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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제자쯤은 손바닥 안에

by 소주인


원로~중견 연구자들을 사석에서 만날 때는 연예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글로만 뵙던 분을 학회든 뭐든 어딘가에서 실물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꽤 신기한 느낌이지만 같이 술이라도 한 잔 마시게 되면 나 스스로가 뭐나 되는 양 기분이 들뜨게 되곤 한다. 나같은 잔챙이를 상대해 주실 때도 정중하게 대해 주셨던 그분들은 아마 나와 (불운하게도) 엮여 있는 나의 지도교수(들)를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이리라.


간혹 나의 지도교수와도 긴밀한 관계인 분들은 나의 지도교수를 놓고 농담을 던져서 내가 어쩔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생활은 참말로 어려운 것. 좋다 해도 좋은 것이 아니요, 안 좋다고 해도 안 좋은 것이 아닌 복잡미묘한 대화가 오가고 나면 스스로 제대로 대답을 한 것인지 몰라 그 자리가 끝난 다음까지 좌불안석. 내가 석사과정에 갓 들어갔을 때, 박사과정 선배가 가르쳐 준 사회생활의 진리가 아직까지 내 마음을 울린다. 누가 뭘 물었는데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땐 그냥 씩 웃어라.



금난수는 퇴계 문하를 떠난 뒤 계속 두류산에 가 보고 싶었다. 두류산의 경치도 구경했지만 두류산 자락에 살고 있는 당대의 명유 남명 조식을 한번쯤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금난수의 스승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리고 학문적으로 대립하기도 한 일종의 학문적 라이벌이자 동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오로지 서신으로만 왕래하였다. 금난수가 조식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길이 얼거나, 같이 갈 사람이 없거나 해서 두류산행과 조식 방문 계획은 번번히 어그러졌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기회가 생겼다. 평소 조식과 교류하던 이원이 금난수를 조식에게 소개해 주기로 한 것이었다.


금난수는 정구, 권문현, 이원, 그리고 생원 김용정과 함께 조식을 찾아갔다. 조식은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두류산 아래에 뇌룡당(雷龍堂)을 지어놓고 이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일행은 각자 지참하고 온 술을 내 놓았다. 묵향 가득하던 뇌룡당에는 금세 술 냄새가 진동했다. 다들 얼큰하게 취하자 조식은 먼저 노래를 부르면서 좌중에게도 노래를 부르도록 권하였다. 하지만 옛 노래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지은 노랫말로 노래를 하라고 하였는데, 다들 쩔쩔매는 것 같으면서도 즐기는 눈치였다.


조식은 명랑한 성격이라서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옆에 앉은 이원을 뼈 있는 농담으로 놀리는 것을 좋아하였다. 물론 이원도 이에 질 새라 농담으로 응수하며 조식을 놀려대었다. 그러자 조식은


“내가 이처럼 빈정거려도 화를 내지 않으니 이러한 점은 본받을만하다”


라고 또 놀리는 것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하였다. 금난수는 이를 보고 조식이라는 사람은 기개가 있으나 사람이 원만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여전히 표정은 웃는 채였다.


그 외에도 조식은 옛 선비들과 관련한 고사를 자기 방식으로 개성 있게 해석하였는데, 금난수는 이를 흥미롭게 여겨 기억해 두었다. 한참 이야기 하던 조식이 문득 금난수에게


“그대는 퇴계 문하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라고 물었다. 금난수는


"다행히 한 고을에 있으면서 마을이 가까워 때때로 나아가 뵐 따름이지 배우는 바는 없는데, 또 무슨 말씀드릴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겸손하게 대답하였는데, 조식은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퇴계의 제자를 놀려보고 싶었는지


“배운 것이 없다니, 그대의 말이 과감하다”


라고 짐짓 놀란 척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퇴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러 유생들이 옛 현인들의 말만 찾아 따지기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고, 퇴계선생에게 누가 무엇을 묻는 경우는 많으나 퇴계선생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은 없으니 퇴계선생은 누가 뭘 묻거든 묻지 말라고 제지하는 것이 낫겠소. 누가 나에게 뭘 물어도 나도 똑같이 할 것이오."


라고 하며, 금난수에게 농반 진반인 자신의 말을 퇴계선생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조식이 세상의 유생들을 조롱하듯 말하니 금난수는 차츰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조식은 금난수가 곤란하든 화가 나든 상관 없다는 듯 자고 가라고 권하였다. 하지만 조식과 더 상대하기 어려웠던 금난수는 집안일을 핑계 대며 사양하고 물러나왔다.




1561년(명종 16)- 금난수 32세


4월 18일

이 훈도, 생원 김용정金用貞 및 권명숙, 정긍보와 함께 돌아가 남명을 뵙고 뇌룡당雷龍堂에 좌정하였다. 각자가 술을 가지고 왔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자 남명이 먼저 노래를 부르면서 좌중에도 권하여 모두 노래를 하였다. 옛 노래를 부르지 않고 스스로 지은 말로 노래를 하도록 하였다. 성품이 높고 뛰어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으니 과연 이전에 들은 대로였다. 기개는 보통이상이나 원만한 뜻이 모자랐다. 항상 이 훈도를 조롱하지만 놀리는 가운데 진실이 있었다. 이 훈도도 지지 않았는데, 남명이

“내가 이처럼 빈정거려도 화를 내지 않으니 이점이 본받을 만하다.”고 운운 하였다.

또 말하기를,

“길재吉再 선생은 주상이 토지 백 결結 남짓을 내려주었으나 모두 곡식을 갈아먹지 않고 대나무를 심었는데, 나중에 관죽전官竹田이 되었다. 이 대단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야사에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하니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또 이색李穡에 대한 고사를 말하기를,

“태조가 그를 부르자 전각 아래에 나아가 서 있으면서 절을 하지 않았는데, 태조가 전각을 내려와 읍揖을 하니, 이색이

‘이제 서로 보았으니, 돌아가려오.’하여

마침내 귀가를 허락하였다. 이는 큰 절개이나 후대 사람들이 모르면서 의심을 하였으니, 잘못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노군자(老君子)만 있고 소년군자(少年君子)는 없으니, 내가 전후의 변천을 살펴보건대, 흰데 검다 하고 검은데 희다고 하니, 조금도 서로 비슷한 점이 없다. 비록

‘군자답다.’고 하나,

내가 믿지 못하겠다.” 고 운운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대는 퇴계 문하에서 무엇을 배우는가?”하기에,

“다행히 한 고을에 있으면서 마을이 가까워 때때로 나아가 뵐 따름이지 배우는 바는 없는데, 또 무슨 말씀드릴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니, 남명이

“그대의 말이 과감하다.”고 운운하였다.

또 말하기를,

“퇴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는 호남의 여러 유생들이 퇴계와 성리性理를 논변한 내용을 보았는가? 전현前賢의 논석論釋이 지극하고 극진하여 후생이 전현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데, 전현의 말을 찾아 따지기만 하고 실천하는 힘은 부족하다. 전현의 말을 찾아 실천하지는 않고 성리의 학문만 높게 논하는 일이 옳은지 모르겠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 비록 묻더라도 퇴계는 그를 제지하는 것이 옳겠다. 퇴계가 또한 그렇게 할 것인지는 내가 비록 자신할 수는 없으나 혹시 나에게 물어 온다면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전현의 말을 깨닫지 못했는데, 어느 겨를에 다시 성리를 논하겠는가. 그대는 이 말을 퇴계에게 고하라.”고 하였다.

또한 만류하여 자도록 하였으나 속히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사양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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