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책 방문판매

다들 전집 방판 한번쯤 받아봤잖아

by 소주인

연말이면 알라딘에서는 내가 구매한 이력을 가지고 내가 책 사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요즘은 모종의 구매 루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책을 구매하는지라 아마 올해 나의 등급은 꽤나 낮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한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서점에 가서 책을 구매하곤 했는데 요즘은 거의 인터넷 서점만을 이용하고 있다. 정부 발간물도 몇년 전에는 관공서에서 운영하는 책방에 가서 사야 했는데 이것도 pdf로 구할 수 있거나, 인터넷으로 구매가 가능하니 아주 편리하다. 중고서적을 취급하는 헌책방도 다 온라인에 물건을 올리니, 신통방통한 세상이다.


그래도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외출한 김에 자주 다니던 헌책방엘 들러 보았다. 내가 다닐 때보다 더 서가와 서가 사이가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내가 살이 쪄서는 아니겠지) 책을 한 권 사서 나오는데, 묵직한 책 무게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요즘 나오는 사극을 보면 책방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마저도 서울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장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시골양반들은 어떻게 책을 구했을까?



부친상을 당해 1년간 꼼짝 못하고 집에 머물고 있던 금난수에게 청량산의 승려 경희(慶熙)가 방문하였다. 그는 금난수가 유람을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지, 자신이 이번에 다녀온 풍악산(楓岳山), 곧 금강산의 기이한 경치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금강산은 백두산과 더불어 손꼽히는 명산이었다. 그래서인지 금강산에는 다섯 가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첫째 금강(金剛), 둘째 개골(皆骨), 셋째 열반(涅槃), 넷째 풍악(楓嶽), 다섯째 기달(怾怛)이 그것이다. 일만 이천봉이 뼈처럼 서 있으며, 108곳의 절이 있고, 그 절들 중에서도 이름난 절이 많았다. 그 명성이 자자한 이름을 금난수가 들어본 적이 없을 리 없었다. 금난수는 승려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한참동안 금강산의 경치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경희가 왔다간 사흘 뒤에는 만월사(滿月寺)의 승려 희칙(熙則)이 금난수를 찾아왔다. 그는 경희만큼 기이한 이야기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소매 속에는 금난수를 기쁘게 할 만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박승간(朴承侃)과 박승임(朴承任) 형제의 시축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두 형제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는데, 금난수와는 연배 차이가 꽤 나는 선배였다. 그들은 명산을 유람하고 유산기를 남기기도 했다. 그들의 시를 읽고 있자니 그간 상을 치른다고 놓고 있었던 풍류와 시권기가 다시금 물씬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2년 뒤, 금난수의 큰아들 금경과 셋째 아들 금개는 도산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들들도 집에 없고, 눈이 많이 와서 누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어딘가 유람을 가기에도 어려운 무료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반 자(약 15cm)가 넘게 쌓인 눈을 뚫고 누군가가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많은 짐을 지고 온 승려였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서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승려는 금난수의 눈 앞에 자신이 지고 온 책을 늘어놓았다. 도산서원에서 오는 길인데, 금난수의 큰아들인 금경이 말하길 아버지가 분명 책을 지고 가면 좋아하실 테니 아버지가 원하는 책이 있으면 팔아드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료한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읽어 주어 금난수는 흐뭇한 마음에 승려가 지고 온 책들을 기분 좋게 뒤적거렸다. 금난수가 읽을 만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막내인 금각에게 읽힐 만한 책은 있었다. 금난수는 당음(唐音) 9책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당음은 서당에서 주로 사용하던 한시 교재인데, 당시가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고 중국어의 4성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 수 있어 유용하였다. 노래하듯 당시를 읽을 귀여운 아들 생각에 금난수는 승려에게 지불한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1576년-금난수 47세



6월 9일

청량산 중 경희慶熙가 와서 풍악산楓岳山의 기이한 경치를 이야기하였다.


