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김에 급제까지
처음 <성재일기>를 정리할 때만 해도 몰랐는데, 지금 다시 글을 쓰려고 원고를 뒤적거려 보니 금난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괜히 퇴계 애제자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었다. 30세 겨울에 퇴계 문하를 나와서 31세 봄까지 좀 놀다가 바로 과거시험을 치는데, 향시-복시-소과까지 이르는 기간동안 한 번도 낙방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급제해 버린다. 2월에 향시를 치고 소과에 8월에 급제하니 반 년만의 일이다.
근데 중간중간 공부를 열심히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한 일주일 깔짝 산사에 들어가서 공부 좀 하는 듯 싶으면 곧바로 나와서 사람들 만나서 술마시고 놀기만 한다. 그러고 시험 사나흘 전부터 조금 준비하고. 그러고 나서 시험 치면 좋은 성적으로 합격. 퇴계가 아낄만한 인재 아니겠는가. 복시에서는 진사시랑 생원시를 모두 클리어한다.(거칠게 말하면 진사시는 문장력을 보는 시험이고, 생원시는 경전에 대한 지식을 보는 시험이다. ) 소과까지 합격한 뒤에는 대과를 아얘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귀향하는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렇게 벼슬에 아무 미련없는 태도까지 정말 크...
새삼스럽게 금난수에 대한 감탄을 담아 제목을 지어 보았다. '하면 되는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말하나 보다.
이번에는 금난수가 반 달간 과거 본 내용을 주욱 이은지라 글이 아주 길다.
진사시와 생원시를 보다
2월 18일. 진사시(進士試)를 보러 시험장에 들어간 금난수는 자리를 잡고, 고개를 들어 시제를 보았다. 구경부(九經賦)와 윤덕천시(潤德泉詩)가 시제로 걸려 있었다. 구경(九經)은 중용(中庸)에서 말한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중요한 방법이다. 그 내용으로는 몸을 올바르게 것[修身],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친족을 친애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체찰하는 것[體群臣],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子庶民], 백공들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지방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제후들을 품어주는 것[懷諸侯]이다. 또 윤덕천(潤德泉)은 주공(周公)의 사당 옆에 있는 샘인데, 태평성대에는 물이 솟고 난세에는 물이 마른다는 전설이 있다. 이 두 가지 시제는 곧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기 위한 방침을 적으라는 뜻이었다.
답변을 쓸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제가 바뀌었다. 사람의 도리는 정사에 민감하고 땅의 도리는 나무에 민감하다는 내용을 담은 중용의 한 구절인 인도민정부(人道敏政賦)가 출제된 것이었다. 답을 쓸 준비를 하기도 전에 또 시제가 바뀌어 인심유위부(人心惟危賦)라는 시제가 내걸렸다. 이는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사람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오직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오직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라는 구절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최종 시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시제가 바뀌어 도심유미부(道心惟微賦)와 이자승주시(二子乘舟詩)가 최종 시제로 결정되었는데, 이 중 이자승주시는 시경(詩經)의 「패풍(邶風) 이자승주장(二子乘舟章)」으로 위(衛)나라 선공(宣公)의 두 아들이 배로 타고 가다가 도적에게 죽은 것을 슬퍼하는 내용이었다.
두 번이나 시제가 바뀐 혼란 끝에 바뀐 주제가 무엇이든 금난수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원래 공부 잘 하는 사람에게는 불시험든 물시험이든 상관이 없는 법이다.
이틀 후, 금난수는 비장하게 생원시를 치르는 시험장에 들어섰다. 금난수는 과거시험에 응할 때마다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느낄 때까지 글을 쓰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시험지를 제출하고는 했다. 그리고 남보다 민첩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금난수가 글을 다 쓰고 머리를 들었을 때 본 하늘은 늘 보던 어둑어둑한 하늘이 아니었다. 시험지를 제출한 뒤, 밝은 햇빛을 등에 지고 시험장을 나오는 금난수의 발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향시 뒷풀이의 끝은 창고에서
나흘에 걸쳐 진사시와 생원시를 모두 마친 금난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과거시험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함안에서 와 함께 과거시험을 치른 조자앙과 신뢰(申磊)는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전별하였다. 금난수와 함께 남원리(南院里) 이동(李同)의 집에 기거하며 과거시험을 준비했던 남인록과 권자유는 삼가에 남아 있었는데, 금난수는 이들 중 남인록과 함께 과거시험으로 인해 쌓인 피로도 풀고 벗들도 만날 겸 단계현으로 갔다.
