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인이 병자되기 딱 좋아
살다보면 가족을 간병해야 하는 때가 찾아오고야 만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해도 기꺼운 마음으로만 임할 수가 없는 것이 간병이다. 오죽하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나왔을까. 그래도 지금은 병원에서 치료를 맡아 해 주고 간병인은 환자가 생활하는 것만 도우면 되니 그나마 옛날보다는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간병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세심히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말 하는 김에 더 이야기하자면, 입원 병실에서 24시간 상주하는 보호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보호자용 침대나 의자도 훨씬 편안한 것으로 갖춰져 있어야 하고, 샤워시설도 있어야 하며, 보호자에게도 침구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에 가족이 수술을 해서 보호자가 된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환자가 밤에는 어차피 화장실에 가지도 않고, 또 간호사가 시시때때로 체온을 재러 오기 때문에 밤에는 집에 돌아갔다가 아침에 다시 오려고 생각했었다. 내가 돌아간다고 말하자 병원측에서는 보호자가 24시간 붙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돌아갈 생각으로 왔던 나는 침구며 뭐며 아무것도 가지고 오질 않았었다. 아주 곤란한 상황이었다.
보통 병간호 하다가 보호자까지 병난다는 소리를 많이 하는 것은 비단 병구완의 고됨만이 원인이 아니다.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보호자가 상주하면서 필요로 하는 제반시설을 갖추지 못한 병원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코로나 때문에 간병인이 상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간병인이 필요 없는 간호간병 통합 병동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간병인 고용에 드는 비용이나, 혹은 간병의 책임을 가족 중 한 명이 몰아 지게 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는 아주 반가운 일이다.
어쩌다 보니 말이 길어졌는데...전근대의 경우 가족이 병에 걸리면 전적으로 그 수발을 가족이 들었던 것 같다. 효자, 효녀, 효부의 사례 중 많은 경우가 병수발과 관련한 에피소드이다. 허벅지 살을 떼어 먹이거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거나, 꽁꽁 언 강에서 잉어를 잡아오거나...등등. 오랜 기간 병자를 위해 한결같은 태도로 성심성의껏 간호한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전염성이 없는 병은 그래도 간병인이 고될지언정 큰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너무나 자주 도는 역병은 간병인이 자신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역병의 전염방식을 보통 사람들은 알기가 어려웠다. 지금처럼 역학조사가 가능한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물로 옮는지 공기로 옮는지 파악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전염의 공포를 이긴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1579년, 지난 연말부터 무섭게 번져나간 전염병은 금난수의 집에도 마수를 뻗쳐 집안의 여종들과 금난수의 딸들이 차례로 몸져눕게 되었다. 병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피접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병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난수의 집에서도 여종 두 명이 사망하였고, 금난수의 두 딸도 병세가 나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였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먼저 발병한 금난수의 막내아들 금각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집안의 아이들 명석(命石)과 연문(連文)도 앓아누운지 이미 이레가 다 되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을 돌보던 금난수의 아내가 몸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땀을 좀 낸 뒤에는 괜찮아진 것 같았으나 곧 다시 앓아누웠고, 금난수도 연이어 잠자리가 편치 않고 입맛도 없어지더니 결국 함께 앓아눕게 되었다.
거처하기 편하지 않은 재사(齋舍)에서 부부가 함께 앓고 있자, 아들들이 배행하여 금난수의 아내는 가마를 타고, 금난수는 말을 타고 동계서재로 거처를 옮겼다. 서재로 옮긴 뒤 아내는 입맛이 점점 돌아오고 차도가 있었으나, 금난수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밤에 땀을 좀 흘리고 나니 열이 잠시나마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세 아들들을 서재에서 내보내고 아내와 단 둘이서 병조리를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이 떠나고 나자 전염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어서인지 조금씩 몸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역마는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다. 금난수 내외가 앓는 동안 집안을 돌보던 큰아들 금경이 역병에 전염되고 만 것이다. 금난수는 금경이 머물고 있는 월란암(月瀾庵)으로 말을 보내 금경을 데리고 오게 하였고, 대신 집에 있던 둘째 아들 이하의 아들들은 다른 곳으로 보내 전염을 조금이라도 막고자 하였다.
