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4대보험의 포근한 품 안에 들어갔던 시절, 첫 1년간 단 하루의 휴가도 쓸 수 없다는 것에 아주 놀랐었다. 지금은 아마도 제도가 바뀌어서 입사 1년차라도 휴가를 쓸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무튼 몇 년 전만 해도 저런 가혹한 일이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1년간 휴가를 쓸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다들 사정 봐 주면서 첫 1년차에도 휴가를 사용할 수 있기는 했다. 그래도 제도로 보장받는 것과 배려를 받아 편법을 쓰는건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또 합법적으로 휴가 일수가 정해져 있다고 해도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만큼 휴가를 소진할 수 있는 환경은 여전히 귀한 경우인 듯하다. 자기 앞으로 스무 개의 휴가가 발생했다고 할지라도 그걸 한 방에 붙여서 쓸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조선의 근무환경을 미화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휴가제도가 있었다는 것만 해도 박수를 쳐줄만 하긴 하다. 조선 관리들은 10일마다 하루씩 쉴 수 있었고, 또 특정 절기에 쉬는 것을 포함하면 1년에 38일 정도의 휴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적으로 급가를 신청해서 휴일을 얻기도 했다. 이를테면 장례나 제사, 혹은 부모 병환시 방문하는 일 등을 위해 급가를 신청했다. 제사 때에는 2~5일, 부모상을 제외한 상을 당했을 때에는 7~30일, 부모를 방문하러 가는 일(3~5년마다)을 위해 7일, 부모 병환시 30~70일 정도의 휴가를 사용할 수 있었다.
금난수가 어떤 명목으로 급가를 신청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금난수는 제릉 참봉으로 부임한지 약 3개월만에 고향인 안동에 돌아왔다. 긴 여정으로 피곤한 몸을 쉬게 할 새도 없이 친척들과 동네 어른들, 그리고 벗들에게 인사를 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집에 도착한 날로부터 사흘 뒤에는 시제(時祭)를 지냈다. 시제는 각 계절의 중간 달인 2·5·8·11월에 부모로부터 5대조에 이르는 조상에게까지 지내는 시절 제사이다.
조선에서는 조상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묘제를 절기마다 지냈기 때문에 시제와 묘제가 겹치기도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시기에 대해 이이(李珥)는 24절기 중 정월 15일, 3월 3일, 5월 5일, 5월 15일, 7월 7일, 8월 15일, 9월 9일의 일곱번에 걸쳐 묘제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시대나 집안마다 그 절차는 각기 달랐다. 금난수는 집에 오자마자 이 제사를 지내고, 모인 집안사람들 및 동네 사람들과 음복을 하며 오랜만에 교류하였다.
제사를 지낸 다음날인 9월 16일에는 이굉중이 지나는 길에 금난수에게 들렀기에 그와 함께 운암(雲岩) 동촌(東村: 현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으로 갔다. 금난수의 고종사촌인 손규와 암 이현보의 아들인 이숙량이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 전부터도 금난수는 운암을 찾으면 이들을 반드시 찾아보고는 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동촌 한가운데를 지나는 유곡천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시간을 보냈다. 잡은 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한잔 두잔 마시니 저물녘이 되자 잔뜩 취해버렸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지내다가 다시 한 번 천변에서 가을 날씨를 즐기고 싶었던지 9월 21일에는 청량산에 있는 협곡인 단사협(丹砂峽: 현 안동시 도산면 단천동) 하류로 갔다. 이번에 함께 한 사람들은 금응협, 금응훈, 그리고 그들의 외조카이자 퇴계 이황의 장손인 이안도 등이었다. 가을이라 통통하게 살찐 물고기들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십여 마리를 잡아 회를 쳐 여러 사람이 술에 곁들여 배부르게 먹었다.
달이 바뀌자 이번엔 술을 마실 핑계가 천렵에서 제사로 바뀌었다. 월초에는 초하루 제사가 있었고, 초하루 제사 뒤에는 10월 3일에 다시 한 번 시사를 지냈다. 음복을 하면서 여러 사람과 어울렸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이틀 뒤에는 소종사촌인 손환 등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동계서재를 구경한다며 손에 손마다 술을 들고 모였다.
다시 임지인 제릉으로 떠나갈 때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금난수는 도산서원과 여러 조상의 묘에 참배하면서 인근 지역을 돌아다녔고, 그 때마다 동네의 어른들과 친척 어른들, 그리고 고을 수령이 모두 금난수를 전별하는 말을 해 주었다. 집을 떠나기 하루 전인 10월 21일에는 강가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이들이 모두 금난수의 집에 와서 떠들썩하게 전별을 해 주었다.
다음날까지도 벗들은 길가까지 일부러 나와 금난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일부러 뒤쫓아 와 인사하는 둥 각별한 정을 보여주었다. 봉화에서는 금난수의 발길을 붙잡으려고 시냇가에서 일부러 매를 풀어놓고 술판을 벌여놓았으니, 금난수가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마지막 날까지 전별주를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대취하여 먼 길을 떠날 수도 없었다. 하룻밤 묵으러 들른 이경량의 집에서는 이미 취한 금난수에게 다시 한 번 술상을 차려 주었다.
1579년(선조 12)- 금난수 50세
9월 13일
아침에 숙부 및 습독 권중옹權仲雍을 뵈었다.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보러왔다.
9월 16일
이굉중李宏仲이 지나는 길에 찾아왔기에 함께 운암雲岩 동촌東村에 갔다. 손숙향孫叔向과 김자평金子平 등 여러 사람들이 모여 물고기를 잡았다. 진사 이대용李大用이 먼저 돌아갔다. 저물녘에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9월 21일
하단사협下丹砂峽에서 천렵을 하여 물고기 십여 마리를 잡았다. 금협지·훈지, 봉사 이봉원, 이보경, 권의숙 등 여러 사람들과 천변에 앉아서 회를 치고 술잔을 돌렸다. 밤이 깊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22일
길을 나섰다. 조 봉화가 금훈지琴壎之와 함께 역동서원易東書院 천변에 나와서 전별해주고, 이수량李遂樑과 이윤량이 분천 길가에 나와서 전별해주었다. 지나는 길에 온계의 두 아재를 뵙고 오겸중吳謙仲 댁에 들어갔다. 이보경도 뒤쫓아 왔다. 홍정洪亭에 당도하니, 봉화 사람 금희도琴希度, 금행원琴行源, 금의경琴義卿 및 류종개柳宗介 등이 시냇가에서 매를 풀어 놓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매우 취하고 날도 어둑하여 이경량李慶樑 집에 투숙하였다. 술과 안주를 차려 정성스럽게 대접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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