단계로 가자 품관(品官)이 나와 금난수를 맞이하고, 진주의 유생들이 술자리를 차려 금난수를 대접하겠다고 나섰다. 금난수는 아직 과거에 합격한 것도 아닌데 무슨 술이냐며 손사레를 쳤지만, 길 한가운데에서 끌고 당기는 벗들의 강권에 못 이겨 술자리에 앉게 되었다. 과거 이야기도 하며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다 보니 모르는 새에 술이 몇 순배나 돌았다. 술에 못 이겨 결국 자리를 떴을 때는 아직 대낮이었는데, 술기운 때문에 멀리 가거나 누구를 만날 수가 없어 근처의 창고에 들어가 쉬어야만 했다.
진사시와 생원시에 모두 입격하다
2월 25일 저녁, 과거시험을 본 뒤 단성현에서 머무르고 있던 금난수에게 함께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시험을 친 남인록이 찾아왔다. 남인록은 과거시험을 친 삼가현에서 오는 길이었는데, 그는 기쁜 얼굴로 금난수의 이름이 생원시 방목에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금난수의 마음 역시 하늘을 날 듯 하였으나, 남인록이 생원시에 입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기에 자못 덤덤한 말투로 방목을 직접 보지 못하였으니 성적이 높고 낮은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꼭 시험 잘 본 애들이 이런다.
다음날, 하동(河東) 수령이 녹명관(錄名官)을 맡아 합천에서 오는 길에 금난수에게 들러 생원시 방목은 보았느냐고 물었다. 금난수는 더 이상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 바로 관아에 들어가 방목을 찾아 살펴보았다. 방목에는 금난수가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입격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생원시는 12인 중 2등으로, 진사시도 마찬가지의 성적으로 입격한 것이었다. 좋은 성적이었기 때문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틀 뒤인 2월 28일에 금난수는 남인록, 남치리과 함께 여러 사람을 찾아다니며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입격을 축하하는 술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금난수는 바쁘게 인사를 하러 다녔다. 권문현 형제에게도 들렀고, 권문현의 장인인 이원에게도 들러 인사하였다. 금난수, 남중수와 함께 시험을 친 권자유도 진주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축하를 하러 찾아왔다. 이제 복시(覆試)를 치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복시 보기 전에 술을 마셔둬야
복시(覆試)가 열리는 곳은 현풍(玄風)군이었다. 금난수와 함께 단성현을 출발하여 복시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권자유, 남치리, 황경숙이었다. 단성에서 단계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었는데, 달리 방을 구하지 않고 창고에 머무르게 되었다. 밤에 권문저가 술을 들고 찾아와 복시를 잘 보고 오라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날이 밝자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삼가에 도착해 아침식사를 하고 황경숙과 좀 더 바삐 길을 나섰다. 합천에 도착해도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더 멀리 가지는 못하고 남원(南院) 근처의 사첫방(손님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저물녘에서야 권자유와 남치리가 도착하였다.
다음날에도 황경숙과 먼저 길을 나섰다. 초계(草溪) 팔진역(八鎭驛)에서 아침을 먹고 강을 건넜다. 이 날은 창녕(昌寧) 옥야(沃野)의 하씨 집에서 머물렀고, 다음 날에서야 비로소 복시가 이루어지는 현풍에 당도할 수 있었다. 도착해서 적당히 행장을 풀어놓고 바로 녹명(錄名)을 하러 갔다.
이날 금난수는 오랜만에 만나는 벗들도 찾아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예안에서 온 먼 친척인 금응협(琴應夾)과 그의 사위인 권대기(權大器), 그리고 김부륜(金富倫)을 만나보았고, 저녁에는 처남인 조목(趙穆)을 만났다. 자주 만날 수 없었던 벗들을 만나보아 반가웠으나, 이제 시험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벗들과 깊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복시 다음으로 미뤄 두어야 함이 아쉬웠다.
복시에서 청렴과 왕도를 논하다
3월 11일. 금난수는 복시(覆試) 시험장에 들어섰다. 과연 이미 향시(鄕試)에서 한 번 걸러진 인원이 모이는 만큼 시제가 변경되는 것과 같은 혼란은 없었다. 금난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시제를 확인하였다. 시제는 “조변(趙抃)이 주렴계(周濂溪)를 알아보지 못하다[趙抃不識周濂溪]”였다. 두 사람은 모두 북송대의 관리였다. 조변은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탐학한 관리를 탄핵한 청렴한 관리였고, 주렴계는 곧 주돈이(周敦頤)인데, 성리학의 틀을 만든 학자로 여겨질뿐더러 현령으로서 고을을 다스리는 데도 명쾌하였다. 조변은 주돈이의 면면을 알지 못하고 주위의 참소로 인해 주돈이를 엄히 대하였으나, 곧 직접 주돈이의 행실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깨달았다. 이 시제는 곧 이러한 일화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논하게 한 것이었다.
