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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 후 반 년만에 처음 본 며느리

요즘애들은 시집살이란걸 한다더라?

by 소주인

전통 어설프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놓지 못하는 망령 중 혼인에 관련된 것들은 많은 아들 딸들을 가슴아프게 만들곤 한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웹툰 <며느라기>가 21세기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는 구시대의 망령을 잘 보여주듯.


쉽게들 말하는 '출가외인'이니, '도리'니 하는 공허한 말들은 18세기 이후 정립된 가부장 위주의 종법질서 위에 올려진 말들이다. 물론 그전에도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친가 이상으로 외가는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외가에서도 상속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단 상속문제가 아닐지라도 17세기까지는 혼인을 하더라도 처가살이를 하는 일이 더 흔한 관습이었기에 외가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외가를 더욱 가깝게 느꼈을 것이다. 좋은 예로 신사임당과 그 아들 율곡 이이를 들 수 있겠다.

또 뇌피셜이지만 며느리가 시집으로 들어와 산다고 해도 동네에서 방귀 좀 뀐다는 집안일수록 며느리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며느리는 내 친구나 지인이나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긴밀하게 얽혀 있는 집안의 딸일 것이기 때문. 혼인이 집안간의 결합이라면 자기 집안과 비슷한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집안을 사돈으로 삼는다는 뜻이니 그 체모를 손상시킬 일은 애초에 안 하는 편이 혼인의 사회적 효용성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며느리가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하는 모습은 성리학자들의 오랜 집념으로 추진한 친영제가 자리잡은 결과였다. 17세기에는 아직 전국적으로 친영제가 자리잡지 못했고, 그 과도기인 반친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혼인 이후 일정 기간동안 부인의 집에서 지내다가 나중에 남편의 집으로 들어오는 방식이다.


쉽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시집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여유가 될 경우 집을 장만해서 부부가 독립하여 살림을 차리는 것 역시 자연스러웠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여러 일기를 보아도 부부가 한 집에서 함께 잠드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괜히 바깥사람 안사람이라는 말이 생긴 게 아닌 것이다. 남편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느라 산사에 들어가 있거나,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자거나, 유람 가거나, 아니면 관직을 얻어 서울에서 지내거나 하면서 집에 붙어있지를 않았다. 그래서 집안일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남편 대신 곳간 관리를 부인이 하게 된 것일까?



금난수의 큰아들 금경도 어느덧 스물네 살. 장가를 들 나이가 되었다. 좋은 혼처를 찾고 있던 중, 이굉중이 금경의 혼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금난수를 찾아왔다. 일종의 중매역이었던 것이다. 이굉중은 갈천에 사는 권 훈도의 딸이 금경과 어울릴 것이라며 금난수의 의중을 물었다. 그 후 약 이레 동안 청량산에 들어가 생각을 정리한 금난수는 권 훈도가 사는 갈천으로 향했다.


갈천의 동네 정자에 다다라 권 훈도에게 사람을 보내자, 곧 권 훈도가 금난수를 맞으러 정자로 나왔다. 아들과 딸을 가진 두 아버지는 처음에는 어색하게 서로 인사했으나, 곧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아이들의 혼사를 논의하였다. 두 사람의 마음이 비슷하였는지 논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논의 후에는 바로 자신의 서재가 있는 고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흘 뒤, 도산서원에서 고을 일을 논의하는 자리에 나온 아들 금경과 마주친 금난수는 아들에게 그의 혼사가 정해졌음을 일러 주었다. 일은 착착 진행되어 마침내 혼사 이야기가 처음 나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5월 5일, 혼서를 든 함진아비가 권 훈도의 집으로 갔다.


이튿날 금난수의 서얼 육촌형제 금복희, 서얼 사촌형제 금몽수가 금경을 데리고 신부가 있는 갈천으로 갔다. 이날 자신의 아들 금몽수와 함께 금난수의 숙부인 금희도 집안의 큰일에 참여하러 왔다. 금난수의 부친이 사망한 이 시점에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은 금희였다. 신랑을 처가까지 바래다 준 금복희와 금몽수는 다음 날 돌아왔고, 혼례를 무사히 치른 금경은 그보다 이틀 늦은 5월 9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할아버지인 금희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나흘을 자기 집에서 보내며 여러 친지에게 인사하고, 축하를 받은 금경은 다시 새색시가 기다리고 있는 갈천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큰아들의 혼례가 일단락되자, 처음으로 자식의 인륜지대사를 치러 본 금난수와 그의 아내는 초현에 올라 함께 청량산을 바라보며 서로의 감회를 나누었다.



5월에 장가를 든 큰아들 금경은 반 년 가까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 비록 나라에서는 신부가 신랑 집으로 와 생활하게 하는 친영을 권장하였지만 아직 민간에서는 사위가 처가에서 일정 기간 동안 머무르는 풍습이 더 선호되었다. 금경은 처가인 갈천에서 머무른 것은 아니고, 과거 시험 준비를 위해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을 오가며 지내고 있었다.