마찬가지로 피접을 가 있던 금경의 아내는 남편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 근처로 내려왔다. 하지만 정작 병을 피해 영지사(靈芝寺)로 나가 있던 셋째 아들 금개도 병이 났다고 하여 그에게도 말을 보내 집으로 데려 오도록 하였다. 아들 둘이 집에서 와병을 하고 있자니 모든 사람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금개는 병에 차도가 있었지만 금경의 병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며느리가 자신의 남편을 직접 간호하겠다며 들어가 살펴보려 하였지만 금난수는 며느리를 만류하였다.
하지만 하루 꼬박 와병중인 남편의 방 앞에서 걱정하고 있던 며느리는 남편의 병에 차도가 없자 결국 남편을 직접 간호하겠다며 들어가 버렸다. 비록 혼인을 한 지 1년도 안 되었지만 그 마음과 정성이 너무나 지극하였는지 간호를 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나자 금경의 병세가 덜하였다. 이에 금난수는 며느리를 곧바로 자신의 서얼 아우인 금무생의 집에 나가서 거처하도록 하였다. 비록 병자의 몸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며느리까지 희생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들 목숨이 중한 만큼 며느리의 목숨도 중한 것 아니겠는가.
1579년-금난수 50세
2월 12일
도산서원의 음복례飮福禮에 나아가 참석하고 백운으로 길을 나섰다. 아내가 오후부터 몸이 불편하였다.
2월 13일
아내가 땀을 내고 잠시 덜하였으나 다시 앓아누웠다.
2월 14일
나도 밤에 잠자리가 편치 않고 음식 맛이 없다.
2월 15일
아내의 병이 아직 차도가 없다.
2월 16일
나의 병도 차도가 없다. 재사齋舍에 들어가 거처하고 있다.
2월 17일
아내의 병이 심하다. 나의 병은 아직 낫지는 않았으나 아주 심해지지는 않았다.
2월 18일
나의 병은 아주 심해지지 않았으나 아내의 병은 덜해지지 않았다. 밤에 아내는 가마를 타고 나는 말을 타고 동계서재東溪書齋로 내려왔다. 경憬과 업(�)가 배행하였다.
2월 19일
아내는 좀 덜한 것 같았으나 나는 몸에 열이 더 심해졌다. 권춘계權春桂가 직접 와서 문병을 하였다.
2월 20일
아내는 음식 맛이 돌아오고 몸이 점점 회복되어 덜하였으나 나의 병은 매우 심하다. 밤에 땀을 흘리고 나니 열이 잠시 내리는 것 같았다. 봉성鳳城(봉화奉化) 수령이 음식물을 보내고 문병을 하였다.
2월 23일
밤에 아이 경憬 등 세 아이들을 내보냈다. 나와 아내가 점차 몸이 회복되었다.
3월 2일
월란암月瀾庵에 있는 아이 경憬이 어제부터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보내어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아이 업(�) 등이 피신하여 강 상류로 돌아갔다. 저녁에 경憬의 아내가 내려와 친구 만구萬仇 집에서 임시로 기거하고 있다.
3월 7일
아이 경憬이 땀을 흘린 뒤에 열이 내리고 병이 덜하였다.
3월 8일
영지사靈芝寺에 있는 계윤季胤이 어제부터 병이 낫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보내어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3월 9일
계윤의 병이 차도가 없다.
3월 13일
새벽에 계윤이 땀을 흘리고 병이 덜하였다.
3월 16일
총춘대에 꽃을 심었다. 아이 경憬이 밤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3월 19일
아이 경憬의 병이 심하여 며느리가 들어가 살펴보려고 하기에 못하게 하였다.
3월 20일
경憬의 병이 차도가 없어서 그의 아내가 들어가 병세를 살폈다.
3월 21일
오후에 땀을 내고 경憬의 병이 덜하였다. 경의 아내가 무생戊生 집에 나가서 임시로 거처한다. 계윤季胤의 몸이 좋지 않다.
3월 25일
밤에 계윤이 땀을 흘리고 병이 덜하였다.
3월 30일
아이 경憬의 몸이 좋지 않다.
4월 5일
새벽에 계윤季胤은 몸이 좋지 않았으나 경憬의 병은 덜하였다.
4월 8일
계윤의 병이 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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