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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양반 약빨로 버티다

by 소주인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지만 요즘은 도무지 밤을 샐 수가 없다. 운동을 하면 될 텐데 간사한 사람 마음은 자연히 손쉬운 쪽으로 향한다. 영양제든 뭐든 챙겨먹으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실리마린도 먹어보고 비타민도 괜히 먹어본다. 어디서 듣자 하니 비싼 오줌을 만들 뿐이라던데...그런 말을 듣고 나니 플라시보 효과도 얻기 어려워 정말 비싼 오줌만 만든 것 같다.


김광계는 평소 몸이 허약한 편이었다. 나이까지 들고 나니 더욱 병을 앓는 날이 많아졌다. 운동을 하면 될텐데, 사람 마음 다 똑같은지 김광계도 약에 의존한다. 하지만 안동에서 구할 수 있는 약은 아무래도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김광계는 약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나름대로 공부해서 약방문을 스스로 지어서 약재를 조합하곤 했다.


김광계가 57세가 되던 1637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많은 서울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왔고 그 중에는 서울 약장수도 있었다. 김광계에게는 안동에서 구하기 힘든 중국 약재를 구할 수 있는 기회였다. 뭐든 메이드 인 차이나가 최고인 시대이다.

이양일(李良一)은 서울에 살던 약장수인데, 1637년 3월 13일에 김광계의 집에 찾아왔다. 이 날 김광계가 이양일에게 약을 샀는지는 알 수 없으나, 5월 13일에 이양일이 다시 김광계의 집에 왔을 때 김광계는 하룻밤을 지내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귀한 약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락한 거처를 제공받을 수 있었으니 수지맞는 장사다.

서울 약장수가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짜하게 퍼졌는지 동네 사람들도 김광계의 집에 와서 이양일에게 평소 구하기 힘든 중국한약재를 샀다. 안동 읍내에도 약국과 의원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중국한약재까지 다양하게 갖추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바빠진 것은 김광계였다. 이양일에게 약을 사려는 사람들이 오는 통에 김광계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로 하루를 꼬박 보내야 했다. 그 다음날에는 셋째 동생 김광보(金光輔)도 와서 약을 지어갔다.


전란이 잦아든 이후에야 이양일은 서울로 돌아갔다. 이 때 김광계의 집에서 쏠쏠하게 벌었는지 이후로도 반년에서 1년에 한번씩, 1641년까지 김광계의 집에 들러서 약을 팔고 가곤 했다.


김광계는 또 약을 직접 조제해 먹기도 했다.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딱히 김광계만 스스로 약을 조제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 시기 양반 남성들은 서로 약과 관련된 정보를 교환하고 약재를 구해 직접 약을 조제해서 복용하곤 했다. 부작용은 없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일기를 통해 알기는 어렵다. 간혹 약을 먹고 병세가 악화되는 경우는 왕왕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약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떤 약이든 써서 살아나면 다행이고, 약을 먹고 죽으면....안타까운 일이다.(매 병환마다 임상이다)


김광계가 직접 약을 조제한 기록은 김광계가 55세이던 1635년부터 시작된다. 원래 체질이 건강하지는 않았던 김광계는 평소 과음을 하거나 외출 후에는 반드시 몸을 조리하고는 했다. 무더위나 혹한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수록 더 몸을 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김광계는 직접 약을 조제하기 시작하였다. 안동 읍내에 약국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약재를 사오기도 하고 근처에 약을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조제법을 묻기도 하였다.


1635년 11월에 아우들과 함께 약을 조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637년 2월 7일에는 기를 보충하는 보기탕(補氣湯)을 지었다. 닷새 후에는 약에 대해 잘 아는 이 군위(李軍威)가 재종숙 김령(金坽)의 집에 있다는 것을 듣고 약에 대해 물어보러 가 보았으나, 이 군위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여름의 무더위가 한창이던 7월에는 아들 염과 조카들을 모아 함께 약을 지었다. 자신도 복통을 앓고 있었지만 조카며느리도 앓고 있는 터라 더욱 약을 짓는 일이 중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1638년 3월에도 약을 지었는데, 일부러 멀리서 와서 약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환약을 만들어보았다. 아마도 처음 해 보아서 그런지 약재를 찧고 빻아서 가루를 내는 일이 힘들게 느껴졌다. 4월에도 약을 조제하였는데, 이번에는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서 환약을 만들었다. 이제 연례행사처럼 약을 만들게 되었고, 다음 해인 1639년에도 봄이 되자 환약을 만들었다.


