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섹스스캔들
유명한 야사중 하나인데, 이황과 이이의 부부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이는 아주 점잖은 스타일이어서 이를 훔쳐본 이이의 제자들(군자라 할 수 없군)은 이황의 제자들에게 우리 선생님이 과연 선비답다고 자랑을 했다. 이황의 제자들도 역시 이황의 방을 훔쳐보는데(역시 군자라 할 수 없군) 이황은 아주 격렬하고 다양한 밤생활을 했다고 한다.......이런 야사가 있을 정도로 이황은 부인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저 야사는 그저 재미삼아 사람들이 하던 말로 근거는 없다.
근거가 없더라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지분거리기를 좋아한다. 저 야사만 해도 근거가 없는데도 수백년 동안 내려온 이야기 아니겠는가. 조정에서도 근엄한 조정 대신들과 왕이 퇴계의 성생활에 대해 입방아를 찧었다.
김광계는 퇴계 이황에게 직접 수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적 배경은 이황에게 두고 있었다. 또 그는 도산서원의 원장이기도 했다. 퇴계의 문파라는 자의식은 안동 지역 양반들을 강하게 결속시켜 주는 요소였다.
그런데 만일 누가 이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나쁜 소리를 한다면? 그 사람은 영남 문인들의 칼받이가 될 각오를 해야 했다. 퇴계는 영남 문인 모두의 선생님이었고, 정신적 지주였다.
1635년 8월, 한 대범한 사람이 조정에서 이이와 이황을 민감한 성문제에 끌어들였다. 당시에 돌던 소문으로는 이이나 이황 중의 한 사람이 상중에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인조는, “이이에게 상중(喪中)에 낳은 아들이 있다고 들었다.” 라고 말하였다.
본래 상중에는 행동을 조심히 해야 하는데, 이 때 낳은 아들이 있다는 것은 상주가 상중에 잠자리를 했다는 큰 윤리적 결함을 의미했다.
영의정 윤방이 전하께서는 어디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셨는지 묻자, 인조는 “이귀(李貴)에게 들었으니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윤방은 “이귀는 만년에 모든 것이 가물가물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아무개(이황)에 대한 말인데, 잘못하여 이이의 일로 된 것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곧 이러한 대화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영남에 전해졌다. 영남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워졌다. 그런데 진짜 있었던 대화가 무엇인지 도무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실상은 이 말을 윤방이 한 것이 아니라 최명길이 하였다고도 했다. 아무튼 윤방과 최명길이 있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것만은 확실했다.
9월 초에는 조정 관리들 중에서도 항의의 상소를 올리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산서원이 있는 예안 지역에서도 당연히 이황에 대한 모욕적인 이야기에 대해 상소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10월 4일에는 영남의 유생들에게 함께 소를 올리자는 통문이 돌았다.
그러나 김광계는 상소에 참가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김광계의 조카 김초가 서울에서 내려와 이 사건에 대해 항의해 봤자 소용없다는 식으로 집안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김광계의 재종숙인 김령은 이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도산서원 원장인 김광계가 반드시 이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10월 8일에는 김광계에게 김령의 아들들이 찾아와서 소에 대해 언급하고, 함께 향교로 가서 소에 대해 의논하자고도 하였다.
결국 다음날부터 김광계는 향교로 가서 상소에 대한 의논을 하기 시작하였다. 12일에는 김령의 집에 가서 논의하고, 다음날에는 도산서원에서 여러 유생들과 매일같이 상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10월 20일에는 드디어 상소문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고 23일이 되어서야 상소문 초안이 완성되었다. <퇴계변무소>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퇴계변무소>는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이황을 무고한 것이 윤방인지 최명길인지도 명확하지 않았고, 최명길이 <퇴계변무소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최명길은 쓸데없는 데 신경쓰지 말고 전란의 기운이 다가오니 국방이나 신경쓰자고 주장하면서 영남 유생들의 상소를 무력화하였다.
