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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이야기

천안 삼거리

천안 이야기ᆢ

뿌연 흙먼지를 연거푸 일으키며 사각진 큰 몸체의 버스는 경사진 차령고개를 힘겹게 넘어갔다.

빨강, 파랑 가로줄무늬 선명한 서울행 직행버스가 구불구불 고갯길을 내려와 중간 유지 천안터미널에 정차했다.

이것은 70년대 후반 나의 초등 6년 여름방학 때의 천안을 경유한 첫 서울 상경기의 모습이다. 누님들 따라 서울구경과 친척집 방문길은 새까만 시골아이의 대도시와 첫 만남이 되었다. 그 첫 도회지는 멀게만 느껴졌던 천안이었다.


부여, 공주 간 도로는 그 당시에도 잘 정비된 2차선 포장도로였다. 그런데 천안까지의 주요 도로가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상태였던 것이 의외였다.


아마도 부여출신 5ㆍ16 정권 2인자로 알려진 김 전 총리의 영향력일 것으로 추측된다.

혹자들은 그가 고향땅을 위해서 해늫은 것이 없다고 과소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60년대 중반 그 암담했던 시절에 해방 이후 우리정부로는 최초로 수십만 헥타르인 부여벌 경지정리와 1킬로에 달하는 현대식 백제대교를 건설했다.

그리고 부여, 공주 백제문화권 개발도 손을 댔다. 물론 부소산성 정비에서는 훗날 시멘트계단 등을 걷어내는 졸속 공사가 되긴 하였지만 65년도 대교 준공식에 최고 통치자가 헬기로 부여를 방문했다고 한다.


어쨌든 예로부터 천안의 위치는 모두가 인정하는 교통의 요지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이 고장의 사실상

제2의 도시임은 변함없다.


예전에 천안은 삼거리로 유명했다. 그 이유인즉  삼남 대로의 분기점이 바로 천안이기 때문이다. 그중 한쪽길은 청주를 지나 괴산과 문경새재를 넘어 경상도로 향했다. 다른 한길은 옛 충남의 주도인 공주를 거쳐 강경과 전라도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길목이었던 이유로 천안 삼거리의 흥타령이 탄생했을 것이다. 또한 그 내용에 등장하는 능소의 이야기 등 다양한 얘깃거리가 전해진다.


동쪽의 흑성산 자락에는 독립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웅장한 건축물과  수십만평의 대칭형 경관 배치는 군사정권 시절 전시행정의 표본이긴 하지만  나 자신도 학창 시절  얼마의 성금을 보탰던 의미 있는 기념관이기도 하다. 며칠 전 처음으로 그곳을 방문해 보니 좋은 입지조건과 주변경관이 빼어나 한번쯤 방문의 가치는 있다고 느껴졌다.


천안은 여행 중 먹거리인 호두과자의 본향이다. 고려말 호두가 중국에서 도입되어 차령능선 광덕산 자락에서 최초로 재배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까지도 대단위 호두 농장이 있으며  한해에 수천 톤의 생산량을 자랑한다고 한다.

또한 한화그룹의 대규모 호두농장도 이곳에 있다.


한화의 창업주가 천안 직산면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한화의 전신인 한국화약시절 고향출신이 취업을 하러 오면

우선적으로 고용할 정도로 애향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래서 야구명문 북일고 등을 설립하고 후원하였다.


또한 유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던 이 시대 지성 중의 한분인 도올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천안의 좋은 교통여건을 떠올리며 서울을 오가며 향학열에 불탔던 학창 시절을 회상하였다.

요즘은 수도권전철이 천안까지 연결되었지만 그전에도 열차만 타면 서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천안은 전지, 전자, 바이오 등

첨단산업단지가 몇 개나 들어와 있다. 따라서 젊은 층이 모여드는 역동적인 도시의 이미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인생 후반기를 천안과 인연을 맺으면서 천안 예찬의 펜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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