김광계는 약의 중요성을 또한 잡기(雜記)에 따로 모아 적어두기도 하였는데, 건강한 삶을 위한 지침서 같이 목록화 해 놓았다. 평소 밥 먹듯 약을 먹는 건강한 어르신 이야기부터, 평소 김광계가 앓던 배탈 등에 대처하는 방법이나 환약에 대해서도 정리하였다. 스스로의 건강에 늘 경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술은 끊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아하. 술도 약주로구나.


김광계가 사망한 것은 67세가 되던 1646년. 오래 살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나이이다. 그렇다고 평소 골골거리던 것에 비하면 오래 산 것 같기도 한 나이이다. 약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매원일기>


을해년(1635, 인조13)-김광계 55세


11월 25일 신미

이도와 함께 약을 조제하였다. 흠경이 보러왔다.

二十五日. 辛未. 與以道劑藥. 欽卿來見.


12월 20일 병신

아우들과 함께 약을 조제하였다. 우성헌과 류시원이 보러왔다.

二十日. 丙申. 與弟輩劑藥. 禹成憲柳時元來見.



정축년(1637, 인조15)-김광계 57세


2월 7일 정축

눈과 비가 종일 내렸다.

○ 보기탕補氣湯을 지었다.

○ 덕온德昷이 보러왔다.

七日. 丁丑. 終日雨雪. ○ 劑補氣湯. ○ 德昷來見.


2월 12일 임오

들으니, 류 지평柳持平의 부인이 난을 피하여 어제 밤에 자개子開의 집에 왔다고 하므로 직접 가서 명함을 들였다. 류천지柳千之 □……□ 만나보았다. □……□ 사간 재종숙댁에 상제 한 명이 뒤따라 와 있었는데 곧 상사 김휴金烋이다. 이 군위에게 약을 물어 지으려 하였으나 이 군위는 벌써 떠나갔다. 같이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十二}日. 壬午. 聞柳持平室內避亂, 昨夜來宿子開家, 躬往納名. 見柳千之□……□司諫宅, 有一棘人從後來, 乃金上舍烋也. 欲問藥于李軍威, 軍威已去. 同入穩話.


3월 13일 임자

이직以直 및 경익景益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나도 모르게 취하였다.

서울에 사는 약장수 이양일李陽一이 보러왔다.

十三日. 壬子. 與以直·景益對酌, 不覺至醉. 京居賣藥人李陽一來見.


5월 13일 경진

서울에 사는 약장사 이양일李陽一이 어제 와서 머물며 잤다. 동네 사람 및 금호겸 등 여러 사람이 많이 와서 중국 한약재를 샀다. 오늘은 손님을 맞아들여 대접하는 일로 일과를 접었다.

○ 밤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까지 내렸다.

十三日 庚辰 京中藥商李陽一昨日來, 留宿. 洞人琴好謙諸人多來貿唐材. 是日以應接, 輟課. ○ 夜雨至朝.


5월 14일 신사

<주자대전>을 읽었다. 이도以道가 와서 약을 지었다.

○ 아침에 안개가 끼고, 오시에 잠깐 비가 내렸다.

十四日 辛巳 大全. 以道來劑藥. ○ 朝霧, 午時暫雨.


7월 5일 신미

아이와 조카들과 함께 약을 지었다.

五日 辛未 與子姪輩劑藥.


7월 7일 계유

아침에 또 복통을 앓아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조카 방磅의 처 정씨鄭氏가 중병을 얻은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인사를 살피지 못하니 걱정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우 및 조카와 함께 약을 지었다.

七日 癸酉 朝又得腹痛, 不得與祭. 磅姪之妻鄭, 得重病已踰月矣, 不省人事, 悶不可言. 與弟姪劑藥.


10월 30일 갑자

<주역>을 읽었다.

○ 약장수 이양일李陽一이 왔다.

三十日 甲子 讀易. ○ 買藥人李陽一來.