첫 시험 후 이틀만에 다시 치러진 시험에 내걸린 시제는 “검은색 홀(圭)을 바치다[錫玄圭]”였다. 검은색 홀은 요(堯) 임금이 우(禹)임금에게 하사한 것으로, 천하를 뜻하였다. 우 임금은 치수(治水)를 마친 뒤 이것을 순(舜)임금에게 주었다. 이 일화는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나오는 것으로, 금난수와 여러 거자들은 이 주제로 부(賦)를 지어야 했다. 또 이틀 뒤에는 책문(策文)을 짓는 것으로 6일간에 걸친 복시를 마쳤다. 과거시험을 치는 동안 지칠 대로 지쳤는지 금난수는 따로 다른 벗들을 만나지 않고 바로 현풍을 떠났다.
소과를 보러 서울로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전, 아버지와 여러 친척 형들을 모시고 인사를 올린 뒤, 또 퇴계 선생에게도 나아가 인사를 올렸다. 먼 길을 가기 전에 응당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려야 했고, 또한 과거시험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있었던 만큼 인사를 올리는 그 마음가짐은 더욱 비장했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인사를 마친 뒤에도 전별은 그치지 않았다. 동촌에 사는 고종사촌 형인 손규를 만나보고, 손환, 권덕원 등과 함께 청원대(淸遠臺)에 올라갔다. 청원대에 올라가 있자니 처형인 조목이 나와 함께 바람을 쏘였다. 날이 저문 뒤에는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밤 뱃놀이를 즐겼다. 동네 사람인 심룡(沈龍)이 그의 형과 함께 길 가는 데 반찬으로 부조하는 것이라며 닭 두 마리를 들고 왔다. 꼬꼬거리는 닭 두 마리를 종에게 맡긴 뒤, 처가에 가서 하직 인사를 마쳤다.
다음날에는 온계(溫溪)에 사는 두 고모와 고모부들을 뵙고 인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길을 나섰다.
금난수는 일단 말구종과 짐말까지 함께 대동하여 육로로 이동하였다. 의동(義洞), 영천(榮川), 장천역(鏘川驛)을 거쳐 죽령(竹嶺)을 넘는 것이 일단 첫 관문이었다. 죽령 너머 골짜기 입구에서 아침을 먹고 수고한 말에게도 먹이를 먹이고 있자니 서울에서 내려오는 권의중과 이연량이 금난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회포는 풀지 못하였다.
단양(丹陽)에서 하룻밤을 잔 뒤, 강가에서 아침을 먹고는 양식으로 삼으려 함께 가지고 온 쌀 10말을 장귀복(張貴福)에게 맡겨 배로 싣고 가도록 하였다. 금난수 자신은 누암(樓巖)에서 그 배를 타기로 약속하였다. 이 날 황강역(黃江驛) 역사에서 자게 되었는데, 서울에 산다고 하는 이홍이라는 사람과 같은 방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다음날에는 배를 타야 했기 때문에, 타고 온 말은 은석(銀石)에게 맡겨 육로로 끌고 서울에 가도록 하였다. 마침내 먼저 출발한 배를 타기 위해 도착한 누암에서는 배를 기다리며 객주(客主) 안금산(安今山)의 집에 거처하기로 하였다. 이틀을 기다렸지만 이상하게도 배가 오질 않았다. 강가에서 이제나 저제나 배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 새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 열 명이 나루에 모이게 되었다. 과거시험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누암이 남쪽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중간 기착점이었던 만큼 거자들이 속속 모여든 것이었다. 금난수도 더 이상 자기 배를 기다리지 않고 이들과 함께 오후에 출발하는 서울 가는 배에 탑승하였다.
이 배는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가서, 마침내 7월 28일 아침에 한강에 도착하게 되었다. 길을 떠난 뒤로 꼬박 8일이 걸린 것이다. 한낮이 되어서야 도성 문 안으로 들어갔고, 일단 고된 여정에 피곤한 몸을 뉘일 곳은 함께 배를 타고 온 권경룡의 집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하루 이상 머무르지는 않고 다음날 바로 예안 경저(京邸)에 김덕전, 권경로와 함께 거처를 정하였다. 금난수 일행에 앞서 송이로가 일찍부터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제 과거시험 날까지 열흘 남짓 남아 있었다.
