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에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국가가 미치는 영향력은 아마 굉장했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내가 차마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개항기에 조선에 온 외국인들의 눈에는 조선 사람들이 차려입은 흰 옷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많은 조선인들이 흰 옷을 이유에 대해 추측하기로는 국상 기간 동안에 색 있는 옷을 입지 못했고, 국상 기간은 매번 3년 정도였고, 국상도 잦았기 때문에 그냥 평생 계속 흰 옷을 입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거를 찾기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더 파고들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국상이 나면 모든 백성이 상복을 입어야 했다는건 사실이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옷을 통제할 수 있다니, 굉장한 공권력 아닌가. 상복을 입는 것 이외에도 일상의 많은 부분이 제약되었다. 지금도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영향 속에는 개인의 행동에 대한 제약이 포함된다.
개인의 장례와 국상이 겹치는 경우도 당연히 있었다. 김부필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김부필은 이황 문하의 유명한 학자이자 안동의 명유 중 하나였다.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건립에도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금난수는 학문의 선배를 대하는 마음으로 김부필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시시때때로 인사를 올리곤 했다. 또 금난수와 같은 집안인 금응훈, 금응협과는 고종사촌이었기 때문에 금난수도 그의 먼 인척 중 하나였다. 김부필은 1477년 10월에 사망하는데, 금난수는 같은 달 14일에 부음을 듣고 그의 빈소가 있는 오천으로 가서 곡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빈소가 차려져 있는 약 3개월간 김부필의 상례 절차마다 참여하였다. 11월 10일에도 김부필의 궤연에 전(奠)을 올렸으며, 같은 달 26일에도 도산서원 유사들과 금씨 집안에서 김부필과 가까운 촌수에 있는 친척들이 모여 다시 한 번 전을 올렸다. 12월 12일에는 김부필의 발인이 있었는데, 그의 묘는 거인(居仁)에 정해졌다. 이 때에도 금난수는 참여하여 반혼(返魂)까지 함께하였다. 그런데 이날로부터 엿새 전, 인종(仁宗)의 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의 국상(國喪)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금난수는 다시 한 번 상복을 갈아입는 성복(成服)을 해야 했다.
1577년 11월 29일에 인종(仁宗)의 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승하하였다. 이 때부터 시작된 국상은 조선의 모든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국상 기간에는 국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백모(白帽)·백립(白笠)·백포(白袍)·백의(白衣)·백상(白裳)·백화혜리(白靴鞋履) 등 온통 백색으로 통일된 상복을 입어야 했다. 그 뿐 아니라 이 기간 동안에는 혼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당연히 갑작스럽게 혼사가 취소된 집안도 많았을 것이다. 금난수는 주(朱) 부장(部將)집안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었다. 주부장에게는 홍국량(洪國良)의 아들과 혼인 날짜를 잡은 딸이 있었는데,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혼서와 예물을 보내는 납폐를 하는 날 국상 소식이 전해졌다. 안타깝게도 혼례 준비는 중지되었고, 혼서함을 짊어지고 가던 함진아비도 신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도로 돌아왔다. 신랑 신부는 국상이 끝나는 3년 후까지 혼례를 미뤄야만 하게 되었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별다른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 신랑 신부의 부모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1578년 새해를 맞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옷을 입고 새해 벽두를 흥겹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상복을 입은 채로는 흥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1월 1일에 가묘에 참배를 하고서 친척들끼리 서로 세배를 하며 다정한 시간을 보낸 뒤, 1월 3일에는 도산서원에 갔다. 퇴계 이황의 장손이자, 훗날 금난수의 셋째 아들 금개의 장인이 되는 이안도를 가는 길에 만나 함께 서원에 들어갔다. 참배를 하려고 하는데, 문득 자신이 지금 상복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차림으로는 사당에 배알을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당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안도와 금난수는 멋쩍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1577년(선조 10)-금난수 48세
10월 14일
김후조金後凋(김부필金富弼)의 부음을 듣고 오천烏川 집으로 가서 곡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윤이직尹而直【이름은 의정義貞이다.】과 비암鼻岩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11월 10일
김후조金後凋의 궤연에 가서 전奠을 올리고 그길로 진사 정자명鄭子明【이름이 사성士誠이다.】의 여막에 갔으나 자명이 귀가하여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11월 26일
도산 서원 유사 등이 김후조金後凋의 초상에 전奠을 올렸다. 이대용李大用, 이보경李輔卿, 금사임琴士任, 오겸중吳謙仲, 금협지琴夾之, 금훈지琴壎之, 금공숙琴恭叔, 이영승李永承, 채응휴蔡應休 등이 모두 모였다.
12월 12일
거인居仁 장지에 가서 김후조의 장례에 전奠을 올렸다. 장례 뒤에 반혼返魂을 하였다. 이날 성복成服을 하였다. 곧 국휼國恤(국상國喪)을 들은 지 엿새 째 되는 날이다.
12월 6일
주 부장朱部將에게 처녀 딸이 있었는데, 홍국량洪國良의 아들과 이미 혼인 날짜를 정하였으나 혼인을 치를 무렵에 인종대비仁宗大妣의 국상 소식을 듣고 정지하였다. 혼서함을 짊어진 함진아비가 원루院樓에서 자고 도로 돌아갔다.
1578년(선조 11)-금난수 49세
1월 3일
분천汾川의 찰방 이문량李文樑 대성大成 어른을 뵙고 길에서 이봉원李逢原(이안도李安道)을 만나 같이 도산陶山에 갔다. 국휼國恤(국상國喪) 복장으로 참배를 하기가 곤란하여 사당에는 배알을 못하고 잠시 이봉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작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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