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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딸 사위며느리 서얼 모두 똑같은 자손

by 소주인

코로나 직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안은 제사를 지냈다. 조상신의 가호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조상신의 음복이라면 식구 모두가 누려야 한다면서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등 절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기까지도 모두 제사에 참여하게 했다. 물론 젯상을 차리는 사람들은 후진적 전통에 따라 며느리들이었지만...


아무튼 모두를 제사에 참여하게 하는건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선후기에 종법질서가 강화되기 전에는 제사에 이렇게 모든 집안의 후손들이 참여하곤 했던 것 같다.(직접 나서서 절을 했는지, 아니면 제수품만 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종법질서의 강화에도 뭐 나름의 이유가 있고, 나름의 장점이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가부장제를 등에 업은 소인배들이 패악을 부리게끔 한 원흉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금난수가 살던 16세기는 과도기였다. 균분상속에 따라 처가와 외가에서 상속을 받을 여지가 있었던 만큼, 부계만큼이나 모계 역시 중요시되었다. 상속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제사의 의무를 질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외가와 처가 제사에도 참여하고 제수품을 내놓는 것은 당연했다. 또 양반들의 통혼이란 결국 집안의 결속이었고, 상호간의 존중을 위해서라도 외가와 처가에 소홀할 수 없었다.


금난수 역시 처가 제사에 참여하곤 했다. 금난수의 처는 월천 조목의 누이였다. 조목은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였고, 금난수와도 형제처럼 가까이 지냈다. 금난수는 결코 처가 제사에 소홀할 수 없었다. 향시를 치르고 반 년 만에 집에 돌아온 금난수는 먼저 조부의 기제사를 치른 직후 장인 조대춘의 기제사에도 참여해야 했다. 하지만 기일이 너무 촉박해서 제삿날에는 갈 수가 없었고, 대신 성묘를 하기로 했다. 처가가 있는 월천에는 조대춘의 묘도 있었다. 금난수가 성묘를 한다고 하자 금난수의 손윗동서인 권억수도 동행하였다.


두 사위가 성묘를 끝낸 뒤, 월천 조목 등 처가의 여러 사람들은 함께 퇴계 선생을 뵈러 고산에 가자고 하며 서로 소매를 끌었다. 혼맥으로만 엮인 것이 아니라 학맥으로도 엮인 인연이었다. 금난수는 퇴계 선생에게 인사를 한 뒤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한동안 고산에 머무르기로 했다. 얼마 뒤 장모의 기제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가 제사에 사위가 참석하는데, 서얼이라고 조상 모시기에 빠질 수는 없었다. 서얼도 적자와 마찬가지로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자손이었다. 물론 상속분은 적자에 미치지 못했지만. 금난수에게는 서얼 사촌아우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무생(茂生)과 몽수(夢壽)였다. 금난수의 부친인 금헌이 사망하여 상장례를 할 때 이들도 함께 참여하였고, 산소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도 이들은 배제되지 않고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음력 2월은 이제 슬슬 언 땅이 풀리고 산소에도 풀이 돋아날 때었다. 금난수는 금몽수를에게 산소가 있는 주봉(主峰) 아래 땅을 갈아 일구어 놓은 곳에 소나무를 심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딸 역시 조선 후기 전까지는 아들과 같은 수준의 상속을 받았다. 적자상속이 일반화된 시점에도 딸들은 시집을 가면서 일정 정도의 재산을 분배받았다. 금난수의 고모들과 누이들은 균뷴상속이 일반적이었던 때에 살았던 여성들인지라 아들과 똑같이 상속을 받고, 제사에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제수품을 준비하는 등의 의무를 다했다.


금난수 조부모의 기제사에는 금난수의 사촌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는데, 시집을 간 고모들과 사촌 누이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먼저 봉화로 시집간 누이가 제사에 참여하러 왔고, 온혜로 시집간 두 고모와 그들 중 한 쪽의 딸인 고종사촌 누이도 함께 왔다. 그녀와 혼인한 사위 금보는 함께 오지 않았다. 고모들과 누이는 제사에 참석하러 오면서 고산에 들러 두 고모의 손자들인 이면도와 이영승을 데리고 오려 하였는데, 이면도는 오지 않고 이영승만 자신의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를 모시고 나타났다.


보통 이렇게 친정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경우 그 남편들과 아들들, 손자들을 데리고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씨 집안으로 시집간 고모는 사정이 있어 오지 않고, 고종사촌 손규가 혼자 손씨 집안을 대표하여 제사를 지내러 왔다. 조상의 DNA를 물려받은 다 같은 자손 아니겠는가. 아들 딸들이 모두 모여 음복하는 화목한 집안이야말로 조상의 음덕일지라.




1561년(명종 16)- 금난수 32세



5월 5일

아침에 월천月川에 들러 성묘를 하였다. 부장 권중기權重器 언수彦受도 왔다. 제사에 참석하고 오후에 퇴계 선생을 뵈었다.


5월 20일

월천에서 장모의 기제사를 지냈다.


5월 23일

금경흡과 주대휴와 함께 강을 건너서 조월천 형을 만나보고 계집종이 죽은 것을 위로하였다.


1577년(선조 10)- 금난수 48세


2월 14일

이봉원李逢原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얼 아우 몽수夢壽를 시켜 산소가 있는 주봉主峰 아래 갈아 일구어 놓은 곳에 솔을 심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5월 1일

봉화 누이가 초하루 제사에 참석하고 오십복五十福 집에 돌아가서 잤다. 그의 아들 산기山起가 배행하였다. 온혜溫惠 두 숙모와 금 생원 누이도 왔다. 오는 길에 고산에 들러 이면도李勉道를 만나보았는데, 이영승李永承이 배행하였다. 숙부 및 구직경과 손숙향 형이 모두 초하루 제사에 참석하였다.




참고-딸과 아들 구별이 없었던 제사봉행


오늘날 흔히 알고 있는 장손 중심의 봉제사(奉祭祀)는 대체로 17세기 후반에 정착한,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이다. 이를 참고로 하여 1969년 제정된 가정의례준칙과 가정의례법은 한국전쟁 이후 전통적 예제가 순조롭게 전승되지 못했던 한국 사회에 하나의 규범으로서 기능하며 공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가풍에 따라 각기 달리 변용되어 전해져 내려오던 예제가 인위적으로 일원화되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제사 방식은 만들어진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재산의 상속과 밀접한 영향을 가지고 있는데, 현대 사회에서도 그렇듯 조선 후기 이전에는 자녀 모두에 대한 균분상속이 이루어졌고, 제사봉행이라는 의무 역시 모든 자녀들이 나누어 가졌다. 이를 윤회봉사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17세기까지 일기자료에서 나타나는 제사 봉행 양태 역시 집안마다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제사를 지낼 때 모든 자녀(시집간 여성까지)가 함께 제물을 마련하여 지내는 경우,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집간 여성이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 장인‧장모의 제사를 지내러 처형(혹은 처남)이 있는 처가로 사위가 가는 경우, 외손이 외조부모의 제사를 지내는 경우 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제사가 봉행되었음을 매원일기, 계암일록, 성재일기 등 16, 17세기에 쓰인 일기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8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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