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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다리던 녹봉날

싱글벙글 월급쟁이

by 소주인

물론 내 계좌를 스쳐지나갈 뿐인 돈이지만 사회의 냉엄함을 견딘 댓가는 (잠깐이나마) 달콤하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와 시간을 내놓게 만드는 수단이니 위험할 정도로 달콤할 수밖에.


며칠 전 우연히 2019년 기준 대한민국 임금근로자 소득분포 그래프를 보았다. 평균소득은 309만원이며, 내가 속한 연령대의 중위소득은 317만원이었다. 나야 뭐...대학원생이니 임금근로자에도 들어가지 않기는 하지만, 과거 4대보험의 품 안에서 받던 월급을 생각하니 그저 웃음만 난다. 쥐꼬리가 거대해 보이는 그따위 월급 받을거면서 뭣하러 이렇게 아등바등 대학원까지 다녔는가.


쥐꼬리만하기는 조선시대 관리 녹봉도 만만찮았던 것 같다. 역시 블랙기업 조선(반복). 그나마도 품계와 직위가 있는 관리들이야 녹봉이라도 받았지만 향리들은 녹봉도 못 받고 무급노동을 했다. 그러니 착복이 일어날 수밖에.


임진왜란 때에는 세금이 안 걷히니 관리 녹봉도 줄 수 없었고, 전란통에 죽은 관리들이 워낙 많아서 살아남아 있는 관리들은 죽은 동료 몫까지 일해야 했다. 아무리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만 지옥같은 이승이었을 것이다. 관리들도 먹고는 살아야지. 그러고 보니 비단 조선만 이런 것도 아니고 명나라에서도 녹봉 줄 돈이 없어서 대신 궁중에 비장된 서화를 녹봉 대신 주었다고도 한다.


금난수가 제릉 참봉을 지내기 시작한 것은 1579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3년 전이다. 아직은 녹봉을 받을 수 있었을 것. 금난수가 제릉참봉으로 일한지도 어느덧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나 있었다. 슬슬 녹봉을 받을 시기가 되어 금난수는 종 구석(具石)과 능에서 청소하는 일을 맡은 수복(守僕) 박만억(朴萬億)에게 자신의 녹패를 주며 서울로 보냈다. 녹패에는 받을 수 있는 녹봉의 양과 날짜, 내역이 적혀 있었다.


이때 당시 녹봉은 광흥창(廣興倉)에서 각 계절의 첫 달인 1월, 3월, 7월, 10월에 지급하였는데, 보통 쌀, 콩, 보리 등의 곡물로 주었다. 아무래도 곡물을 받아서 가지고 오는 것은 무게와 부피 면에서 힘든 일이기 때문에 서울 내에서 무명으로 바꾸어 오라고 당부하였다.


종9품 참봉이었던 금난수가 받을 수 있는 녹봉은 쌀 10두(약 96kg)와 콩 5(두약 48kg)였다. 광흥창으로 갔던 구석과 박만억은 쌀을 무명으로 바꾸어 왔는데, 그들이 바꾸어 온 무명은 총 15필 반(너비 8치-37.4cm*길이 620자-248m)이었다. 이것으로 다음 녹봉이 나오는 10월까지 3개월간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는 그리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금난수는 워낙 물고 있던 수저가 든든했다. 가족들은 금난수가 벌어오는 녹봉에 큰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금(은)수저의 직장생활은 얼마나 즐거울까!



1579년-금난수 50세

7월 11일

녹봉을 타오기 위하여 종 구석具石과 수복守僕 박만억朴萬億을 서울에 보냈다. 들으니, 권락權洛이 울진 훈도蔚珍訓導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7월 17일

구석具石이 받은 녹봉 곡식으로 무명 15필 반을 사서 왔다. 낮에 윤흥종尹興宗 기백起伯의 편지를 받았다.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8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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