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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만 축내다 꽁무니 뺀 의병들, 전장도 못 본 의병장

by 소주인

<매원일기>는 내가 가지고 있던 의병에 대한 이미지를 산산조각 낸 일기이다. '김광계'를 검색하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두 차례 의병장으로 나섰다고 적혀 있다. 아니 거짓말은 아닌데...많은 사람들이 의병이라 하면 관군을 대신하여 용감하게 적과 맞서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그런 장면을 떠올리지 않는가. 아마도 저런 장렬한 의병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김광계가 이끌던 예안지역 의병은 그런 류의 의병이 아니었다. 그리고 김광계도 동네에서 명망있는 인사였기에 떠밀려서 의병장을 맡았던 것 뿐이지 비분강개하여 일어난 의병장은 아니었다. 전장으로 나가기에 김광계는 너무 늙고 병약했다.



1636년 12월 30일, 의병소로 사용되고 있는 향교에 있던 김광계에게 봉화의병진에 속한 서기가 찾아와 예안 지역 의병에 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리고 안동 의병진의 의병장으로부터도 전갈을 받았다. 김광계는 계속 향교에 머무르며 의병과 관련된 여러 사무를 맡아 보았다.


1637년 정초인 1월 1일에는 향교에 안동 의병진의 의병들이 와서 김광계와 함께 있었다. 이 때에는 예안 의병대장 이하에 이른바 정제장(整齊將)이라고 하는 지역 단위의 의병장들이 편제되어 있었다. 부장인 김확(金確)과 함께 지역의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이 날은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도 다시 진중으로 들어가 여러 사무를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김광계의 재종숙 김령의 평에 따르면 의병들의 모든 일이 다 두서가 없었다. 일각에서 말하기로는 "의병 직책을 마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맡았다. 참모라는 이름이 너무 많다"고 하니, 실제 전투병력보다는 작전만 짜겠다는 사람만 많았던 것이다. 김령의 말대로 가소롭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군량도 확보가 되어 있지 않아 결국 김령이 사재를 털어 군량을 댔다. 정작 군량을 내야 하는 예안 현감이나 안동 부사는 자신의 식솔을 모두 예안과 안동으로 데리고 와서 먹이느라 하루에 쌀 3~4섬의 살을 축냈다.


1월 3일에는 인근 지역의 관아에 통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영주, 안동, 봉화에 사람들을 보냈다. 그리고 정제장과 이하 정제군인 28명을 향교 마당에서 점검하였다. 다음 날에는 안동과 봉화에서 답이 왔는데, 안동에서는 이홍조(李弘祚)를, 봉화는 조이주(趙以周)를 대장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안동 의병장 이홍조는 주위 고을의 모든 의병을 자신이 통솔하고 싶어해서 매양 "싸우다 죽겠다"고 장담을 하고 다녀서 비웃음을 샀다. 1월 5일에는 영주에서도 답을 받았는데, 여기에서는 김광계의 매형인 박회무가 의병장이 되었다고 하였다.


1월 6일에 예안 현감이(또 행차에 나팔을 불며 나타나)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 의병들을 위무하였고, 이 날 군관과 병사들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였다. 이후 엿새가 지난 1월 12일에는 군사를 드디어 움직일 계획을 세웠다. 이에 차차 집을 떠날 준비를 하였고, 집안의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였다.(인사 때마다 술자리가 함께 벌어진다) 그런데 중군으로 삼았던 임지경이 갑자기 달아나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심수해를 중군으로 정했더니 심수해도 또한 도망갔다. 그리하여 의병소에서 애꿎은 심수해의 종을 매질하고 가두자 심수해가 어쩔 수 없이 나타나 중군을 맡았다.


싸우다 죽겠다던 이홍조는 먼저 진군하였는데, 쌍령에서 관군이 패퇴하고 모든 군량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길을 틀어 이번에는 죽령을 넘고자 풍기에 이르렀지만 풍기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영천 의병장인 김광계의 매형 박회무도 하루면 갈 길을 나흘이나 걸려 풍기로 갔다고 하였다.


1월 14일에는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아들 김렴을 대동하고 진군하였다. 수는 대략 40여인이었다. 학궁 3곳에서 각각 7명을 내고, 오천 3명, 서촌 4명과 양반을 대신해 종군하는 종 2명 등이었으며, 모두 군장이랄것도 없이 맨손으로 나온 백성들일 뿐이었다. 의병에 속하지 않은 백성들도 고통받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감사는 안동 백성들에게 말 330필을 내게 했고 예안에서는 33필을 바쳤다. 이 말들로 문경까지 군량을 운반하게 했는데, 군량은 24결당 1바리씩을 거둬갔다. 안동 부사는 또한 호적에 근거하여 군사를 뽑아갔는데, 호적상의 가구수와 실제의 가구수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마구 매질을 하면서 끌고 갔다.


