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 있는 사학과 학생들에게 강화도는 만만하게 잡을만한 답사장소이다. 거리가 가까운데 또 작은 섬 안에 시대를 망라한 유적지가 다글다글 몰려 있다. 고인돌부터 시작해서 고려궁지, 성공회성당, 광성보 등의 진지까지. 가히 답사 종합세트같은 장소라 할 수 있다. 또 바다도 있으니 기분전환하기도 좋다. 지금이야 다리가 놓여서 내륙이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배로 오가야 했으니 접근성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유배지로 쓰였겠지.
지금 강화도의 주소지는 인천에 속해 있는데, 지도로 보면 강화도가 인접한 곳은 김포와 개성이다. 금난수가 지키고 있는 제릉에서는 강화도도 그리 멀지 않았다.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7월 22일, 금난수는 강화도로 향했다. 제릉이 있는 개풍에서 강화도로 가기 위해서는 승천부(昇天府) 나루에서 배를 타야 했다. 이곳은 개성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 나루였다. 몽골의 침입을 받았던 때에도 고려 고종이 이곳을 통해 강화도로 건너가 천도하였다.
나루를 건넌 뒤에는 뱃길에 노곤해졌는지 길가에서 낮잠을 한숨 잤다. 자고 난 뒤 강화에 처음 왔으니 공직에 있는 자로써 인사 없이 유수부를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에 옛 고려궁지 안에 있는 강화 유수부에 들어갔다. 강화부사 곽영은 제릉에 가끔 헌관으로 오기 때문에 이미 면식은 있는 터였다. 부사는 마침 나갈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부사는 죄인을 심문할 일이 있어서 교동(喬桐)에 들어갈 일이 있다면서, 금난수에게도 함께 갈 것을 권하였다. 교동은 안평대군과 연산군, 그리고 이후 1623년에 광해군의 아들 이질(李侄)이 유배를 갔던 곳이다.
부사가 청하는데 그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던 금난수는 다시 배를 타고 인화진(寅火津) 나루를 건너 교동도로 향했다. 강화도 본섬에서 교동도로 가는 배가 다니는 인화진 나루는 금난수가 지금까지 본 나루 중에 가장 넓은 나루였는데, 너비가 족히 3리(약 1.17km)는 될 듯이 보였고, 배 안에서 위아래로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멀리 바라보니 족히 4~5리(약 1.96km)는 될 듯도 하였다.
이틀간 교동 관아에서 부사가 죄인을 심문하는 자리에 영문도 모르고 동석한 금난수는 7월 24일,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부사와 함께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다. 너무 오래 제릉을 비운 듯 하여 돌아가고 싶었지만 날씨가 도와주지를 않았다. 다음 날에도 금난수는 강화 유수부 안에 머무르며, 동헌에서 부사와 함께 밥상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밤이 되도록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금난수를 위로한 것은 부사의 거문고 소리였다. 고즈넉한 가운데 나직하고 절도 있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비오는 밤이 깊어갔다.
1579년(선조 12)-금난수 50세
7월 22일
강화江華에 갔다. 승천부乘天府 나루를 건너 길가에서 낮잠을 한숨 자고 부府에 들어가 부사를 뵈었다. 부사가 죄인을 심문할 일로 교동喬洞에 가는 길에 붙잡혀서 같이 갔다. 인화진寅火津을 건넜다. 나루의 너비는 3리는 족히 될 것 같았고, 위아래로 목을 빼고 멀리 바라보니 4~5리는 될 것 같았다.
7월 24일
부사와 함께 비를 무릅쓰고 강화江華로 돌아왔다.
7월 25일
비 때문에 강화에 머물렀다. 저녁에 관아에 들어가 동헌에서 부사와 밥상을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도록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객관으로 돌아와 잤다.
7월 26일
제릉齊陵으로 돌아왔다. 숙문叔文이 고향에서 돌아왔다.
참고: 군사적 요충지 강화도
강화도는 한강 하구에서 위치한, 한국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동쪽으로는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김포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풍덕(개성)의 승천포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이 강의 언덕에는 모두 석벽을 쌓았으며, 석벽 밑은 뻘이라서 배를 댈 수가 없었고 오직 만조 때 승천포 맞은편에서만 배를 댈 수 있었다. 강화도에는 승천포를 포함하여 갑곶진, 인화석진, 광성진, 정포진 등 다섯 개의 주요한 나루가 있었다. 승천포는 개성으로 건너가기 위한 나루였고, 인화석진에서는 강화도 서쪽의 교동도로, 정포진(내가면 외포리 정포마을 인근)에서는 석모도로 건너갈 수 있었다.
고려 때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1232년(고종 19) 개경에서 천도한 뒤 도읍으로 기능하였다. 1377년(우왕 3)에는 강화현에서 강화부로 승격하였다. 강화부 좌우에는 성곽을 쌓지 않고, 산기슭에 돈대(墩臺)를 쌓아 군사를 배치하여 갑곶 양쪽을 지키게 하였다. 조선에서는 삼남지방의 조세를 실은 배가 강화도와 김포시 사이의 손돌목을 지나 한강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유수부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병자호란 후에는 강화도에 병장기, 식량 등을 비축하게 하여 전쟁 등 비상시를 대비하게 하였고, 숙종대에는 강화도 내의 문수산에 성을 쌓도록 하였다. 문수산성은 강화도 동쪽에 위치하여 북쪽으로는 연미정(燕尾亭)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손돌목에 이르는 성이었다. 하지만 18세기가 되면 성은 비에 허물어지고 사람과 말이 다니는 길이 되어서 강화도 수비의 기능은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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