 준비하였다.
2월 16일에는 녹명소(錄名所)에 가서 녹명, 즉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 일종의 신원보증서)를 제출하고, 녹명책에 이름을 기입하는 것까지 보고 왔다. 다음 날, 청도에서 달려온 금난수의 외사촌 남치형(南致亨)과 남치리(南致利) 형제가 찾아왔다. 그들은 정복시가 좌도(左道)의 시관(試官)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창녕에서 그를 만나 하룻밤 함께 자고 왔다고 말하였다.
어쩐지, 그러고 보니 과거시험을 치는 일가친척을 둘러보는 정복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더랬다. 삼가현감인 류씨 아재는 수협관(搜挾官: 부정행위 감시를 맡은 임시직)이 되었다고 하였다. 과거시험을 보는 것은 떨리지만 그래도 익숙한 친척들이 시관과 수협관으로 들어온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1561년(명종 16)-금난수 32세
2월 13일
남중수南仲綏와 함께 삼가로 길을 나서서 단계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삼가에 당도하여 숙부를 뵙고 또 권자유를 만났다.
2월 14일
이건 형이 당도하고, 조성趙成·조담趙堪·신뢰申磊가 함안咸安에서 오고, 황경숙黃慶叔 형제도 왔다. 와서 모인 일족이 14사람이었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2월 15일
이건 형은 청도로 길을 나서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합천으로 길을 나섰다. 남중수와 권자유와 함께 남원리南院里 이동李同 집에서 같이 거접하였다.
2월 16일
군郡에 들어가서 녹명錄名을 하였다.
2월 17일
아침에 남양중南養仲과 남성중南成仲이 당도하였다. 그들은 청도에서 정형이 좌도左道의 시관試官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말을 달려 왔으며 창녕昌寧에서 정형을 만나 함께 자고 헤어져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날 삼가 숙부께서 수협관搜挾官으로 군郡에 당도하였기에 남중수 무리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뵈었다. 그길로 정긍보鄭肯甫·이안도李安道·이운장李雲長·김사원金士源과 조자앙趙子仰을 찾아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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