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 10층 석탑을 처음 본 곳은 경복궁이었다.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로 쓰이고 있는 키메라 같은 건물이 그 때는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갈 곳 잃은 석재 유물들이 덕분에 경복궁 앞마당에 모여 있었다. 지금은 경복궁도 복원공사가 많이 진행되어서(지금까지 20% 정도 복원했다던데) 빈 풀밭이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그 때는 다들 어딜 가든 돗자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한 뼘만한 풀밭이 나오기만 하면 주저앉아 김밥을 먹곤 했더랬다. 피크닉의 황금기였다.
경천사는 개성에 있는 사찰이었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나라 양식으로, 고려 충목왕 때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아(亞)자형으로 만들어진 이국적인 모습이 어디서든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1909년경 일본으로 불법반출되었다가 적발되어 1918년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반환되었고,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고 한다. 이후 2005년에 지금의 자리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실내로 옮겨졌다.
전에 일을 하다가 경천사 탑을 옮긴 분들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다. 그분들은 고(古) 석물을 옮기는 전문가들이었는데, 어딘가 드워프같은 인상의 할아버지들이었다. 전대 박물관 관장들과도 오랬동안 같이 일한 베테랑이었는데, 아무리 무거운 석물이라 할지라도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쇠파이프와 무명천으로만 옮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체화된 물리학이랄까. 일을 한 번 의뢰하는 데 수백만원을 드려야 모실 수 있는 분들이었다. 안타깝게도 후계자가 없다고.
항상 글을 쓰다 보면 이렇게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아무튼 1908년 이전에는 경천사에 있었던 그 탑은 조선시대에도 관광거리였다. 개성에 온 사람이라면 마땅히 구경해야 하는 명물. 조선총독부 유리건판에는 이미 사찰은 터만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언제 사찰이 없어졌는지는 모르겠다. 경천사 탑을 모방한 것이 세조대에 지어진 원각사 10층석탑이다. 지금 탑골공원(원각사지)에 있는 것. 경천사 탑이 인상적이었기에 서울에도 하나 세운 것이었겠지?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비의 능)을 지키는 참봉이 된 금난수 역시 경천사 탑을 보러 갔다.
금난수가 처음으로 맡은 일은 7월 초하루 제사였다. 참봉 일을 처음 해 보는 금난수를 위해 직무교육을 해 주러 참봉 성택로(成澤老)가 미리 왔다. 성택로의 지도하에 제사 준비를 마치고 전사관, 헌관, 집사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성택로는 금난수를 능 위쪽으로 데리고 가서 앞으로 능참봉으로서 살피고 해야 할 일을 꼼꼼히 일러 주었다. 앞으로 몇 년간 능을 지켜야 하는 금난수로서는 이러한 실무지도를 해주는 성택로가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었다.
다음날 성택로가 돌아가고 나자 금난수는 이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온 편지도 읽고, 개성 유수가 보내준 화담집(花潭集)을 보며 서경덕의 학문세계도 사뭇 새롭게 접할 수 있었다. 칠석 제사를 지낸 뒤에는 경천사(敬天寺)를 보러 갈 여유도 생겼다.
경천사는 개풍군 부소산에 있는 절이었다. 명물인 절 안의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금난수가 고개를 뒤로 꺾어 층수를 열심히 세어 보니 14~15층은 되는 것 같았다.(탑 층을 세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탑의 윗부분은 구리로 만들어졌는데, 13개층이나 되어 번쩍번쩍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원 간섭기에 만들어진 탑이어서 원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풍모가 있었다. 층수가 높은 것도 높은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대리석을 사용한 것이거나, 亞자 모양의 단면에, 사이사이 정교한 조각가지 들어 있어 단연 돋보이는 탑이었다. 경천사 석탑의 이국적인 모습에 금난수는 우리나라에는 결코 다시없는 탑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금난수의 개성 일대 관광. 금난수는 시간 날 때마다 개성 인근을 구경하러 다녔다. 한가로운 능참봉의 나날이다.
1579년-금난수 50세
7월 1일
초하루 제사를 지냈다.
7월 2일
분향을 하였다. 성 참봉과 함께 능 위쪽에 올라가 살펴보았다.
7월 3일
서울로 돌아가는 성 참봉을 전송하였다. 용두龍頭로 연당蓮塘을 보러갔다.
7월 4일
전사관 파주 교수坡州敎授 김현도金玄度 홍지弘之가 왔다.
7월 5일
유수가 �화담집花潭集�을 보냈다. 서울 여러 친구들의 답장 편지를 받았다.
7월 6일
헌관 장단 부사長湍府使 안여경安汝敬, 집사 개성 경력開城經歷 이성李誠과 교하 현감交河縣監이 왔다.
7월 7일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모두 흩어져 돌아갔다.
7월 9일
경천사敬天寺를 보러갔다. 탑은 14~5층으로, 탑의 윗부분은 구리로 만들었는데, 역시 13층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모습이다. 토박이 장문길張文吉 사원士遠이 그 절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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