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말단 능참봉이 된 지역의 명사
공무원 신분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고 할지라도 신체검사도 받아야 하고, 신원조회도 거쳐야 한다. 공무원이 되면 여러 가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는 만큼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물론 개개인의 윤리관이나 도덕심은 이런 걸로도 거를 수 없을 테지만)
조선시대에는 애초에 아얘 과거시험을 볼 때부터 자신의 신원과 관련된 정보(단자)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관리 임용에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집안에 역적이 있다든가, 과거 집안에서 비윤리적인 사건이 있었든가)은 아얘 응시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향시-소과-대과를 거쳐 급제한 사람 뿐 아니라, 소과에만 합격하여 진사, 생원의 칭호를 얻은 사람들도 관직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관직은 한정적인데 급제자는 누적되니 과거합격이 반드시 관직 임용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인력풀에 소속되는 것.
대기발령상태를 벗어나 관직에 임용된 사람은 부임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 바로 벼슬을 내려준 임금에게 감사를 표하는 의식인 사은숙배이다. 궁 안에서 일하게 되면 사은숙배 후 곧바로 부임할 수 있었겠지만, 외직에 임명된 사람은 사은숙배 후 부임지까지 먼 길을 다시 떠나야 했다. 자기 집이 서울이었다면 또 그나마 나았겠지만 집이 지방인 사람은 지방에서 서울로 사은숙배를 하러 왔다가, 다시 자신의 부임지로 가야 하는 꽤나 번거로운 여정을 거쳐야 했다.
금난수가 50세가 되던 1579년, 금난수는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다. 금난수는 비록 약 20년 전에 생원시에 입격은 하였으나 부친의 상 때문에 한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안동에서 은거하다시피 한 금난수를 제릉 참봉에 제수한다는 임명장의 초본을 든 사람들이 찾아왔다. 제릉은 풍덕군(현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비 신의왕후의 능이다.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릉이 구 도읍인 개성 근처에 있었다. 금난수는 그곳에서 머물며 초하루와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고 벌초를 하는 등 능과 관련된 일을 해야 했다.
안동으로부터 제릉까지는 아주 먼 거리였고, 몇 년 동안은 그곳에서 집안일을 직접 살피지 못할 것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신변 정리가 필요해졌다. 나이가 열여덟 살이 된 셋째 아들의 관례도 떠나기 전에 치러야 아들이 제때 장가를 가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불편이 없을 것이었다. 또 떠나기 전에 친지들과 지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임명장의 초본을 받은 날로부터 보름 뒤에는 정식 임명장을 든 제릉의 하인이 금난수를 찾아왔다. 금난수의 짐 싸는 손이 더욱 바빠졌다.
금난수가 참봉에 임명되어 태조비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으로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금난수의 주위 사람들은 금난수의 가는 길을 위로하기 위해 술자리를 열고 노자를 보태주기도 하였다. 6월 1일에는 금난수의 처남 조목이 집으로 찾아와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모아 술자리를 가졌다. 이 날에는 여럿이 모은 곡식으로 담근 술 단지를 개봉하여 모두 맛을 보았다. 아마도 이 술 단지를 열지 않고 제릉으로 갔더라면 억울했을 것 같았다.
사흘 뒤에는 먼 일족이지만 벗처럼 지내는 금응협 형제와 이대용(李大用), 이통숙(李通叔), 권문원(權文源), 김시보(金施普) 등 여러 사람들과 동네 어른들이 금난수를 전별해 주기 위해 모였다. 금난수의 손윗동서인 권언수(權彦受)는 비록 전별연이 열리는 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조카의 눈병에 어떤 약을 쓰는 것이 좋겠냐고 물으러 우연히 들렀다가 전별연에 함께 참석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날이 밝고, 아직 전날의 술기운에 몽롱하였지만 고을 관아에 들어가 수령을 만나 제릉에 부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인사하였다.
관아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고종사촌 손규와 남국병(南國柄), 류사의(柳士宜), 이복홍(李福弘), 이몽(李蒙) 등 동네의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 술을 들고 전별해 주러 와 있었다. 연일 인사를 하러 다니고, 또 집으로 손님이 찾아오는 통에 몸이 두 개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6월 6일은 금난수가 본격적으로 길을 떠나는 날이었다. 금난수는 신흡(申洽)의 집에 나가서 잤는데, 그 집에도 전별을 해 주기 위해 금난수의 고종사촌 형인 손환, 구간과 손기숙(孫記叔) 등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이들은 구태여 함께 금난수와 자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금난수와 함께 잠자리에 든 것은 아니지만 두터운 우정을 노자로 표현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정수(李挺秀)는 백화(白靴: 국상 때 신는 흰 가죽으로 만든 목이 긴 신) 1부, 흰쌀 5말, 전미(田米: 속껍질을 벗기지 않은 쌀) 5말을 보냈다. 조목은 책갑 장식과 보자기, 갈모집[笠帽家: 비가 올 때 쓰는 모자의 집], 저단철릭[苧單天益: 모시로 만든 홑겹 철릭], 갈모[笠帽], 흰쌀 10말을 보냈다. 앞으로 다가올 여름철을 대비하기에 요긴한 품목들이었다. 사촌 매제 배삼익은 분투단령화(分套團領靴: 비가 오는 날 신발이 젖지 않도록 신발 위에 덧신는 신발)와 쌀 10말을 보내 주었다.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세심하게 챙겨준 물건들을 가지고 금난수는 마침내 길을 나섰다.