8월에 경산(慶山)에서 소과(小科)를 치른 금경은 10월이 되어서야 새색시를 데리고 자신의 집이 있는 예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동안 새색시는 봉화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금난수는 며느리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예안현 관아에 들어가 고을 수령에게 가마꾼을 요청하였다. 가마꾼까지 빌릴 정도로 극진한 정성을 보이는 이유는 비단 신혼부부만 집에 드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금경의 장인인 권 훈도가 직접 자신의 딸과, 딸을 모시는 여종 8명을 데리고 금난수의 집으로 왔다. 사돈이 왔으니 대접에 결코 소홀할 수 없었다.


신부는 하룻밤을 쉰 뒤, 바로 다음 날 며느리가 시부모를 뵙는 의례인 현구고례(見舅姑禮)를 치렀다. 온 집안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시 한 번 혼례가 치러지는 듯, 새 며느리가 집에 든 것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바로 이어졌다. 지나가던 금난수의 사촌 누이도 들러 집안의 경사를 함께 축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며느리가 사당에 배알하여 조상들에게도 새 사람이 집안에 들었음을 고하였다. 이것으로 권 훈도의 딸은 명실상부 금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다.




1578년- 금난수 49세


4월 15일

이굉중李宏仲이 아이 경憬의 혼사로 찾아왔다.


4월 26일

갈천葛川 원정院亭으로 길을 나섰다. 권 훈도를 불러 아이 경憬의 혼사를 의논하여 정하고 고산으로 돌아왔다.


4월 29일

도산서원 유사가 술과 포육脯肉을 준비하여 고을 어른들을 불러 단사丹砂 논 장만하는 곳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가서 참석하였는데, 모인 손님들이 25인이었다.

경憬과 업(�) 두 아이가 도산에서 백운 재사에 와서 임시로 머무르고 있다.


5월 2일

백운 재사에서 배소拜掃를 하고 아침 제사를 지냈다. 풍기豊基 숙부의 서얼 아우 몽수夢壽가 와서 참석하였다.


5월 5일

혼서婚書를 갈천葛川 권 훈도 농장에 보냈다.


5월 6일

풍기 숙부가 올라 왔다. 아이 경憬을 장가들러 보냈다. 금복희琴福希와 몽수夢壽가 데리고 갔다.


5월 7일

몽수와 금복희 등이 돌아왔다.


5월 9일

아이 경憬이 갈천에서 돌아왔다.


5월 10일

아이 경憬이 풍기 숙부를 뵈러갔다.


5월 13일

아이 경憬이 다시 갈천으로 돌아갔다.


5월 15일

아내를 데리고 초현草峴에 올라가 청량산을 바라보았다.


10월 19일

현에 들어가 고을 수령을 뵙고 가마꾼을 요청하였다. 봉화의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이다.


10월 25일

권 훈도가 신부를 데리고 왔다. 계집종 8명이 배행해 왔다.


10월 26일

현구고례見舅姑禮를 하고 이어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영해寧海 박 수사朴水使의 아내는 곧 나의 사촌 누이이다. 온계로 근친覲親을 갔다가 지나는 길에 들러서 참석하였다.


10월 27일

신부가 사당에 배알하였다.





참고-며느리 데뷔, 현구고례(見舅姑禮)



현구고례는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가서 시부모에게 절하고 폐백을 올리는 의식이다. 시부모 뿐 아니라 친족들과도 서로 만나보게 되는 자리이다. 오늘날 결혼식 뒤에 행해지는 폐백의 원형이 바로 현구고례이다.


절차는 다음과 같은데, 신부가 신랑집 대청에서 먼저 시부에게 절하고, 수모(手母)가 대추 폐백의 보자기를 풀어 신부의 손을 거쳐 시부 앞의 상에 올려놓는다. 다음은 시모에게 절하고 이번에는 고기 폐백을 신부의 손을 거쳐 시모 앞의 상 위에 올린다. 신랑은 자신의 부친 옆에 서 있고, 절은 신부만 하게 된다. 폐백을 받은 시부모는 신부에게 덕담을 하는데, 이 때 돈이나 패물을 주지는 않는다. 다음으로는 시조부모가 있으면 시조부모의 방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고 마찬가지의 절차로 폐백을 올린다. 다른 친족들과는 폐백 없이 상견례만 하게 된다.


상견례를 마치면 시모는 며느리의 계례(笄禮)를 올리는데, 비녀를 꽂아 낭자머리를 한 뒤 시댁에서 지어준 옷으로 갈아입고 패물을 단 뒤 큰 상을 받는다. 사흘 뒤 신부는 시댁의 사당으로 가서 사당폐백을 올린다. 사당폐백 때에는 수모 역할을 시댁 집안의 여성이 맡았다.


현구고례 뒤에는 답례로 신부에게 단술을 내리는 예부지례가 행해지고, 신부가 친정에서 보내온 음식으로 시부모를 대접하는 관궤지례가 이어졌다. 현구고례를 행할 때 신부는 홍색의 치마를 입고 노란색 회장저고리 위에 활옷이나 원삼, 혹은 당의를 입고 새앙머리를 한 뒤 그 위에 화관이나 족두리를 썼다. 당의를 입었을 때는 여덟 자 길이의 명주로 된 한삼으로 손을 가리나, 활옷이나 원삼을 입었을 때는 한삼을 쓰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내용은 사례편람, 성재집, 여유당전서, 광례람 등에 기재되어 있고, 순차 등 세부적인 내용은 시기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8055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8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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