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국민들이 (비교적)균등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의료보험 민영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나 우리 가족 모두 병원에 입원할 일이 있을 때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약한 시기를 책임져주는 아주 중요한 국가의 역할로서 의료보험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근대에는 안타깝게도 신분과 빈부에 따라 의료서비스 이용 가부가 갈렸다. 혜민국이니 제생원이니 하는 기관이 있었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지금도 서울과 지방의 의료격차가 크다고 하는데, 전근대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전근대의 의료기술 자체도 좀 의심스럽다. 지금도 비슷하긴 하지만 전근대의 질병치료란 특정 증세에 대해서 어떤 약을 써 보고는 그 약이 안 들으면 다음 약을 쓰고, 그래도 안 들으면 또 다른 약을 쓰고 하는 것이다. 환자가 나으면 치료한 의원은 용한 의원이 되고, 환자가 (약물오남용이든, 본질적으로 치료되지 않았든)죽으면...환자의 명이 거기까지인 것. 지금이야 의료기기가 발달해서 몸의 어느 부분에 이상이 있는 것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서 그래도 해당 질병과 가까운 약을 써 볼 수 있다지만 전근대에는 증상을 보고 의원이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임상 경험이 많은 의원이 용한 의원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어디에나 용한 의원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용한 의원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1579년 연초였다. 지난 연말부터 기승을 부리던 전염병은 해가 바뀌어도 그 기세가 수그러들질 않고 있었다. 금난수의 집안에서도 막내아들 금각이 아픈 것으로 시작하여 병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미 전염병을 피해 집에서 나와 가화음 재사에서 지내고 있는 터라 새해의 희망과 기쁨을 느끼기에는 마음도 몸도 불편하였다. 온 가족이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새해 첫날에는 여종 석금(石今)과 옥섬(玉蟾)이 앓아누웠다.
병이 옮을까 싶어 병에 걸리지 않은 첫째, 둘째, 셋째 아들은 잇손(㗡孫)의 집으로 나와 거처하였다. 금난수 자신은 고산에 있는 서재로 올라가 거처하였다. 막내아들과 다른 가족들은 그대로 가화음 재사에 머물러 있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셈이다. 금난수는 병자들을 격리하기 위해 병든 여종 석금과 옥섬을 비워두었던 집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병이 낫지 않고 있는 막내아들은 끝동(唜同)의 집으로 옮겨 거처하게 하였다. 아들의 외삼촌이자 금난수의 처남인 조목이 사람을 보내 금각의 병세를 물었지만 여전하다는 말 밖에는 전할 말이 없었다.
병자를 격리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난수의 딸 계종(季從)이 다음날 앓아누웠다. 금난수의 아내는 딸을 데리고 전날 석금과 옥섬이 비워놓은 집으로 들어갔다. 금난수는 아직 병이 나지 않은 며느리를 데리고 전천금이(全千金伊)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다음날 가족들은 다시 거처를 옮겼다. 둘째아들 금업은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서 나올 계획을 세웠으며, 큰아들 금경은 전천금이의 집에 있던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수비(守非)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갔다.
금업은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 종향(從香)을 데리고 권희(權希) 집으로 갔는데, 고산 서재에 있던 금난수를 찾아와 종향이 아프기 시작했으며 어머니가 자신에게는 몸을 피하라고 하여 이쪽으로 오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다행히 다음날 종향은 위중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금난수의 가족이 모두 피접을 나가 노비들만 남아있던 금난수의 집에서는 손동(孫同)의 처 금이(今伊)와 여종 수비(守非)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금난수의 딸들은 병세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였다. 딸들을 돌보는 여종 영지(英之)는 병에 옮았다. 그리고 옥섬의 병 역시 더욱 심해져만 갔다. 금난수와 그의 아내도 거처를 계속 옮겨가며 병에 옮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금난수의 집안은 그나마 피접을 다닐 곳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고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 노비들과 농민들은 질병에 더 취약하였기 때문에 사망자는 대부분 이들 중 발생하게 되었다.
1579년-금난수 50세
1월 1일
계집종 석금石今과 옥섬玉蟾이 앓아누웠다. 재사에 있던 경憬과 업(�) 등 세 아이가 잇손㗡孫 집으로 나와서 자고 고산孤山 서재로 올라왔다.
1월 2일
병이 든 계집종 석금과 옥섬을 집으로 들여보냈다. 조 봉화가 사람을 보내어 아이 숙윤叔胤의 병세를 물었다. 밤에 끝동唜同 집으로 아이의 임시거처를 옮겼다.
1월 3일
오후에 딸아이 계종季從이 또 앓아누워 아내가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며느리를 데리고 전천금이全千金伊 집으로 임시거처를 옮겼다.
1월 4일
새벽에 홀로 일동日洞으로 길을 나섰다. 아이 업(�)는 오십산五十山을 이끌고 집으로 내려갔다. 그의 어미를 모시고 다시 나올 계획이기 때문이다. 아이 경憬은 백운白雲에 내려가서 그의 아내를 데리고 일동에 올라와 수비守非 집으로 임시거처를 옮겼다.
1월 10일
도로 고산으로 내려왔다. 계윤季胤을 문수암文殊庵에 남겨두고 고산서재에 당도하여 중윤仲胤을 만났다. 중윤이 백운 재사에서 와서 말하기를,
“8일에 어머니를 모시고 권희權希 집에서 우거하다가 종향從香이 몸이 불편하여 그날 저녁에 어머니를 모시고 종향을 데리고 백운 재사에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날 만수석萬守石을 불러 눈앞에서 부리는 심부름하는 아이를 남겨두게 하여 어머니를 모시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께서 대번에 피신하여 떠나기를 독촉하셔서 하는 수 없이 오늘 새벽에 어머니 곁을 떠나 여기로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운운하였다.
1월 11일
중윤이 청량산에 들어갔다. 오십복五十福을 보내어 백운 재사의 정황을 알아보게 하였는데, 종향은 위중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하였다. 그날 저녁에 백운에 내려와 전천금이全千金伊 집에 임시로 거처하였다.
1월 12일
사람을 보내어 집의 질병 소식을 알아보았더니, 손동孫同의 처 금이今伊가 어제 밤에 이미 죽어 나가고, 신 서방의 계집종 수비守非도 죽었다고 하였다.
1월 16일
저녁에 아이 경憬과 함께 백운 재사에 내려왔다. 아이 종향從香을 들여보낼 계책을 꾀해 보기 위해서였다. 밤에 아내를 만나보고 종향의 병이 틀림없이 유행병일 것 같아서 데리고 고산서재로 올라왔다.
1월 18일
바람이 크게 불었다. 들으니, 계종季從이 15일에 병이 더쳐서 심하게 앓는 다고 하였다.
1월 19일
종향의 몸이 좋지 않다.
1월 20일
밤에 아내는 아랫것들을 이끌고 백운으로 내려가고 나는 잇손㗡孫 집으로 나와서 임시로 거처하였다.
1월 21일
복산福山이 와서 계종季從과 옥섬玉蟾의 병이 더친 지가 벌써 여드레이고 영지英之도 앓아누웠다고 하였다.
1월 23일
종향의 병이 차도가 있다. 업(�)가 계윤季胤과 함께 청량산에서 내려와 고산서재에서 잤다.
1월 26일
경인景仁 형 댁에서 아침을 먹고 백운에 올라갔다. 밤에 절 앞에 가서 아내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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