금난수는 일단 서울에 가서 관직을 내려주신 임금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사은숙배를 해야 했다. 관직을 받은 뒤 30일에서 40일 내에는 반드시 사은숙배를 해야 했다. 만일 사은숙배를 하지 않으면 임명이 취소되기 때문이었다.
금난수는 6월 7일, 온계(溫溪: 현 도산면 온혜리)와 고감(高甘: 현 예안면 삼계리)를 거쳐 봉화현 관아에 다다랐다. 하루를 머무르는데, 비가 많이 와서 도저히 길을 나설 수가 없어 결국 다음날까지 봉화에 발이 붙들렸다. 다음날에는 가마를 타고 내성천을 건넜다. 이날은 서천일(徐千一)의 집에 투숙하였고, 날이 밝자 바로 사촌 매제 배삼익을 방문했다. 배삼익의 집에는 영천(榮川)에서 온 구경서(具景瑞)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금난수는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산 넘고 물 건너는 일정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에는 힘든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령을 넘어가야 했던 것이다. 죽령을 넘어 겨우 단양(丹陽)에 도착했다. 단양부터 서울까지는 고단한 뱃길을 가야 했다. 얼마 전 비가 많이 와서 수량이 늘어나 불안하기도 했다. 충주로 갔을 때는 머무를만한 곳이 없었는지 달천(達川: 현 달천동)의 배 위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다음날 아침을 먹은 뒤 바로 배를 타고 출발하였는데, 이 날은 갈산리(葛山里)에서 하룻밤을 머물렀고, 이튿날인 6월 14일에는 한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안동을 떠난 지 이레만이었다.
서울에서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김돈서(金惇叙)가 금난수에게 종과 말을 보내주었다. 금난수는 봉화 경저(京邸)에 들어가 임시로 거처하기로 하였고, 밤에는 이곳으로 김돈서와 이봉원(李逢原)이 찾아와 먼 길을 온 수고를 위로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뒤 사흘간 여러 손님이 금난수를 방문하거나 안부를 물어왔다. 마침내 6월 18일, 금난수는 궐에 들어가 사은숙배를 하였고, 마찬가지로 참봉에 제수된 성효선(成孝先), 안몽열(安夢說)이 찾아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는 잠시나마 풀어놓았던 짐을 다시 꾸리고 부임지인 제릉으로 출발할 때가 되었다.
1579년-금난수 50세
5월 19일
아침에 서울 사람 두 명이 정초政草를 가지고 당도하였다. 내가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다.
5월 28일
아침에 이 의성李義城을 보러갔다. 제릉齊陵 하인이 임명장을 가지고 당도하였다. 아이 업(�)가 봉화에서 돌아왔다.
6월 1일
조 봉화가 집으로 보러왔다. 오후에 서재에 모여 우리들이 곡식을 내어 빚은 술 단지를 개봉하였다.
6월 4일
고을 친구 금협지琴夾之 형제, 이대용李大用, 이통숙李通叔, 권문원權文源, 김시보金施普 및 동네 여러 어른들이 모두 모여 전별을 해주었다. 권언수權彦受는 그의 조카 권우정權宇定의 눈병 때문에 약을 물으러 왔다가 들렀다.
6월 6일
신흡申洽 집에 나가서 잤다. 손중방孫仲芳, 구직경具直卿, 손기숙孫記叔 형이 와서 전별해주면서 함께 잤다.
노자로 이 의성李義城 정수挺秀가 백화白靴 1부部, 흰쌀 5말, 전미田米 5말을 보내고, 조 봉화趙奉化가 책갑冊匣 장식粧餙과 보자기, 갈모집[笠帽家], 저단철릭[苧單天益], 갈모[笠帽], 흰쌀 10말을 보내고, 배 풍기裵豊基가 분투단령화分套團領靴와 쌀 10말을 보내주었다.
6월 7일
온계溫溪와 고감高甘을 거쳐 봉화奉化에 당도하였다.
6월 8일
비 때문에 현縣에 머물렀다.
6월 9일
가마로 내성천奈城川을 건너 구계응具季膺과 함께 서천일徐千一 집에 투숙하였다.
6월 10일
아침에 지나는 길에 풍기 군수 배여우裵汝友를 찾아갔더니, 구경서具景瑞 영공이 영천榮川에서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구경서 영공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6월 11일
죽령竹嶺을 넘어 단양丹陽에서 잤다.
6월 12일
충■忠■ 김사칙金士則【이름은 수철守鐵이고, 나와 생원 동년同年이다.】집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 달천達川 배[船上]에서 잤다.
6월 13일
아침을 먹은 뒤에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 갈산리葛山里에서 잤다.
6월 14일
한강에 배를 대니, 김돈서金惇叙가 종과 말을 보내주었다. 봉화 경저京邸에 들어가 임시로 거처하였다. 밤에 김돈서와 이봉원李逢原이 찾아왔다.
6월 15일
이자화李子華가 찾아오고, 류응현柳應見 형제가 안부를 물어왔다.
6월 16일
류응현과 류이현柳而見을 찾아보고 김돈서 집에 당도하였다. 취하여 돌아왔다.
6월 18일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였다. 참봉 성효선成孝先, 안몽열安夢說, 정자 권언회權彦晦가 보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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