장악원에서 소과에 응시하다
그간 준비해 온 식년시 소과 회시를 닷새 앞둔 8월 4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금난수는 한성부 안에 있는 4개의 학당 중 하나인 서학(西學)에 가서 녹명(錄名)을 하였다. 이번에 금난수가 치게 된 식년시의 경우에는 시험 10일 이전에 녹명소에서 과거 응시자의 자격요건을 심사하여 응시원서를 받아주었다. 이때의 녹명은 단순히 자신의 인적사항과 신원보증서인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녹명은 또 하나의 시험이었다. 예문관, 성균관, 교서원, 승문원의 관리들 앞에서 먼저 조흘강(照訖講)이라고 하는 시험을 먼저 봐야 했던 것이다. 소과의 조흘강은 시험의 내용이 지정되어 있는 경전인 소학과 가례의 내용을 외는 방식으로, 응시자의 자격을 먼저 시험하기 위한 장치였다. 금난수가 무사히 조흘강을 통과하고 나자, 녹명관은 금난수에게 결격 사유가 없는지 확인하고 그의 이름을 녹명책에 기입하였다. 그리고 시험 장소는 제 2소인 장악원(掌樂院)으로 배정받았다.
시험날인 8월 11일, 장악원에서는 평소와는 달리 아무런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장악원의 너른 뜰에 자리를 잡고 앉은 금난수와 여러 거자들에게 내려진 시제(詩題)는 두보의 시 「登岳陽樓」의 한 구절인 “늙고 병들어 외로운 배 한 척 뿐이다.[老病有孤舟]”였고, 부제(賦題)로는 「맹자」의 한 구절인 “선을 좋아하면 천하를 다스려도 넉넉하다.[好善優於天下]”가 출제되었다. 시와 부를 짓고 나온 이틀 뒤인 8월 13일에는 생원시를 치렀다. 이제 모든 시험은 끝났고, 결과를 기다릴 뿐이었다.
말 타고 위풍당당 시가행진
서울에 올라와 8월 11일에 진사시, 8월 13일에 생원시를 치른 금난수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과거시험의 결과인 방목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나라 때 요재지이(聊齋志异)를 지은 작가 포송령(蒲松齡)은 과거에 여섯 번 낙방했는데, 그가 지은 글 「거자칠변(擧子七變)」이 방목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금난수의 마음을 대변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과장에 들어갈 때는 온몸이 무거운 거지 몰골이요,
둘, 몸 수색 받을 때는 죄수 몰골이며,
셋, 칸막이 방에 들어앉으면 밖을 기웃거리는 새끼벌 몰골이요,
넷, 시험이 끝난 후 밖으로 나오면 병든 새 몰골이며,
다섯, 결과를 기다릴 때는 목이 묶인 채 안절부절 못하는 잔나비 몰골이요,
여섯, 낙방을 확인한 후에는 약 먹은 파리 몰골이요,
일곱, 홧김에 세간을 부수고 나면 제가 품은 알을 깨뜨려 버린 비둘기 몰골.
마침내 8월 19일에 방목이 나왔다. 방목에는 금난수의 이름이 식년시 소과의 생원시에서 선발된 100명 중 46위로 적혀 있었다. 평균 이상의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다음날 아침 금난수는 진사시의 장원 홍성민(洪聖民)과 생원시의 장원 조정기(趙廷機)을 만나 서로 축하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낮에는 안동(安東) 경저(京邸)로 가서 같은 해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모이는 회합인 방회(榜會)를 열었다. 방회는 하룻저녁에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에는 삼청동(三淸洞)에서 다시 방회가 열렸다. 이후로 며칠간 금난수는 서울에 있는 아는 사람들을 만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신세진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다녔다.
방목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은 기쁨을 느낀 날로부터 보름이 지난 8월 29일, 마침내 창방식(唱榜式)이 열렸다. 합격자의 이름을 부르고 패를 수여하는 의식인데, 소과에 합격한 금난수는 백패(白牌)를 받았다. 보름간 이 날 입을 공복(公服)을 마련해 놓은 것은 물론이었다. 다음날에는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은숙배(謝恩肅拜)를 거행하였다. 임금 뿐 아니라 공자 및 성현들에게 감사하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날에는 급제자들이 모여 성균관의 문묘(文廟)에 참배하였다.
