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배치의 중요성
늘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자기가 얄량하나마 권력이란걸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은 특히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는걸 못 견뎌한다. 작게는 인사며, 회식 때의 자리배치며, 그런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들 곁에 있으면 참 피곤해지곤 한다. 하지만 어쩌랴! 어디에나 있는 사람인 것을.
병자호란의 혼란함이 간신히 잦아든 1637년 2월, 지난 12월에 부임한 예안 현감 김경후(金慶厚)가 도산서원에 들르기로 했다. 원장인 김광계는 2월 25일 아침부터 서원으로 가서 현감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이날 현감의 행차를 위해 이은(李訔)⋅이천익(李天翼)⋅이숙발(李俶發)이 집사를 맡았다.
김광계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현감은 저물녘이 되어서야 도산서원에 당도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김문욱(金文勗)과 생질 채성귀(蔡聖龜) 등 조카 대여섯 명을 대동하고 왔다. 이들은 난리를 피하여 예안으로 왔다가 아직 돌아가지 않은 피난민들이었다. 모두 함께 사당에 참배를 하고 술을 몇 잔 마신 뒤, 일행은 도산서원을 나와 역동서원으로 갔다. 채심형(蔡心亨), 채문형(蔡門亨)등도 함께 역동서원에서 술을 여러 순배 돌리고 나서 예안 현감은 돌아갔다.
김광계는 나름대로 성대하게 음식을 마련했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했으니 현감도 만족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술을 잘 마시고 돌아간 예안 현감이 불현듯 서원 원장에게 배속된 종 5명, 집사에게 배속된 종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자형이 말렸기에 그들을 도로 돌려보냈고, 차사를 보내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의 일을 맡아보는 두 장무(掌務)를 대신 잡아들였다.
예안 현감이 이렇게 사람들을 잡아들인 이유는 다름 아닌 자리배정 때문이었다. 서원에서 술을 마실 때 현감인 자신의 자리를 상석인 북쪽 벽에 잡아주지 않았음을 그의 아들과 조카들이 언급하며 화를 부추긴 것이다. 그러나 관례상 서원은 관직의 고하로 자리를 배정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현감을 상석에 앉히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현감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 배정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책망하며 두 장무를 매질하려 들었다.
하지만 서원 장무를 매질하는 것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현감은 대신 그를 모시는 아전을 매질하면서 ‘현감인 내가 북쪽 벽 아래에 남쪽을 향하여 앉아야 하는데, 동서로 자리를 배치하여 마주 보고 앉게 하였으니 불공한 것이다.’ 라며 꾸짖었다. 김광계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곧 현감이 역정을 낸 자리배정 사건은 예안 지역 유생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김령은 이 사건을 전해듣고 자신의 일기에 "어리석고 멍청하며 되먹지 못한 인간이다. 어찌 일찍이 한 번 웃음거리라도 되겠는가. 참 못났기도 하다" 라고 적었다.
<매원일기>
정축년(1637, 인조15)-김광계 57세
2월 24일 갑오
역동서원에 왔다. 오는 길에 예안 현감 김경후金慶厚 및 채성구蔡聖龜를 만나보고, 또 명암鳴巖에 있는 산소에 성묘를 하였다. 서원에 도착하니 전적 김경여金慶餘⋅진사 채심형蔡心亨⋅이충운李翀雲⋅채원구蔡元龜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여러 사람이 다 머무르며 잤다.
二十四日. 甲午. 來易院. 來路見土主金慶厚及蔡聖龜, 又省山于鳴巖. 到院則金典籍慶餘·蔡進士心亨·李翀雲·蔡元龜已來矣. 諸人皆留宿.
2월 25일 을미
어제 예안 현감이 도산서원에 오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아침에 도산서원에 가서 기다렸다. 이은李訔⋅이천익李天翼⋅이숙발李俶發이 집사로서 왔다.
저물녘에 예안 현감이 왔는데, 채성구蔡聖龜 및 예안 현감의 아들 김문욱金文勗도 왔다. 사당에 참배한 뒤에 술을 몇 잔 마시고 마쳤다.
예안 현감 및 여러 사람이 다 역동서원으로 왔고 나도 뒤따라 왔다. 채심형蔡心亨 등 여러 사람은 다 서원에 머물러 있고, 김 전적金典籍은 떠나가고 채문형이 왔다. 또 술을 여러 잔 마시고나서 예안 현감과 여러 손님은 다 헤어지고 채문형蔡門亨만 머물러 자고 춘경春卿도 와서 잤다.
밤에 예안 현감이 차사를 보내서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두 서원의 장무院掌를 잡아 갔다.
二十五日. 乙未. 昨日土主約來于山院, 朝往山院待之. 李訔·李天翼·李俶發, 以執事來. 向晩土主來, 蔡聖龜及土主之子金文勗亦來. 謁祠後, 酌數巡而罷. 土主及諸人皆來易院, 余亦追來. 蔡心亨諸人皆留在, 而金典籍去, 蔡門亨來矣. 又酌酒數巡, 土主及衆賓皆散, 惟蔡門亨留宿, 春卿亦來宿. 夜土主發差, 推捉兩院掌務而去.