1월 17일에 예안 의병들과 김광계는 풍기 읍내에 이르렀고, 이날 이후 안동 의병장과 영주 의병 부장, 그리고 봉화 의병장을 며칠에 걸쳐 차례로 만나보았다. 1월 19일에 안동 의병진은 이미 떠났으나 예안 의병은 김광계의 병으로 인해 진군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결국 더 지체하지 못하게 되어 1월 22일에 같은 고을 사람들인 심수해(沈壽海)와 박용보(朴龍普)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병력을 진군시켰다.


1월 23일에는 예안 현감이 전쟁과 관련한 첩보를 여러 사람에게 퍼뜨려 고을을 불안하게 하였다. 적병이 연풍에 도착하여 이화령을 넘었고, 감사도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퍼뜨린 예안 현감은 본인도 피신해 버렸다. 예안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나버려 이제는 고을이 텅 비다시피 했다. 예안을 비롯한 많은 지방의 의병들은 진군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도망갔다. 예안 의병도 마흔명 중에 여섯 명이 달아났다. 안동과 풍기에는 피난민들이 가득하였다. 전투 한 번 하지 않는 의병들을 위해 마련된 군량도 체계 없이 운용되었고, 심지어 의병장에 의해 유용되기도 하였다.


1637년 2월 3일에도 김광계는 병을 앓으며 여러 사람의 병문안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전해지는 소문은 그저 실망스러운 것들 뿐이었다. 관찰사가 예안과 안동의 사람들에게 죽령(竹嶺)을 지키라고 하였는데, 의병도대장 전식이 의병들로 하여금 행군하여 죽령을 넘으라고 하자 각 읍의 군인들이 대부분 도망가고 흩어졌다고 하였다. 장차 도망간 군인들을 잡아올 것이라고는 하였지만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김확(金確)도 다녀가며 의병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갔다. 계속되는 사무에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병이 다시 도져서 며칠간 계속해서 몸조리를 해야 했다.


2월 6일에는 고을 사람이자 의병진의 중군을 맡았던 박용보(朴龍普)가 와서 영주 의병장을 맡았던 김광계의 자형 박회무(朴檜茂)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편지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적혀 있었다. 임금이 있던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임금은 성을 나와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자는 인질이 되고, 마찬가지로 둘째 왕자인 봉림대군과 및 비빈들도 함께 잡혀 갔다고 하였다. 임금이 계신 서쪽을 향해 통곡하였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절망하였다.

넷째 동생인 김광악과 함께 재종숙 김령을 만나러 갔는데, 서로 바라보니 눈물이 날 뿐이었다. 동네의 친지들도 이 괴로운 소식을 전해들으며 상심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헤어졌다.


이후에도 속속 난리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전국 각지에서 부녀자들이 자결하거나 사로잡혔다. 대신들의 아내 중에서 나이가 들어서 강간당하지 않은 자들은 백금 백냥으로 값을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았고, 은을 구하지 못한 자들은 향후 납부할 것이라는 문권을 작성하였다. 간혹 어머니를 사거나 아내를 산 사람도 많았다. 사로잡혀 있는 부녀자 중에 자신의 가족에게 자신을 데리러 와 달라고 전해 달라고 한 사람도 있었는데, 이 말을 그녀의 가족에게 전하였으나 시아버지와 남편은 결국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고 한다.




<매원일기>


병자년(1636, 인조14)-김광계 56세


12월 30일 경자

봉화 의병 서기인 금시양琴是養이 와서 진중의 여러 가지 일을 물었다. 안동 의병장의 답통이 도착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향교 재사에 머물러 잤다.

三十日 庚子 奉化義兵書記琴是養來問陣中凡事. 安東義將答通來到. 余不得歸家, 留宿黌齋.



정축년(1637, 인조15)-57세


1월 1일 신축

정제장整齊將 이하 10여 인이 진중에 함께 있었다.

이실而實이 오천烏川에서 예안 관아에 와 나에게 함께 예안 현감을 들어가 만나보자며 부르기에 곧바로 가서 만나보았다. 권시중權是中과 조석붕趙錫朋 등 여러 사람을 만나보았다.