같은 날에는 사마시(司馬試, 생원‧진사시)의 합격자들이 말을 타고 서울 시내를 누비는 유가(游街)를 하게 되었다. 장원인 조정기의 집에 모인 급제자들은 장원을 한 조정기가 대열의 맨 앞에 세워 제마수(齊馬首)로 삼았다. 악대를 동원해 신나는 음악을 울리며 친지, 선배 등의 집에 방문해 감사인사를 올리는 유가는 며칠간 성대하게 계속되었다.
1561년(명종 16)- 금난수 32세
2월 18일
시험장에 들어가서 진사시進士試를 보았다. 처음에 구경부九經賦와 윤덕천시潤德泉詩를 출제하였으나 다시 인도민정부人道敏政賦로 바꾸어 출제하고, 또 바꾸어 인심유위부人心惟危賦로 출제하였으며, 또 다시 바꾸어 도심유미부道心惟微賦와 이자승주시二子乘舟詩를 출제하였다. 마침내 시제가 정해져 글을 지었다.
2월 20일
시험장에 들어가 생원시生員試를 보았다. 매번 시험장에 들어가 제술製述을 할 때마다 내가 민첩하지 못하여 남보다 뒤에 시험장을 나왔으나 이날은 날이 어둡기 전에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왔으니, 매우 다행이다.
2월 22일
조자앙과 신뢰는 함안으로 길을 나서고 남중수는 권자유와 함께 삼가에 남았다. 나는 남성중과 함께 단성으로 돌아와 단계에 들렀다. 단계 품관品官이 나와서 맞이하고 진주 유생이 술자리를 차렸는데, 길에서 친구가 만류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들어가 좌정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서 일어나 나와 창고 집에서 쉬다가 말을 달려 죽정竹亭에 들어가 류화중을 만나보았다. 류화중이 있었다. 단성에 당도하니 날이 벌써 어스름 녘이었다.
2월 25일
산음 수령을 만나보았다. 이날 황경숙이 찾아왔기에 정무중과 송중윤과 함께 강가에 나가서 정긍보를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중수가 삼가에서 왔는데, 들으니, 나의 이름이 생원시 방목에 들었다고 하였다. 방목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입격의 진위와 성적의 높고 낮음은 알 수 없었다.
2월 26일
하동河東 수령이 녹명관錄名官 자격으로 합천에서 오는 길에 나에게 들렀다. 내가 현에 들어가 방목을 찾아 살펴보니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입격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원시는 2등 12인으로 입격하고, 진사시도 2등 12인으로 입격하였다.
2월 28일
남중수와 남성중과 함께 황 찰방黃察訪을 뵈었다. 황경숙이 자리에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권명숙과 권흥숙을 찾아보았다. 권명숙이 술을 대접하였다. 이어서 청향당을 뵈었다. 저녁에 권자유가 진주에서 왔다.
3월 7일
권자유·남성중·황경숙과 함께 현풍玄風으로 길을 나서서 단계에 당도하니 날이 저물어 창고 방에서 잤다. 밤에 권찬숙이 술을 들고 찾아왔다.
3월 8일
비가 내렸다. 삼가에 당도하여 아침을 먹고 황경숙과 함께 먼저 길을 나서서 합천에 당도하니, 비가 심하게 내리기에 남원南院 근처의 사첫방에 잤다. 권자유 무리가 저물녘을 틈타 뒤이어 왔다.
3월 9일
황경숙과 함께 길을 나서서 초계草溪 팔진역八陳驛에 당도하여 아침을 먹고 나루를 건너 창녕昌寧 옥야沃野의 하씨 집에서 잤다. 황선숙黃善叔도 단성에서 왔다.
3월 10일
현풍에 당도하여 계남溪南 곽계성廓繼成의 집에 임시로 거처하였다. 녹명錄名을 하였다. 그 참에 금협지琴夾之【이름은 응협應夾이다.】, 권경수權景受【이름은 대기大器이다.】, 김돈서金敦叙【이름은 부륜富倫이다.】 및 여러 친구들을 두루 찾아보았다. 저녁에 조 상사趙上舍(조목趙穆)【이전에 조 상사를 보러 갔다.】도 왔다.
3월 11일
시험장에 들어갔다. “조변이 주렴계를 알아보지 못하다.[趙抃不識周濂溪]”에 대한 논論을 지었다.