그래서, 이황이 상중에 아이를 얻은 것은 사실일까?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매원일기>
을해년(1635, 인조13)-김광계 55세
10월 8일 을유
해가 신정申正 4각四刻에 졌다. 조카 초가 서울에서 왔다. 밥을 먹은 뒤에 좌수 허용이 와서 말하기를, 현감 남연南碝 공이 가을의 무과에서 시관을 할 때 사사로운 정을 따른 일로 관찰사가 계문啓聞하여 죄줄 것을 논하였기 때문에 잡혀가 신문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맹견 형제가 와서 말하기를, 소를 아뢰는 일로 오늘 향교 재사에 모여 의논할 것이므로 내가 같이 가주기를 아주 간절히 바랐으나 나도 박형朴兄과 약속이 있어서 능동陵洞에 가야할 것이기 때문에 향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도와 금숙琴叔과 함께 능동에 갔더니 박형은 일찍 왔다가 곧바로 갔다. 이직도 토곡兔谷에서 와 두 아우 및 금숙과 함께 같이 잤다. 이른바 ‘진소陳疏’라는 것은 재상 윤방尹昉이 어전에서 망발한 일이다.
八日. 乙酉. 日入申正四刻. 礎姪自京來. 食後座首許蓉來言, 土主南公碝, 以秋間武科試官循私事, 方伯啓聞論罪, 將拿推云矣. 又孟堅兄弟來云, 以陳疏事, 今日將會議于黌舍, 欲我同往甚切, 而余亦與朴兄有約, 將往陵洞. 故不得入校. 與以道琴叔往陵, 則朴兄早來卽去矣. 以直亦自兔谷來, 與兩弟及琴叔同宿. 所謂陳[疏], 尹相昉於御前妄發事也.
10월 9일 병술
밥을 먹은 후에 향교 누각에 오니 덕온과 맹견 등 여러 사람이 다 와서 모여서 소회疏會에 관한 회문回文을 냈다. 관아에 와서 현감을 만나보고 위로를 하려 하였는데, 마침 이실을 만나서 함께 들어갔다. 집으로 오니 밤이 이미 깊었다. 오는 길에 잠간 비가 내렸다.
九日. 丙戊. 食後來黌軒, 德昷孟堅諸人皆來會, 出疏會回文. 來官廨, 見土主致慰, 適遇而實, 同入. 到家, 夜已久矣. 來路暫雨.
10월 12일 기축
이도가 며느리를 데리고 대구大丘에 갔다.
○ 밥을 먹은 뒤에 사간 재종숙을 가서 뵙고 일을 의논하였다. 이실⋅백달⋅맹견 형제도 자리하여 함께 의논하였다. 소설小雪 시월중十月中이다.
十二日. 己丑. 以道率婦往大丘. ○ 食後往拜司諫叔侍議事. 而實伯達孟堅兄弟亦在座相議. 小雪十月中.
10월 13일 경인
좌수 금시무⋅회경⋅맹견이 보러왔다. 소회가 임박하여 서로 의논하고 조치할 일이 많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명견과 함께 도산서원에 왔다. 함께 잤다.
十三日. 庚寅. 琴座首是武晦卿孟堅來見. 以[疏]會已迫, 多有相議處置事, 不得已與孟堅來山院. 同宿.
10월 20일 정유
□……□ 광일이 왔다. 이에 앞서 임보任甫와 춘경을 시켜 상소문을 짓게 하였으나 잘못된 곳이 많이 있어서 여러 사람과 함께 점검하여 고쳤다.
[二十日. 丁酉. □……□]光逸來. 先是使任甫·春卿製[疏], 而多有疵病, 與諸人點竄.
10월 21일 무술
상소문 초안을 고쳐서 바로 잡을 일로 사간 재종숙댁에 갔다. 이실도 왔다.
二十一日. 戊戌. 以改正疏草事, 往司諫宅. 而實亦來.
10월 22일 기해
요립耀立과 광일이 또 소장에 관한 일로 왔다. 이상일李尙逸이 영주에서 와서 머무르며 잤다.
二十二[日]. 己亥. 耀立光逸又以疏事來. 李尙逸自榮川來, 留宿.
10월 23일 경자
이생李甥이 떠나갔다. 요립과 광일이 또 왔다. 상소문 초안을 정서하여 보냈다.
○ 의금부[金吾] 서리가 와서 예안 현감 남공을 잡아서 갔다고 한다.
二十三日. 庚子. 李甥去. 耀立光逸又來. 正書疏草以送. ○ 金吾吏來, 拿土主南公以去云.
이 때 조정에서는...
1635년(인조 13) 10월
《시전》 강독
심세괴의 횡포 대응 논의
양전 실시
과거시험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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