6월 12일

만월사滿月寺 중 희칙熙則이 박 영해朴寧海 승간承侃과 박 경주朴慶州 승임承任 중보重甫의 시축을 소매 속에 넣어와 뵈었다.



1578년-금난수 49세



2월 3일

봉화 수령이 관아로 돌아갔다. 계윤季胤이 도산에 갔다.


2월 4일

눈이 크게 내렸다. 깊이가 반 자는 되어 보였다.


2월 12일

아이 경憬이 도산에서 책을 파는 중을 보냈다. 당음唐音 9책을 샀다. 집 뒤 산에 솔을 더 심었다.







참고-조선시대의 책쾌의 활동



조선시대에 활동한 책쾌는 민간에 상설 서점이 설치되지 않아 구하기 어려웠던 서적들을 유통시킨 서적상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서쾌라고도 불린다. 책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 판매하였고, 또 원하는 책이 있으면 구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반대로 책을 처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부터 책을 반값에 구매하여 제 값을 받고 되파는 일도 하였다. 국내 서적 뿐 아니라 외국에서 역관들이 들여온 책을 취급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가 되면 책쾌들 중 일부는 서울에 책 대여점인 세책점을 열기도 하였다. 세책점에서 취급한 주요한 서적은 소설이었다. 이 시기 책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조생이라는 사람이 있다. 조신선이라고도 불렸는데, 행적이 신출귀몰하고 많은 책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그는 1711년 책쾌의 대량 처분에서도 살아남았다.


1711년 왕을 모독하는 내용이 담긴 중국 서적 �명기집략(明紀緝略)�과 �봉구감강(鳳州綱鑑)�, 『청암집(靑庵集)』 등이 유통되면서 이 책을 유통한 책쾌들과 역관들이 대다수 처벌당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47년 6월 2일에는 역관들과 책쾌들의 처형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그 수가 백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갔다. 이때 상역(象譯)과 책 장수로서 《청암집(靑菴集)》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벌거벗긴 채 두 손을 뒤로 합쳐 묶어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나란히 엎드려 거의 죽게 된 자가 1백 명 가까운 수효였다.


(…)


약방 제조 채제공(蔡濟恭)이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번뇌(煩惱)하는 것은 단지 주인(朱璘)의 문집(文集) 한 가지 일에 연유해서인데, 여기 한 마디 말로 그것을 깨뜨릴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근래(近來)의 시체(時體)가 새로운 것에 힘을 써서 만약 청(淸)나라 사람의 문집으로 나온 것이 있으면 모두들 한번 보려고 하는데, 어찌 재상(宰相)이 얻어보지 못하는 것을 가난한 선비가 먼저 얻어 볼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봉주강감(鳳洲綱鑑)》에 대하여 승정원에서 펴 보는 즈음에 듣건대 그 인찰(印札) 밖의 양편에 한쪽에는 ‘봉주강감(鳳洲綱鑑)’이라고 쓰였고, 한쪽에는 ‘청암집략(靑菴輯略)’이라고 쓰였다고 하였었는데, 정임(鄭霖)이 공초(供招)한 데서 ‘청암(靑菴)’이라고 말한 것은 틀림없이 이것을 지목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윤혁(尹爀)의 공초에서 ‘청암집(靑菴集)’이라고 한 것은 그가 본래 시골의 사내로 무슨 지식(知識)이 있겠습니까? 약(略)이란 글자는 잘라 버리고 ‘집(輯)’ 자(字)를 ‘집(集)’ 자로 잘못 알았음은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필코 없는 책을 이와 같이 찾아내도록 하시니, 단지 전하의 번뇌만 더할 뿐 어떻게 찾을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이러한 처분에도 불구하고 책쾌의 활동은 활발히 이어졌다. 19세기에 고증학과 금석학 취미가 조선을 휩쓸자, 책을 소장하는 장서각까지 가진 장서가들이 급증하였다. 이들의 수요를 충족시킨 것 역시 책쾌들이었다. 상설 서점이 생긴 20세기에도 책쾌들은 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희귀본 고서 등을 취급하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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