3월 13일
시험장에 들어갔다. “검은 색 홀[圭]을 바치다.[錫玄圭]”라는 내용으로 부(賦)를 지었다.
3월 15일
책문策文을 지었다. 이날 조사경趙士敬과 작별하였다.
7월 7일
부형들을 모시고 영숙瑩叔 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7월 15일
퇴계 선생께 나아가 뵈었다.
7월 16일
종이 장인을 만나러 갔다. 그길로 동촌 손숙향孫叔向【이름은 규葵이다.】형을 찾아보고 돌아와 손중방孫仲芳【이름은 환芄이다.】과 권중옹權仲雍【이름은 덕원德遠이다.】과 함께 청원대淸遠臺에 올라갔다. 조 상사(조목)가 나왔다. 날이 저물어 내려와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남 내금南內禁도 나왔다. 밤이 깊어서야 마침내 마쳤다.
7월 19일
조 상사가 보러왔다. 심룡沈龍이 생닭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길가는 반찬으로 부조를 하였다. 한 마리는 곧 그의 형이 보낸 것이다. 월천에 가서 하직인사를 하였다.
7월 21일
영천榮川 종함從咸 집에서 아침을 먹고 황천민黃天民 형을 찾아보고 장천역鏘川驛 역사에서 잤다.
7월 22일
아침에 죽령竹嶺을 넘어 골짜기 입구에서 아침을 먹고 말먹이를 먹였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권경의權景義 의중宜仲과 이연량李衍樑을 만났다. 단양丹陽에서 잤다.
7월 23일
강가에서 아침을 먹고 양식 쌀 10말을 장귀복張貴福에게 배로 싣고 가도록 하고 나는 누암樓巖에 당도하여 배를 타기로 약속하였다. 황강역黃江驛 역사에서 잤다. 서울에 사는 이홍李鴻이라는 자가 내려왔기에 함께 잤다.
7월 24일
유신維新에 당도하여 타고 온 말을 은석銀石에게 부쳐 육로로 끌고 가 서울로 보내도록 하였다. 누암에 당도하여 객주客主 안금산安今山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7월 25일
단양에서 올라오는 양식을 실은 배를 기다리면서 유숙하였다.
7월 26일
단양에서 오는 배를 기다렸으나 만날 수 없었다. 이봉원李逢原【이름은 안도安道이다.】, 권시백權施伯【이름은 경룡景龍이다.】, 김병란金秉鸞 및 밀양密陽에 사는 신유안申有安 여우汝虞, 민우익閔友益 여겸汝謙, 노산두盧山斗 탁이卓爾, 류경담柳景潭 중함仲涵, 김수심金守愼 사흠士欽과 서울에 사는 김수金修 중성仲誠 등을 모두 만나 회시會試를 보러가는 사람들이 한배를 탔다. 오후에 배가 출발하여 밤낮 쉬지 않고 가서 28일 아침에 한강漢江에 당도하였다. 한낮에 도성 문안으로 들어가 권시백 집에서 잤다.
7월 29일
예안禮安 경저京邸로 옮겨 김덕전金德全, 권경로權慶老와 함께 거처를 정하였는데, 송이로宋而老가 이미 오래전부터 우거하고 있었다.
8월4일
서학西學에서 녹명錄名을 하였다. 제2소에서 시험을 보기 때문이다. 이날 류미숙柳美叔【이름은 찬贊이다.】도 왔다.
8월 11일
제2소에 입장하였다. 제2소는 장악원掌樂院이었다. “선을 좋아하면 천하를 다스려도 넉넉하다.[好善優於天下]”가 부제賦題이고, “늙고 병들어 외로운 배 한 척 뿐이다.[老病有孤舟]”가 시제詩題였다.
8월 13일
입장하여 생원시를 치렀다.
8월 19일
방목榜目이 나왔다. 생원시에 3등等으로 참방한 사실을 알았다.
8월 20일
아침에 두 시험의 장원壯元을 뵈었다. 한낮에 안동安東 경저京邸에서 방회榜會를 하였다.
8월 21일
삼첨동三淸洞에서 방회를 열었다.
8월 22일
이 승지李承旨 댁에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8월 23일
김이정을 보러갔다.
8월 24일
대궐에 들어가 이 승지를 뵈었다.
8월 27일
김이정이 말을 보내어 부르기에 가니 이봉원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조용히 술잔을 나누고 밤이 깊어서야 마침내 돌아왔다.
8월 29일
응방應榜을 하였다.
8월 그믐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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