무진년(1638, 인조16)-김광계 58세


3월 27일 경인

약을 조제하였다. 멀리서 와 약을 짓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잇달아 와서 성명을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다. 숙명과 계명季明이 날마다 보러 왔다.

二十七日 庚寅 劑藥, 遠來而藥之人, 連絡不絶, 而不能記姓名矣. 叔明·季明逐日來見.


3월 28일 신묘

아침에 전성지 부평全性之富平이 보러 왔다. 어제부터 환약을 조제하고 있는데 찧고 빻아서 가루를 만드는 것이 몹시 어렵다.

○ 아침에 비가 잠깐 내리다가 곧바로 그쳤다.

二十八日 辛卯 朝全性之富平來見. 自昨日劑丸藥, 搗搾作末, 甚不易. ○ 朝暫雨卽止.



4월

5일부터 윤신환潤身丸을 복용하였다.

四月 自初五日, 服潤身丸.


4월 1일 갑오

약을 조제하였다.

一日 甲午 合藥.


4월 2일 을미

여러 사람을 청하여 환丸을 만들었다.

○ 비가 조금 내렸다.

二日 乙未 請諸人作丸. ○ 小雨.


6월 24일 을묘

이진탕二陳湯을 조제하였다.

해가 유정酉正 사각四刻에 졌다.

二十四日 乙卯 劑二陳湯. 日入酉正四刻.


6월 25일 병진

약을 복용하였다. 학질은 다시 오지 않았다.


10월 17일 병오

약을 사는 일로 안동 읍내로 갔다. 의원에 당도하여 도감都監 송공宋公을 만나보고, 여러 사람을 만나보았다.



기묘년(1639, 인조17)-김광계 59세


3월 24일 신사

원당元堂으로 돌아왔다. 길에서 계직季直을 만나 함께 왔다. 이날부터 약을 지었다.

二十四日 辛巳 還元堂. 途遇季直同來. 自是日劑藥.


3월 27일 갑신

곳곳의 복사꽃이 비단결과 같다. 이날 약을 만들었다. 김유절金幼梲이 보러 왔다.

二十七日 甲申 處處桃花如錦. 是日合藥. 金幼梲來見.


3월 28일 을유

맑았다. 여러 계집종이 환약을 만들었다.

二十八日 乙酉 淸. 衆婢丸藥.


잡기雜記


○ 고의방古醫方에 “사람의 나이가 마흔 살이면 입에서 좋은 약이 떨어지지 않고, 예순 살이 가까워지면 기력이 허약한 사람은 단 하루도 보약이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지난번에 박 동지朴同知 어른을 만나 보았는데, 평상시에 밥을 먹고 국을 마시듯이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古醫人年四十, 羙藥不離於口, 年近六十, 虛羸氣弱之人, 不可一日無補藥也. 頃見朴同知[丈], 服藥如常時喫飯啜羹也.

○ 신시申時 이후에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 비록 배가 고프더라도 한 숟가락의 밥과 죽을 조금조금 내려 보내야 한다.

○ [申]後飯不可食. 雖飢以一匙粥飯, 小小送下.

○ 미리 약청藥淸 1말을 저장하여 두어야 한다.

○ 當預貯藥淸一斗.

○ 조금이라도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두통과 복통이 일어나고 빈번한 설사로 원기가 크게 상하니, 이때로부터 술을 엄하게 금할 것이며, 또한 해장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 飮酒稍過, 則頭痛服痛, 頻頻洩瀉, 元氣大敗, 自此當痛禁也, 且勿飮卯酒.

○ □갈 때는 베개를 가져가야 한다.

○ [□]行時當持枕.

○ 나이가 연로한 사람은 잠자고 먹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한다. 음식을 알맞게 먹고 수면을 편안히 하며, 풍한風寒을 침범하지 않게 하고 몸을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양생養生의 큰 방법이다.

○ 年衰之人, 當致力於眠食. 節飮食安睡眠, 不犯風寒, 不强身動★, 養生之大節也.

○ 술은 눈을 크게 상하게 하니, 술 한 방울을 마시더라도 마시지 않은 것만 못하다.

○ 酒大傷眼, 飮酒一滴不如不飮.

