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 로망스
내 주위에서 가장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은 고려시대사 하는 사람들과 개성 발굴 하는 사람들이다. 난 조선시대사랑 근대사를 걸쳐서 그런지 평양이 더 궁금하던데. 나의 궁금함과 그들의 열망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긴 할 테다.
얼마 전 만월대 공동발굴 디지털기록관 홈페이지(http://www.manwoldae.org/front/main.do)를 소개받았는데 발굴된 유물과 정돈된 유구 모습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꽤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 한켠에 아주 소담하게 전시되어 있던 만월대 출토유물만으로는 만월대의 규모를 체감하기 어려웠던게 사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궁 모습이란 평지에 정전을 중심으로 배치된 조선의 궁궐이다. 하지만 만월대는 입체적으로 전각이 배치되어 있는, 머릿속으로 CG조차 입혀지지 않은 '터'이다.
만월대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대형 계단 네개로 올라야 하는 높은 축대 위에 자리잡은 회경전지의 모습일 것이다. 현대의 우리들처럼 조선 사람들도 회경전지의 모습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금난수가 만월대를 찾은 1579년은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지 187년이 된 해였고, 홍경래의 난(1361)으로 만월대가 소실된 지 218년이 된 해였다. 우리가 200년 전인 1822년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라고 느끼듯 조선 사람들도 까마득한 옛 시절이라 생각했다. 고려 궁성은 그저 옛날 망국의 영화조차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해진 곳이었다. 약간의 낭만 정도는 느낄 수 있었기에 그래도 술동이를 지고 찾아갔으리라.
금난수가 참봉을 지내고 있던 제릉은 개성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금난수는 7월 15일에 백중을 맞아 제사를 지내고는 곧바로 만월대를 보러 갔다. 옛 도읍의 저잣거리는 백중 제사를 지낸 뒤 음복주를 마셔 취한 사람들과 흥이 나서 춤을 추는 사람들로 들썩이고 있었다. 풍류 좋아하는 금난수도 여기에 빠질 수 없었다. 금난수와 함께 술병을 차고 만월대에 오른 사람은 파주향교의 교수 김현도(金玄度)와 하굉량(河宏量)이었다.
금난수가 만월대를 찾았을 때, 만월대는 이미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무너진 계단과 부스러진 섬돌만 널려 있을 뿐이어서 각 전각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월대를 궁궐 전역을 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만월대 동편에는 고려 왕들이 용 모양의 배를 띄우고 놀기도 하고,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던 동지(東池)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미 논이 되어 있었다.
금난수와 일행들은 만월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앉아 송도의 경치를 내려다보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근처는 모두 소나무 숲이 만들어져 있어서 더욱 술맛이 돋았다. 허리에 차고 온 술병도 모두 비었고, 날도 저물어갔다. 일행은 모두 불콰해진 얼굴로 자리를 파하였지만 금난수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흥이 한 바가지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개성 유수부에 들이닥쳐 개성유수에게 인사하였다. 술취한 금난수와 환담을 나눈 성격 좋은 개성유수는 다음번에는 강화도에 가 보라며 추천해 주었다. 금난수의 다음번 유람 행선지가 이렇게 쉽게 정해졌다. 능참봉 팔자가 이렇게 좋다.
1579년-금난수 50세
7월 16일
만월대滿月臺를 보러갔다. 김현도金玄度와 하복청河復淸의 아들 굉량宏量이 모두 술병을 차고 와서 모였다. 돌아가는 길에 유수를 뵙고 돌아왔다.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KYH_80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