나는 그길로 집으로 와서 잤다.

一日 辛丑 在陣整齊將以下十餘人同在. 而實自烏川來到官門, 邀余共入見土主, 乃往見之. 見權是中·趙錫朋諸人. 余則仍來家宿.


1월 2일 임인

아침에 진중으로 들어가 일을 처리하였다.

二日 壬寅 朝入陣中治事.


1월 3일 계묘

인근 관아에 통문을 내어 묻는 일로 영주에 군관 이장형李長亨을, 안동에 이은李訔을, 봉화에 이지항李之恒을 보냈다.

○ 정제장과 정제군인整齊軍人 28명을 마당에서 점고하였다.

三日 癸卯 以隣近官通問事, 送軍官李長亨于榮川, 李訔于安東, 李之恒于奉化. ○ 整齊將整齊軍人二十八名, 點閱于中庭.


1월 4일 갑진

안동과 봉화에서 답통이 왔다. 안동은 이홍조李弘祚를, 봉화는 조이주趙以周를 대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四日 甲辰 安東·奉化答通來到. 安東李弘祚奉化趙以周爲大將云.


1월 5일 을사

영주에서 답통이 왔다. 박형朴兄의 편지를 받아보니, 박형이 영주 의병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 봉화 의병 서기인 금시양琴是養이 와서 잤다.

五日 乙巳 榮川答通來到. 見朴兄書, 朴兄爲榮川大將云. ○ 奉化義兵書記琴是養來宿.


1월 6일 병오

밤에 예안 현감이 술과 안주를 많이 갖추어 와서 의병청의 여러 사람을 호궤하였다.

○ 군관과 병사를 모아 활쏘기를 시험하였다.

六日 丙午 夜主倅多備酒饌來, 饋義廳諸人. ○ 會軍兵試射.


1월 7일 정미

아침에 이실而實과 시우時遇와 함께 예안현에 들어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전적 김경여金慶餘⋅진사 채심형蔡心亨 및 □□□ 등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많은 시사를 논하였다.

현의 아전 이충걸李忠傑이 관아의 일로 단양丹陽에 갔는데, 고목을 보내 말하기를, “관동關東 □……□ 1월 초3일에 또 이천의 쌍령雙嶺 아래에서 패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인심이 □……□

七日 丁未 朝與而實·時遇, 入官門致謝. 見典籍金慶餘·進士蔡心亨及□□□, {諸人}, 多論時事. 官吏李忠傑, 以官事, 往[丹]陽, 告目云, 關東□……□, 正月初三日, 又敗于利川雙嶺下云云. 人心□……□

□……□ 등이 보러왔다.

□……□等來見.

□……□ 복통으로 하인 집으로 나가 조리하였다.

□……□腹痛, 出下人家調治.


1월 11일 신축

종일 아파서 신음하였다.

입춘立春 정월절正月節이다.

{十一日 辛丑} 終日呻吟. 立春正月節.


1월 12일 임자

밥을 먹은 뒤에 복통이 잠시 나았기에 도회청都會廳에 들어가 일을 처리하고, 비로소 군사를 움직일 계획을 세웠다.

날이 저물어서 군사들을 호궤하였다.

十二日 壬子 食後暫愈, 入都廳治事, 始爲行師之計. 日暮犒軍.


1월 13일 계축

밥을 먹은 뒤에 집으로 와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아우 및 조카들과 함께 선안역宣安驛에서 잤다. 회경晦卿도 와서 함께 잤다. 박용보朴龍普⋅이화李華⋅이영환李榮煥⋅심수해沈壽海도 와서 잤다.

十三日 癸丑 食後來家治行, 與弟姪輩, 宿于宣安驛. 晦卿亦來同宿. 朴龍普·[李]華·李榮煥·沈壽海, 亦來宿.


1월 14일 갑인

아침에 여희형汝熙兄과 이실而實 등 여러 사람이 보러왔다. 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서 성천사聖泉寺에서 잤다. 날씨가 몹시 추워서 찬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이직以直과 렴이 따라왔다.

十四日 甲寅 朝汝熙兄·而實諸人來見. 食後發行, 宿于聖泉寺. 日氣甚寒, 冷風徹骨. 以直從之.


1월 18일 무오

안동 의병장 이홍조李弘祚와 영주 의병 부장 금충달琴忠達이 보러왔다. 전간全澗도 왔다. 그 나머지는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다. 영주 의병 대장 박 도사朴都事 형은 문경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十八日 戊午 安東義將李弘祚·榮川副將琴忠達來見. 全澗亦來. 其餘不可勝紀. 榮川大將朴都事兄, 往聞慶不還.