○ 모름지기 사람은 싱겁게 먹고 적게 먹어야 한다. 정축년(1637, 인조 15) 동짓달 그믐날 날이 저물어서 밥을 먹으려할 때 갑자기 친족의 부음을 듣고는 다만 청채(菁菜, 순무)만 먹었는데, 이날 밤은 앉아있어도 졸리는 것이 없었고 정신이 맑고도 상쾌하였다. 고의방에 “싱겁게 먹으면 정신이 상쾌하고, 마음이 맑으면 꿈속에서도 편안하다.”라고 하였으니, 헛된 말이 아니다.

○ 人須淡食少食. 丁丑至月晦日日暮將食, 忽聞親族之訃只食菁菜, 是日夜坐無眠, 精神淸爽. 古醫云食淡精神爽, 心淸夢寐安者, 非虛語也.

○ 두부頭腐를 먹지 말아야 한다.

○ 勿食頭腐.

○ 경상 하도慶尙下道의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어쩌다가 한 번씩 굶주림으로 인하여 몹시 허기져서 참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토사자환菟絲子丸을 복용하였는데 자연스럽게 이런 증상이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나도 시험 삼아 복용을 하였더니 참으로 그러하였다.

○ 下道有一人言, 自少或因飢, 虛[乏]之甚, 難忍難堪. [故]服兔[絲]子丸, 自然無此患. 余亦試之信然.

○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약을 복용하는데 세 가지 어려움이 있다. 사람이 비록 병이 들더라도 먼 길을 가서 약을 묻는 것이 어렵고, 비록 약을 물었더라도 약재를 모아서 약을 짓는 것이 더욱 어렵고, 비록 약을 짓더라도 부지런히 날마다 약을 복용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

○ 有人言, 服藥有三難. 人雖有疾, 千里問藥爲難, 雖問藥而聚材劑藥爲尤難, 雖劑藥而勤勤逐日服之爲甚難也.



이 때 조정에서는...

병자호란 전후처리 중.



참고 : 조선시대 약재 판매와 사용

조선시대의 약 처방전인 약방문(藥方文)의 다른 이름은 화제(和劑)이다. 오래된 집안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서들 중에서는 종종 화제가 발견되기도 한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어 의원에게 보이면, 의원은 이 화제를 환자에게 써 준다. 17세기 이후부터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의원이 화제를 쓸 때 참고하는 주요 서적이 되었다. 또한 18세기 후반이 되면 <동의보감>은 지식인의 필독서 중 하나가 되었다. 의원이 용한지 아닌지를 판가름 내는 부분은 <동의보감>의 처방에서 환자의 상태에 따라 약재를 줄이거나 늘리고, 혹은 일부를 바꾸는 요령에 있었다.


환자들은 의원이 써 준 화제를 가지고 약재상이나 약국으로 갔다. 일종의 의약 분업이었던 셈이다. 또한 화제 자체가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용하다고 이름난 의사가 써 준 화제를 손에 넣기 위해 수소문을 해야 했음은 물론이고, 화제를 손에 넣는다고 해도 처방된 약재가 고가인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는 약물의 한 제 가격이 서울 집 한 채 가격인 700냥에 이르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약재를 사사로이 구하기가 어려웠다. 관청이 약재의 유통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반이라 할지라도 약을 구하기가 어려워 지방에서는 약재를 상부상조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서울에는 많은 약방들이 성업하였으며, 특히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 일대에는 많은 약재상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서울 각지에 약재상이 산재하였으며, 집에서 가까운 약재상을 ‘근국(近局)’ 혹은 ‘동국(洞局)’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주로 거래하는 약재상과는 외상으로 거래하기도 하였고, 당연히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래서 평소 약재상에게 선물을 하거나 하여 신뢰를 쌓으려 하였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약국이 많지 않아 약을 구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양반들은 약을 미리 집에 구비해 두고 큰 병에 걸린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진찰하여 약물을 오남용하기도 하였다. 약의 조제가 까다로운 경우에는 약국에 의뢰하였으나, 스스로 집안에서 환약 등을 조제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약국에 약재를 맡겼다가 바꿔치기 당하여 가짜 약재로 조제한 약을 받아먹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침이나 뜸을 기피하고 주로 약물로 병을 치료하려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약물 남용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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