<계암일록>
김령(김광계의 재종숙) 61세
2월 25일
맑고 추웠다. 사람을 보내어 이 원주에게 병문안을 하였다.
○ 모레가 외조모 기제사인데, 누이가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고 싶다고 하여 그의 청대로 하였다.
○ 예안 현감이 지난번에 도산과 역동 두 서원에서 사당에 참배했는데, 그의 친척과 아들, 조카 5~6명을 거느리고 서원 안에서 성대하게 음식을 장만하여 먹고 마시며 종일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다가 저녁 무렵에 돌아갔었다. 그런데 예안 현감이 밤을 틈타 사람을 보내어 원장의 장노壯奴(16~59세의 종) 5명과 집사 유생의 종을 잡아들였는데, 그 자형의 말에 따라 도로 중지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두 서원의 장무掌務(일을 주관하는 사람)를 잡아들였다. 대개 서원에서 주벽主壁에 자리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자식과 조카들이 이것을 언급하며 그의 노기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크게 가소롭다. 서원을 설립한 이후로 어찌 감사와 수령 중에 북벽北壁에 앉은 사람이 있었던가? 서원은 향교와는 같지 않아서 관인이 이익과 영달을 뽐내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람에게서 이 일을 보게 되었으니, 가소로워서 책망할 수도 없다.
○ 예안 현감이 두 서원의 장무를 잡아들여 매질하려다가 도로 중지하고, 그 배행하는 아전을 매질하며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북벽北壁에 마련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였다. 그의 행동을 살펴보면 어리석고 멍청하여 되먹지 못한 인간이다. 어찌 일찍이 한번 웃음거리라도 되겠는가! 참으로 못났기도 하다.
2월 26일 병신
김시만金時萬이 또 왔다. 양 장무가 와서 말하기를, “예안 현감이 힐난하여 꾸짖기를, ‘현감인 내가 북쪽 벽 아래에 남쪽을 향하여 앉아야 하는데, 동서로 자리를 배치하여 마주 보고 앉게 하였으니 불공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손호孫祜가 보러왔다.
춘분春分 이월중二月中이다.
二十六日. 丙申. 金時萬亦來. 兩掌務來言, 土主詰責云, 主倅當坐北壁下南向, 而以東西設席對坐, 爲不恭云云. 孫祜來見. 春分二月中.
같은 시기 조정에서는?
병자호란 중 전투시 도망가거나 경솔하게 진군한 장수들을 처벌
참고: 조선시대의 자리배치
조선시대의 자리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었다. 공관(公館)의 북벽(北壁)은 주인의 자리고, 창 가까이에 있는 자리는 손님의 자리였다. 또한 정면을 동서로 향하면(북쪽에 앉으면) 주인의 자리이며, 북쪽 끝을 바라보고(남쪽에 앉으면) 앉으면 손님의 자리였다. 이 규칙에서 말하는 방향은 문을 기준으로, 문이 남쪽이라고 상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자리 배치를 생각해보면, 문을 바라보고 앉는 것이 주인의 자리이며, 주인을 가운데로 하여 동서로 마주보고 앉는 자리가 손님의 자리인 것이다. 주인이 둘이면 한 명은 서쪽에, 한 명은 동쪽에 마주보고 앉는다. 주인과 손님 단 둘만 만나는 자리라면 주인은 북쪽 벽을 등지고 문을 마주보며, 손님은 북쪽 벽을 바라보며 주인과 마주보고 앉는다.
관청에서도 비슷한 규칙이 적용되었다. 북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며 앉는 자리가 가장 상석이며, 문에서 가장 가깝고 북쪽을 바라보는 자리가 말석이다. 만일 서열의 차이가 없다면 가장 상석인 북벽을 등지고 앉는 자리는 비워두고 마주앉게 된다. 하지만 동쪽 벽을 등진 자리와 서쪽 벽을 등진 자리에도 서열이 있었다. 동쪽 벽을 등진 자리가 서쪽 벽을 등진 자리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의 자리였다. 즉, 북벽->동벽->서벽->남벽 순의 서열이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여러 사람이 앉게 되는 자리에서는 북벽->동벽->서벽->동벽->서벽 순으로 번갈아가며 앉게 되었다.
남녀가 앉는 경우에는 내외를 구분하여 배치하게 되었는데, 궁중 연회에서는 장소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내외를 나누었지만, 사가(私家)의 연회는 주로 친척들끼리 함께 자리를 했기 때문에 그리 크게 공간을 구분하지 않았다. 다만 남성은 동벽에, 여성은 서벽에 자리를 배치하는 정도의 구분만 하였다.
이러한 규칙은 한나라 초에 숙손통(叔孫通)이 「조정예의(朝廷禮儀)」를 제정하면서 확실시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북극성이 우주의 기준이며, 해가 뜨는 동쪽과 해가 지는 서쪽이 있어 북->동->서의 방위의 서열이 정해진다고 하는 데에서 비롯하였다. 숙손통은 황제가 북쪽의 높은 곳에 앉으며, 승상과 문관들은 전(殿)의 동쪽에, 열후와 무장들은 전의 서쪽에 서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고려의 문사 이규보는 이러한 예법이 신라 때에도 시행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이러한 예법도 일찍부터 전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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