1월 19일 기미

감기에 걸려서 종일 심하게 앓았다. 박형朴兄이 문경에서 왔으나 또 가서 뵙지 못하였다. 안동 의병은 새벽녘에 벌써 떠났다고 한다.

十九日 己未 得傷寒, 終日苦痛. 朴兄自聞慶來, 而亦不得往拜. 安東義兵, 曉頭已發云.


1월 20일 경신

눈과 비가 크게 내렸다. 아픈 증세는 어제와 같다.

봉화 의병장 조이주趙以周가 보러왔다. 계직季直도 보러왔다.

二十日 庚申 大雨雪. 痛勢如昨. 奉化義將趙以周來見. 季直亦來見.


1월 22일 임술

날씨가 몹시 추웠다. 병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심수해沈壽海와 박용보朴龍普 등을 시켜 병력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이직以直 및 염과 함께 원당元堂으로 돌아와 자형과 누이를 뵈었다. 오여영吳汝楧⋅오익황吳益熀 등 여러 사람과 박자상朴子常 형을 만나보았다.

○ 나는 기운이 몹시 불편하였다.

二十二日 壬戌 日氣甚寒. 病不得前進, 使沈壽海·朴龍普等, 領兵而去. 與以直·還到元堂, 拜兄姊. 見吳汝楧·吳益熀諸人及朴子常兄. ○ 余氣甚不平.


1월 25일 을축

집에 도착하였다.

이중명李仲明씨가 보러 와서 말하기를, “용궁에 있을 때 청나라 오랑캐의 소리가 매우 급박한 것을 듣고 한밤중에 황급히 ……”라고 하였다.

二十五日 乙丑 到家. 李仲明氏來見云, 在龍宮聞賊聲甚急, 夜半遑遽…….


1월 29일 기사

의병청義兵廳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아픈데도 억지로 향교에 들어갔다. 윤동로尹東老⋅황유장黃有章⋅김시만金時萬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종일 쓰러져 누워있었다. 정자 채성구蔡聖龜가 보러왔다.

二十九日 己巳 義廳有不得已事, 力疾入校. 尹東老·黃有章·金時萬數人在矣. 終日頹臥. 蔡正字聖龜來見.


1월 30일 경오

온 고을이 일제히 모였다. 이실而實⋅백달伯達⋅맹견孟堅 등 여러 사람이 왔다.

三十日 庚午 一鄕齊會. 而實·伯達·孟堅諸人來.


2월 3일 계유

지난번에 관찰사 심공沈公이 안동과 예안 두 고을을 시켜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였는데, 의병 도대장都大將이 죽령竹嶺에서 전령을 바꾸어서 각 읍으로 하여금 행군하여 죽령을 넘으라고 하니, 우리 읍의 군인들은 대부분 도망가고 흩어졌다.

뜻밖에 용보龍普와 이화李華가 와서 걱정을 고하면서 장차 도망간 군인을 뒤쫓아 잡아들일 것라고 하였다.

이실而實이 또 잠깐 왔다. 진중에 일이 많아서 밤에도 편안히 잠들 수가 없었다.

三日. 癸酉. 頃者方伯沈公, 使安·禮二邑, 把守竹嶺, 而義兵都大將竹嶺改傳令, 使各邑行軍踰嶺, 而此邑之軍多逃散. 不意龍普·李華來告悶, 將推捉逃軍. 而實又暫來. 陣中多事, 夜不安寢.


2월 6일 병자

권회경權晦卿과 박자경朴子敬이 보러왔다. 날이 저물어서 박용보朴龍普와 이화李華가 와서 박형朴兄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주상께서는 성을 나와 항복하고, 동궁은 잡혀 가고, 둘째 왕자 및 비빈妃嬪들도 모두 잡혀갔다고 하였다.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였는데, 죽으려 해도 죽을 곳이 없다.

이직以直과 함께 사간 재종숙을 가서 뵙고 서로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동네의 친지들도 다 와서 모였다가 밤이 깊어서야 흩어졌다.

六日. 丙子. 權晦卿·朴子敬來見. 日暮朴龍普·李華來傳朴兄簡, 南漢城見陷, 主上出降, 東宮被執, 二王子及妃嬪皆被執. 西向慟哭, 欲死無地. 與以直, 往拜司諫叔侍, 相向慟哭. 洞親皆來會, 夜久乃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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