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조상이 내려주는 복
공직자의 근무 중 음주는 지탄받는 행위이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일수록 올바른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 음주를 자제해야 마땅하다는 말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요즘 이와 관련하여 취임 초부터 꽤나 지탄받고 있는 분도 있다. 나라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한시바삐 자신의 지위를 자각하셨으면 좋겠다. 별볼일 없는 결정권을 가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요즘 초 절주 중이다. 가정과 내 몸의 건강을 위해서.
공직자의 품행에 대해 더욱 더 깐깐했을 것만 같은 조선시대에도 관리가 근무 중 음주를 해서 문제가 되는 일이 왕왕 있었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공무와 관련하여 음주를 할 수 있는 관리가 있었으니, 바로 말단 중의 말단 능참봉이다. 능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능참봉의 일이다. 제사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술. 제사의 꽃은 음복이다. 제사의 종결과 후손들의 단합을(혹은 분열을) 이끌어내는 이벤트.
조상 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모름지기 직계 후손이 해야 할 일이지만 왕이 수많은 왕릉에 어찌 제사를 지내러 다닐 것인가. 그렇기에 능에 참봉을 두어 제사를 대행하게 한 것인데, 군사부일체니까 왕릉에 묻힌 분이 능참봉의 조상격이라 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리라. 자손 대신 제사를 지내 주는 참봉들과 제관들이 왕가의 복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마시는 게 무어 흠이 되겠는가. 참봉과 제관들은 제사 후 내려받은 복에 흠뻑 젖곤 했다.
1579년 8월 1일. 제릉(태조비의 능)에 모인 제관들이 초하루 제사를 지냈다. 이번에 금난수와 함께 제사를 지낸 사람들은 파주 교수 김현도(金玄度)와 강화 부사(江華府使) 곽영(郭嶸), 교동 현감(喬桐縣監) 박안민(朴安民)과 통진 현감(通津縣監) 권식(權寔)이었다. 능 제사가 있을 때 인근 지방의 외관직들은 제관으로 차출되곤 했다. 지금이야 분단 때문에 개성이라 하면 어쩐지 멀게 느껴지지만 개성과 파주, 강화는 아주 가까운 지역이다.
김현도와는 일전에 함께 만월대에 놀러갔었고, 얼마 전 강화도에 갔을 때 곽영과는 며칠 동안 침식을 함께 하면서 친분을 다졌었다. 또 곽영과 함께 교동에 갔을 때 박안민과도 안면을 익힌 바가 있었다. 친근한 사람들 사이에서 제사를 지내니 금난수는 평소 제사를 지낼 때보다 더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편안한 마음 덕인지, 지난 달에 제사 후 음복을 하지 않고 헤어졌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모든 제관이 모여 음복을 하였다. 권식과 김현도는 음복을 한 장소에서 먼저 돌아가고(정도를 아는 자들이다), 곽영과 박안민은 금난수에게 제릉의 원찰인 연경사(衍慶寺)에서 아침을 먹자고 권하였다.
이들은 아침밥을 먹으면서 2차로 반주를 하였는데, 어찌나 신나게 마셨는지 너무 취해서 각자의 임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곽영과 박안민은 강화도로 돌아가려면 배를 타야 했는데, 술에 취해서는 배를 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강화해협은 물살이 빠른 것으로 유명하다. 배 운전이야 뱃사공이 한다지만 그래도 술 취한 채 배를 타기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금난수는 곽영과 박안민이 한동안 쉬면서 술을 깰 수 있도록 제릉의 재실(齋室: 제사를 지내고 집기를 보관하는 곳)을 내어주었다.
약 1년 뒤인 1580년 6월 1일. 이번에 초하루 제사의 제관으로 온 사람들은 개성부 교수 장백거(張伯擧)와 강화 부사 곽영, 풍덕 군수 박홍(朴泓), 통진 부사였다. 제사가 끝나자 이들은 으레 그렇듯 음복을 하려고 모양새를 갖추어 앉았다.
작년에 과한 음복으로 강화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실에서 한참 쉬고 간 강화 부사 곽영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이번에는 짐짓 점잖게 임지로 돌아가려면 배를 타야 하니 마실 수 없겠다며 음복을 거절하였다. 통진(현 김포시 통진읍) 부사도 마찬가지로 배를 타고 임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며 강화 부사와 함께 떠나갔다. 통진은 얼핏 보면 섬이 아닌 육지이지만, 개성에서 오가기 위해서는 강화도와 마찬가지로 한강 하구를 반드시 건너야 했다.
남은 사람은 임지가 제릉인 금난수와 마찬가지로 임지가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풍덕군수와 개성부 교수 장백거였다. 이들은 임지로 돌아갈 걱정 없이 제릉의 비각 그늘에 앉아 술을 신나게 마셨다.
1579년(선조 12)-금난수 50세
8월 1일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통진 현감通津縣監과 파주 교수坡州敎授는 음복한 장소에서 흩어져 돌아가고, 강화 부사江華府使와 교동 현감喬桐縣監은 연경사衍慶寺에 들어가서 아침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취한채로 지나는 길에 재실에 들렀다가 돌아갔다. 저녁에 하굉량河宏量 자수子受가 와서 잤다.
1580년(선조 13)-금난수 51세
6월 1일
제사를 지냈다. 강화 부사와 통진 부사는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음복을 하지 않고 돌아갔다. 풍덕 군수와 개성부 교수와 함께 비각碑閣에 앉아 술을 마시고 흩어졌다.
6월 11일
군에 들어가 군수를 만나보고 저녁에 취하여 돌아왔다. 강물이 불어나 제방이 훼손되었는데, 위태함을 무릅쓰고 왔다.
6월 12일
풍덕 군수가 사람을 보내어 어제의 위험했던 안부를 물었다.
참고 : 복을 나누어 받는 음복
음복(飮福)은 제사를 마친 후 제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제사상에 올렸던 술이나 제물을 나누어 먹는 일을 말한다. 신(조상)이 내리는 복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제주(祭酒)만을 나누어 먹거나 제찬(祭饌)까지 모두 나누어 먹는 경우가 모두 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음복의 절차가 실려 있다. 먼저 제사 후 상을 모두 무른 후 제주(祭主)가 제물과 술을 나누어 일부를 이웃에 나누어 보낸다.
음복을 할 사람들은 높은 항렬부터 남쪽을 향해 한 줄로 자리하여 성별에 따라 동과 서로 나누어 앉는다. 웃어른이 앉은 후에는 같은 항렬씩 웃어른에게 절하고 축사와 함께 술을 올린다. 웃어른이 술을 마시면 모든 일행이 다시 한 번 절하고, 웃어른이 술을 내려주면 다들 술을 마시고 다시 절한다.
술을 마신 뒤에는 제물을 나누어서 술과 곁들여 먹는다. 그 뒤에는 실무를 보는 집사자들과 잔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술과 음식을 나누어주고 절하도록 한다. 이러한 절차는 신(조상)의 음덕과 복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리고 이웃에까지 모두 미치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아 행하였던 것이다. 또 이러한 음복 절차를 통해 연소자들은 음주의 예절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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